본문 바로가기

경제인 이야기/이병철

이병철 명언 어록 리스트 마지막으로 이병철의 명언입니다.비록 이병철 라이벌 정주영 회장처럼 많이 회자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삼성 창업주답게 음미할 만한 명언들이 많습니다. (삼성 이병철 어록들) (스폰서 링크) . . 마음이 가난하면 가난을 못 벗는다.마음에 풍요를 심어라. 돈이 가는 길은 따로 있다. 그 길목을 지키며 미소를 지어라 돈은 돈을 좋아한다. 생기는 즉시 입금시켜라. 티끌 모아 태산이 된다. 작은 돈에도 감사하라. 있을 때 겸손 하라. 그러나 없을 때는 당당 하라. 한발만 앞서라. 모든 승부는 한발자국 차이이다. 좋은 만남이 좋은 운을 만든다. 좋은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라. 효도하고 또 효도하라. 그래야 하늘과 조상이 돕는다. 인색하지 말라. 인색한 사람에게는 돈도 야박하게 대한다. . . 더운밥 찬밥 가리지 말라... 더보기
이병철 회장의 24가지 질문에 대한 명품답변 하지만 이후 이병철 회장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결국 이병철과 천주교인들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됩니다. (참고로 이병철의 종교는 원불교로 알려졌는데, 이것은 며느리 홍라희 등의 영향이고, 원래 이병철의 종교는 무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죠.)(스폰서 링크) .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병철이 가까운 원불교도에게 이런 질문을 하지 않고, 천주교도에게 한 것은 의미심장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병철의 24가지 질문에 대하여, 이십여년이 흐른 다음에 인천 가톨릭대 교수인 차동엽 신부가 답변을 합니다. (이병철 회장의 24가지 질문에 대한 명품답변) 이병철 회장의 질문과 더불어 차동엽 신부의 답변을 함께 음미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네요. . . 아무튼 이병철 회장의 24가지 질문을 잘 살펴보.. 더보기
이병철 회장 사망 이유 사실 이 말의 근거는 없습니다.그냥 인터넷에 만연된 루머중의 하나일 뿐이죠. 게다가 삼성이 대구를 근거지로 창업을 했기 때문에, 초창기에는 영남 인재들이 쉽게 입사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고요. (스폰서 링크) . . 사실 과거 배정충 부회장이나 고홍식 사장처럼 호남 출신들이 삼성 그룹의 고위직을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정확하게는 김용철 변호사 이후) 삼성에서는 호남 출신 고위직이 거의 전멸한 상태네요. 이런 부분들이 '이병철의 호남 인재 홀대론' 같은 루머들을 마치 정설처럼 만드는 것 같습니다.삼성이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호남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인재가 '실력'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회사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네요. * 이병철 사망 원인 결국 한국에서 '돈.. 더보기
이병철 회장의 호남 차별 루머의 진실은 그리고 삼성 역시 현대처럼 '왕자의 난'을 겪게 됩니다.차남 이창희가 박정희에게 투서를 날렸는데, 그 투서 내용이 '탈세와 해외 비자금 밀반출 등'이었습니다. 이에 박정희는 이창희의 투서 내용을 무시하고, 이를 이병철에게 알려줍니다. 결국 대노한 이병철은 차남 이창희를 그룹 경영에서 추출했고, 이창희와 연관이 의심되던 장남 이맹희 역시 삼성 후계자 자리에서 내쫓게 됩니다.(원래 이맹희는 이 사건 이전부터 이병철과의 관계가 서먹했음) (스폰서 링크) . . 이것이 바로 삼남 이건희가 이병철의 후계자가 된 사건인데,사실 이창희가 한 행동은 굉장히 '서툰 행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삼성 비자금들은 박정희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창희는 순진하게 '삼성 비자금을 박정희에게 고발하.. 더보기
이병철 이건희 이재용의 공통점과 반복되는 역사 어쩌면 삼성그룹에서는 노동자들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두번째, 이병철은 반도체 공장을 설립하면서, 오늘날 삼성전자의 '커다란 성공'의 초석을 다지게 됩니다.그런데, 삼성 반도체를 살펴보면, 무척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스폰서 링크) . . 제일 먼저 반도체 사업을 주장한 사람은 바로 이병철이 아니라 이건희입니다.이병철에게 전자산업의 쌀 '반도체 사업'을 주장했고, 결국 이건희는 사재를 출연하여 한국반도체를 인수하게 됩니다. 하지만, 한국반도체는 곧바로 경영 위기를 맞게 되었고, 이병철은 삼성전자로 하여금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여 회생시키게 됩니다.이병철 이건희 사진 어찌보면 이병철, 이건희, 이재용 3대의 인생이 무척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이건희의 반도체 사.. 더보기
삼성의 무노조경영과 이병철의 성격 이 때문에 세지마 류조를 비롯한 일본 극우들이 한국에 도움을 준 것이죠.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병철이 세지마 류조를 이용하여 어떻게 박정희게게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전두환에 대한 영향력은 위에서 설명했음) (스폰서 링크) . . 하지만 세지마 류조가 한국 전경련의 특별고문으로 위촉되었던 점이나, 이병철이 사망한 다음에 세지마 류조가 해외 우인 대표로 조사를 했던 것을 보면, 둘의 막역한 사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병철의 중앙일보 역시 일본 극우 인사인 세지마 류조에 대하여 찬양하는 칼럼 및 기사들을 연달아 보도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한국에 일본 극우인사 세지마 류조에 대한 '호감어린 이미지'가 형성된 것은, 이런 중앙일보의 과거 활동이 큰 역할을 했죠.이병철의 사.. 더보기
이병철과 전두환 노태우 관계 실제로 전두환 등이 쿠데타로 집권한 다음에 이병철은 '절친' 세지마 류조에게 이런 연락을 합니다. - 한번 은밀히 한국으로 방문해서, '군의 선배'로서 전두환·노태우 두 장군을 격려하고 조언을 해 달라. 결국 전두환을 만난 세지마 류조는 2가지 조언을 해줍니다. (스폰서 링크) . . 첫번째는 정통성때문에 시달렸던 전두환에게 올림픽을 개최하여 국민들에게 자부심을 넣어주라는 것과,두번째,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하여 3S 정책을 펴는 것이 좋다는 조언을 한 것이죠. 세지마 류조: "국민들은 대형 스포츠 이벤트에 무척 열광한다." 또한, 나중에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이런 조언을 하기도 합니다. 세지마 류조: "기회를 봐서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 직접선거 대신 내각책임제를 확립하라." 즉.. 더보기
이병철과 박정희 일본의 아들 비하 (소설과 드라마 '불모지대'의 주인공 모델로, 나중에 이토츄 상사의 회장까지 됨) 아무튼 이 세지마 류조가 관동군으로 근무하던 시절에 박정희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하급 장교였던 박정희가 세지마 류조의 명성은 들어보았겠죠. (스폰서 링크) . . 다만,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다음에, 관동군 혹은 만주군 인맥들들이 중용이 됩니다.(참고로 세지마 류조는 일본 육사로 박정희의 2년 선배였음) 이 덕분에 세지마 류조는 청와대를 자주 방문하여 박정희와 환담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죠. 실제로 박정희는 세지마 류조, 기시 노부스케 등의 '일본 육사 출신'들과 막역한 사이였습니다. 세지마 류조 회고록- 한국에는 일본 육사 출신 우수한 인재가 많았고, 대다수가 내 후배였다. 박정희가 이들 일본 육사 출.. 더보기
이병철 사카린 밀수 사건의 진실 이맹희: "그로 인하여 삼성에 리베이트로 백만 달러를 줬고, 아버지는 이 사실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알렸다." 이맹희: "박정희대통령은 (아버지에게) "여러 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라고 했고, 삼성은 공장 건설용 장비를, 청와대는 정치자금이 필요했다." (스폰서 링크) . . 이맹희: "결국 밀수를 하기로 결정하고, (우리는) 정부도 모르게 (사카린외에 추가적으로) 몇가지 욕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밀수 현장은 내가 지휘했고, 박정희 정권은 (밀수를) 은밀히 도와주기로 했다." 이맹희: "(삼성은) 평소 들여오기 힘든 물품들도 이번 기회에 들여오고자 했다. 그래서 사카린 원료와 전화기, 냉장고, 변기, 스테인레스 판과 에어컨 등을 들여왔다." 이처럼 사카린 밀수 사건은 이병철과 박정.. 더보기
삼분폭리사건과 이병철의 업적 아무튼 이병철은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의 성공을 발판으로 큰 돈을 벌게 되면서 사업 영역을 확장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5.16쿠데타가 일어났고, 이병철은 부정축재자로 구속이 됩니다. 당시 이병철이 재계 1위였기에, '부정축재자 1호'로 불리게 되었죠. (1961년) (스폰서 링크) . . 하지만 이병철은 군사 정권에 협력을 약속하고, 군사정권 역시 경제 성장을 위하여 이병철과 타협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의 비호를 받던 일부 재벌들이 '삼분폭리사건'을 일으킵니다. (1964년) 제일제당의 설탕, 대한제분의 밀가루, 동양시멘트와 대한양회의 시멘트 등은 사람들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이었습니다.이병철과 박정희 사진당시 박정희 정권은 어떻게 해서든 재벌들로부터 '돈'을 긁어 모으려고 했고, 이병철.. 더보기
이병철 혼외자와 이병철 여자관계 그리고 이병철의 일본인 아내와의 사이에서 1남 1녀가 태어납니다. 바로 이태희와 이혜자가 그들이었고, 이들은 이병철의 호적에 정식으로 올라가게 됩니다.(이병철 4남 이태휘(1953.5.8)와 6녀 이혜자(1962.8.4)는 일본인 구로다와의 사이에서 태어남) (스폰서 링크) . . 이병철의 일본인 혼혈 아들 이태휘는 나중에 일본인과 결혼해서 일본에서 살게 됩니다.(이태휘의 일본 이름은 쿠라다 야쓰데루인데, 아마 어머니의 성을 물려받은 것 같음) 1986년 이태휘는 삼성그룹 비서실 이사와 CJ상무로 임명되면서 잠깐 한국에서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곧이어 일본으로 건너가서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살게 되었죠.삼성 회장 이병철 사진 참고로 이병철 4녀인 이덕희 역시 혼외자식으로 추정이 됩니다. 이덕희는 이건희.. 더보기
이병철 일본인 부인 구로다와 이맹희 사건 그런데 6.25 전쟁 당시에 이병철의 삼성가의 전통(?)을 하나 세우게 됩니다. 바로 아들들인 이맹희와 이창희 등을 군대에 보내지 않고, 몰래 일본 유학을 보낸 것이죠. 이맹희는 1931년생으로 1952년 기준으로 22살, 이창희는 1933년생으로 1952년 기준으로 20살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젊은 남성들이 군대에 징병되었고, 어린 학생들마저 학도병으로 최전선에서 싸울 때 이병철 아들들은 일본에서 공부를 하면서 미래(?)를 준비하게 됩니다. (스폰서 링크) . . 이맹희: "내가 1952년 동경농과대학에 정식으로 입학을 했고, 그 해 동생 창희까지 일본으로 공부하러 건너 왔다." 이맹희: "아버지께서는 우리 형제들의 숙식을 구라다상 (이병철 일본인 첩)에게 우리 형제들의 숙식을 맡겼다." (참고로 이병철.. 더보기
이병철의 사업 성공 이유 미군정기에는 중국 대륙과의 무역 (공산화되기 이전의 중국 대륙), 그리고 6.25때는 일본과의 무역을 주를 이루었죠. 특히, 전쟁기간동안 이병철은 (포탄이 터진 다음의) 고철과 탄피를 녹인 놋쇠를 모아서 일본에 수출하고, 생필품을 일본으로부터 수입을 합니다. (스폰서 링크) . . 이병철: "공급이 가장 달리는 생필품을 하나하나 조사했는데 달리지 않는 물자란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6.25와 함께 국내 물자가 잿더미가 되었고, (남한에서의) 생산 능력이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이병철: "정부 역시 당장 수입을 촉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6.25 전쟁 당시) 부산에서의 사업 경쟁이란 자금 동원 능력과 기동력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이병철: "(전쟁 속에서) 경황없이 1년을 보내고 결산해 보니 3억 원의 .. 더보기
이병철의 삼성이 대구를 근거지로 삼은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병철을 친일파라고 비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시 수많은 조선인 지식인과 경제인들이 '일제 찬양'과 '일제 비행기 헌납 운동', '정신대 참여 독려' 등을 했지만, 이병철은 이런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하지 않았으니까요. (스폰서 링크) . . 일본 관리들을 통하여 사업을 잘 영위하면서도, 이병철 마음속에 일본에 대한 반감이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이병철은 일본이 곧 패망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일부러 그들과 거리를 두었던 걸까요? 아무튼 조금 시간이 흐른 다음 (중일전쟁 이후 태평양전쟁이 터지면서), 이병철은 일제의 패망을 확실하게 예견하게 됩니다.결국, 사업을 정리하고 경남 의령으로 돌아가서 칩거를 선택했죠. 아마 이병철은 어린 시절부터 일본의 유학 경험, 그리고 무역업 등을 .. 더보기
이병철 가계도와 일본군의 관계 이병철: "이렇게 손쉬운 돈벌이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토지 투자 사업은 순조로웠다. 식산은행의 금고가 마치 나의 금고로 착각될 정도가 되었다. 1년이 지나자 나는 연수 1만석거리, 2백만 평의 대지주가 되어 있었다." 보통 이병철이 도정 공장을 통하여 큰 돈을 벌다가 중일전쟁때문에 사업이 망했다라고 서술하는 책들이 많은데, 사실 이병철의 진짜 사업은 땅 투자(? 혹은 투기)였습니다. 게다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산하 조선 식산은행의 절대적인 도움 덕분에, 이병철의 땅투기는 탄탄대로였죠. (스폰서 링크) . . 하지만 중일 전쟁의 발발로 땅값이 폭락하게 되었고, 결국 이병철의 부동산 사업 역시 망하게 됩니다.(중일전쟁때문의 땅값 폭락과 식산은행의 갑작스러운 대출금 회수 결정으로, 이병철은 은행빚을 겨우 갚음.. 더보기
이병철 이완용 관계와 이병철이 친일파일까 그런데 일제시대 이병철은 친일파였을까요?아니면 독립운동을 몰래 도운 재벌이었을까요? 가끔씩 이병철과 이완용 집안의 관계, 이완용 손자 이병철이라는 말들도 있는데, 사실 이병철과 이완용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이완용의 후손중에 이병철이라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삼성 이병철과는 동명이인일뿐이죠. (스폰서 링크) . . 게다가 이병철은 반일 의식(?)을 가지기도 합니다.원래 일본 유학을 떠날 때 배에서 이병철은 안호상 박사 (같은 동향 출신)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배멀미에 심하게 시달린 두 사람은 돈을 더 주고 2등 선실에 1등 선실로 옮기려고 했는데, 일본인 순사가 이를 막습니다. "1등 선실은 너희 조선인들이 이용할 데가 아니야!" 이 사건으로 이병철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꼈고 엄.. 더보기
이병철 부인 박두을 집안 재력 결국 이병철은 아내의 얼굴도 한번도 보지 못하고, 집안 어른들이 정해준 혼처와 결혼하게 됩니다. 원래 박두을은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으로, 대구 달성의 명문이자 지역 유지였습니다.오히려 이병철 집안보다 아내 박두을 집안의 형편이 더 나았죠. 이병철 아들 이맹희: "당시 달성에 있었던 외가 (이맹희 어머니 박두을 집안) 쪽이 더 부농이었던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시집이라고 왔더니 집도 좁고 그렇게 가난해 보일수가 없었다."란 말을 자주 들었다." (스폰서 링크) . . 이병철 아들 이맹희: "외가 쪽 지체가 워낙 높아서, (주변 어른들로부터) '한쪽으로 기우는 혼사'였다는 말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박두을에 대한 이병철의 첫인상은 어땠을까요?이병철: "집사람은 순천 박씨 기동공의 4녀였다.. 더보기
삼성 이병철 회장 아버지 집안 내력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1910년 2월 12일 태어나 1987년 11월 19일 사망하게 됩니다. 사망 당시 이병철 나이는 78살이었죠. 참고로 기업인 이병철 고향은 경남 의령이었고, 현재도 이병철의 생가가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병철 고향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스폰서 링크) . . 삼성 이병철 집안 역사이병철 아버지는 이찬우, 어머니는 권재림이었는데, 대대로 진주에서 부자로 알려지 지주였습니다. 이병철의 16대조 할아버지 이계번이 경남 의령에 정착을 했고, 조상들중에서는 승정원 좌승지나 통정대부 등을 지내기도 하는 등, 영남 유림의 명문중의 하나였죠. 또한, 이병철 아버지 이찬우의 재산은 굉장히 많았습니다. 일명 천석지기 농토를 소유한 지주로, 이병철의 라이벌 정주영 회장과는 집안 형편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