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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이렇게 손쉬운 돈벌이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토지 투자 사업은 순조로웠다. 식산은행의 금고가 마치 나의 금고로 착각될 정도가 되었다. 1년이 지나자 나는 연수 1만석거리, 2백만 평의 대지주가 되어 있었다."


보통 이병철이 도정 공장을 통하여 큰 돈을 벌다가 중일전쟁때문에 사업이 망했다라고 서술하는 책들이 많은데, 사실 이병철의 진짜 사업은 땅 투자(? 혹은 투기)였습니다.


게다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산하 조선 식산은행의 절대적인 도움 덕분에, 이병철의 땅투기는 탄탄대로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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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중일 전쟁의 발발로 땅값이 폭락하게 되었고, 결국 이병철의 부동산 사업 역시 망하게 됩니다.

(중일전쟁때문의 땅값 폭락과 식산은행의 갑작스러운 대출금 회수 결정으로, 이병철은 은행빚을 겨우 갚음)


이때 은행 빚을 겨우 청산한 이병철은 당시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하여 장기간 중국 상하이 등을 다니면서, 사업 여건 등을 살펴봅니다.


그리고 무역업에 대한 확신이 서고, 이병철은 대구에 삼성상회를 세우게 되었죠.

삼성 창업주 기업인 이병철 회장 사진

삼성 이병철 가계도

이병철 회장 가계도와 방계 집안들


당시 삼성상회의 주요 사업은 건어물과 청과물 등을 매입하여 만주의 일본군에게 군납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업으로 큰 돈을 만지게 된 이병철은 대구의 조선양조를 매입하게 됩니다. 원래 청주 사업은 일본인이 독점하고 있었기에, 당시 조선인 최초로 일본인의 양조장을 인수했던 이병철은 큰 이슈가 됩니다.

(원래 조선인에게는 청주 사업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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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병철은 청주를 생산하여 역시 만주의 일본군에게 군납을 합니다. (약 95%의 청주가 일본군으로 군납이 되고, 나머지 5% 정도가 일반인들에게 판매됨)


이처럼 이병철의 사업들은 대부분이 일본군에 대한 군납이었습니다.


부동산 사업을 할 때 조선식산은행으로부터의 대규모 대출이나, 건어물 등과 청주 등을 일본군에게 군납할 수 있었던 것은, 이병철의 '일본인 고위 관리들과의 끈끈한 인맥' 덕분이었죠.


이병철: "대구의 요정이 싫증이 나면 서울이나 동래 등지로 나들이를 했으며, 그래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일본의 별부나 경도 등지로 원정을 가기도 했다."


이 당시 이병철이 요정에서 주로 어울렸던 사람들은 주로 조선총독부 관리들로 추정이 됩니다.


브루스 커밍스: "이병철은 항상 자신을 '일본 신사'로 여겼고 일본 여성과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입증했다."

(이병철의 일본인 부인은 아래 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병철을 친일파라고 비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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