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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병철을 친일파라고 비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시 수많은 조선인 지식인과 경제인들이 '일제 찬양'과 '일제 비행기 헌납 운동', '정신대 참여 독려' 등을 했지만, 이병철은 이런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하지 않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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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관리들을 통하여 사업을 잘 영위하면서도, 이병철 마음속에 일본에 대한 반감이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이병철은 일본이 곧 패망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일부러 그들과 거리를 두었던 걸까요?



아무튼 조금 시간이 흐른 다음 (중일전쟁 이후 태평양전쟁이 터지면서), 이병철은 일제의 패망을 확실하게 예견하게 됩니다.

결국, 사업을 정리하고 경남 의령으로 돌아가서 칩거를 선택했죠.


아마 이병철은 어린 시절부터 일본의 유학 경험, 그리고 무역업 등을 시작하기 전의 중국 상하이 현지 시찰 등을 통하여, 일본 패망의 기운을 미리 파악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8.15 광복 이후 이병철은 다시 사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때 이병철은 아버지 이찬우와 이승만 대통령의 친분 덕분에 큰 혜택을 보게 됩니다.


바로 적산기업 (일제가 남기고 간 기업들)이었던 조선생명과 미쓰코시 백화점을 불하받게 되었죠. (조선생명은 후에 삼성화재로, 미쓰코시 백화점은 후에 신세계 백화점으로 발전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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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적산기업들은 계약금 20% 납부에 잔액은 연리 7푼(7%)으로 10년간 분할 상환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인플레이션 30~40%를 감안한다면, 기업을 공짜로 인수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또한, 이병철은 은행으로부터 대규모의 대출도 쉽게 받게 됩니다.

당시 은행 금리가 은행 금리가 13~17% 수준이었찌만, 인플레이션은 매년 30~40%까지 치솟았습니다. 즉, 은행 대출을 받아서 현물을 확보하면, 가만히 앉아서 큰 돈을 벌던 시절이었죠.


사실 그 시절에 은행 대출을 받는 것 자체가 특혜나 다름이 없었죠.


이 당시 이병철의 주력 사업은 무역업이었습니다.

미군정기에는 중국 대륙과의 무역 (공산화되기 이전의 중국 대륙), 그리고 6.25때는 일본과의 무역을 주를 이루었죠.


그리고 대구는 그런 이병철에게 최적의 요충지였습니다.

내륙 지방의 물품이 집중되는 곳이었고, 삼남 지방의 풍부한 소비력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참고로 당시 3대 도시였던 서울과 부산, 대구의 인구를 비교하면 그런 점은 더욱 두드러집니다. (1949년과 6.25 이후인 1955년 인구 비교)

서울 144만여명 -> 156만여명

부산 47만여명 -> 104만여명

대구 31만여명 -> 45만여명


전쟁 후에 부산의 비약적인 성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그래도 전쟁전에는 대구가 내륙 물산의 중심지였기에, 이병철에게는 최적의 장소라고 할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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