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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허재 전성기 6개, 임달식 폭력사건의 원인

전 농구선수이자 현재의 농구 감독인 허재의 별명은 농구 대통령입니다. 한국 농구 사상 최고의 선수 중의 하나가 아니라, 그냥 최고의 선수입니다.

 

(전문가를 모아놓고 최고의 선수 한명을 뽑으라고 하면, 90% 이상이 허재를 뽑을 거 같네요. 농구 선수로서의 업적뿐만 아니라, 은퇴 후에 농구 감독으로서의 카리스마 역시 농구 대통령이라고 불리기에 전혀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입니다.)

 

포지션 역시 올어라운드 플레이어였습니다.

원래 주 포지션은 슈팅가드였지만, 현역때 포인트가드 역시 많이 수행했고, 국가대표때는 간혹 파워포워드도 했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센터 역할도 했으니, 아무 자리에 갖다놔도 평균 이상의 실력을 보이곤 했습니다.

 

사실 허재가 사건 사고는 많이 일으켰습니다. 경기 전날 술먹고 숙취가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농구 경기에 나섰던 일화는 유명하죠. 상대편 선수들이 허재 곁에 가기만 하면 풍기는 술냄새 때문에 안심했다가, 후반기에 술이 깬 허재에게 자신도 모르게 그냥 발리(?)는 사건도 많았고요.

그만큼 술고래에 자기 관리도 못하는데도, 한국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면 허재의 최 전성기는 언제일까요? 이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만, 몇 개의 시기로 예시를 놓을 수는 있죠.

 

1) 대학 1학년때.

1985년 농구대잔치(당시에는 프로리그가 없어서 실업팀과 대학팀이 모두 출전하는 농구대잔치가 가장 큰 리그였죠)에서 성인 선수들로 이루어진 실업팀을 제치고 중앙대학교 농구팀을 결승전까지 이끌고 갑니다.

 

(당시에 중앙대에는 허재외에도 김유택과 한기범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허재의 활약이 엄청났죠.)

하지만 결승전에서 현대전자를 상대로 허재는 26득점, 17리바운드, 13어시스트를 달성하면서 한국 최초로 트리플더블을 달성하지만, 현대에게 패하고 맙니다.

 

2) 기아자동차 입단

허재가 기아자동차에 입단한 첫해, 기아는 첫 패권을 차지합니다.

허재외에도 유재학, 한기범, 김유택 등이 있기는 했지만, 기아 무적의 시대(1988~1991)는 허재가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3) 세계 대회

위의 기아 무적 시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허재는 1990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이집트를 상대로 혼자 54점을 올립니다. 그야말로 원맨쇼를 펼친 거죠.

54점은 아직도 세계 대회에서 깨지지 않는 불멸의 기록입니다. 앞으로 상당기간 깰 수가 없는 기록으로 여겨지기도 하죠.

 

4) 1994, 1995년 우승

기아 무적의 시대도 한물 가고 김유택이나 한거범 등은 부상으로 잘 뛰지 못하게 됩니다. 허재 역시 집중적인 마크 등으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1993년 농구대잔치에는 학교 후배인 중앙대 농구부에게 플레이오프에서 패하고 맙니다.

허재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굴욕이죠.

 

결국 허재는 1994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당시 엄청난 전력의 고려대(당시 고려대와 연세대는 꽃미남 슈터들로 엄청난 열풍을 일으켰을 때죠. 현재 응답하라 1994의 배경이 되는 시대임)를 꺽고, 결승전에서 삼성까지 물리치면서 결국 우승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1995년 농구대잔치도 허재는 우승을 거둡니다. 당시 고려대는 전해의 패배를 밑바탕으로 신기성, 김병철, 양희승, 현주엽, 전희철이라는 거의 국가대표팀 급 라인업을 구성해서 정규시즌 전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상태였습니다.

이런 고려대를 격파한 것은 순전히 농구대통령이라는 허재의 투지와 재능 덕분이었습니다. (기아는 준결승전에서 고려대를 이겼고, 결승전에서는 이상민이 이끌던 상무를 상대로 우승합니다.)

 

 

5) 97-98시즌 준우승

허재는 이제 완전히 노장입니다. 삼십대를 넘은 나이이기에 은퇴를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시기였죠.

그리고 기아차 동료들 역시 거의 노쇠화가 되엇고, 허재는 플레이오프에서 오른손 손등이 부러지는 부상까지 당합니다.

하지만 허재는 여기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합니다. 오른손에 깁스를 하고 눈덩이가 찢어진 상태에서 허재는 몸싸움을 하고 드리블하며 슈팅을 날렸습니다.

결국 허재는 결승에서 패배하지만, 이때의 허재 경기를 너무나도 감명깊게 본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음주파동으로 안티팬이 많았던 허재가 이 경기를 바탕으로 다시 호감이 되었죠.)

 

게다가 챔피언 결정전 MVP는 우승팀의 선수가 아니라 준우승팀의 허재가 차지합니다. KBL에서 MVP가 준우승팀 선수 중에 나온 일은 이때가 유일하죠.

 

 

6) KBL 우승

이제 허재의 전성기는 지났습니다. 곧 은퇴를 해야 하죠.

그리고 은퇴하기 전에 허재는 마지막 불꽃을 부사릅니다. 김주성과 당시의 용병이었던 데이비드 잭슨을 잘 구슬리고 달래서 팀을 승리로 이끕니다. 이제 허재 스스로가 돌파를 하기에는 너무 늙었지만, 팀을 이끄는 능력만큼은 오히려 더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었죠.

게다가 허재는 갈비뼈가 부러진 상태에서도 투혼을 발휘합니다. 이 모습에 더더욱 허재는 호감으로 변하죠.

 

 

결국 허재는 2003-2004 시즌이 끝난 후 은퇴를 합니다. 그의 등번호인 9번은 영구결번이 되었고, 성대한 은퇴식도 갖습니다.

농구대통령, 농구 9, 농구 천재라는 최고의 선수에게 걸맞은 장엉한 의식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위의 6차례중에서 허재의 최전성기를 언제라고 생각하시나요?

 

허재가 활약했던 여러 동영상 

허재, You`re my hero .

 

[Classic Basketball]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남자농구 대표팀 하이라이트 .

 

[KBL]1999.02.21 나래vs현대.flv .

 

 

c.f 허재 임달식 폭력사건 정리(폭행 사태)

 

원래 허재는 무면허 음주 운전이나 1996년 아틀란타 올림픽 음주 파동 등으로 상당히 이미지가 좋지 않습니다. 게다가 폭력 사건에도 관련이 되어서 한때 비호감의 대표 이미지이기도 했죠.

그런데 허재가 술을 좋아해서 두주불사를 했던 것은 맞지만, 폭력에 대해서는 좀 억울한 부분이 있습니다.

 

 

 

원래 임달식과 허재가 폭력을 주고 받은 것으로 잘못 알려집니다.

(당시 동영상 사건 설명)

- 전반 5. 허재를 전담 마크하던 임달식 선수(신한은행 감독)가 허재(KCC감독)를 거칠게 육탄전으로 막자 허재는 코트에 넘어진다. 쓰러진 허재 선수는 벌떡 일어나 더 쳐보라는 재스처인 듯 임달식의 얼굴에 이마를 들이대고, 임달식 선수는 왼팔로 멱살 잡듯이 사정거리를 조정한 후 허재 얼굴에 주먹을 날린다.

 

- 심판은 폭력적인 행동을 문제 삼아 두 선수 모두 퇴장시키고 허재는 "왜 맞은 사람이 퇴장 당해야 돼?"라고 하며 임달식에게 달려드는 도중 김성욱(현대전자 센터) 선수의 주먹에 또 맞게 된다. 그리고 김성욱은 허재를 피해서 도망간다.

 

 

이렇게 동영상을 보면 허재는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맞기만 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심판이 가해자였던 임달식과 김성욱에게 반칙을 선언해야 했는데, 어이없게도 맞았던 피해자인 허재까지 같이 퇴장을 시키죠.

(사실 임달식이 반칙을 저지른 것도, 허재의 실력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까 막지를 못해서 육탄전으로 저지하다가 폭력을 행사한 것이죠.)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어이없는 판정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도 논란이 많았습니다. 단지 허재가 이미지가 안좋았기에, 같이 비난을 받게 됩니다.

 

결국 경기가 끝난 후에 농구협회는 선수와 심판에게까지 징계를 내립니다. 임달식에게 자격정지 1, 김성욱과 허재에게는 자격정지 6개월, 이날 심판을 봤던 장덕희 주심과 윤세용 부심에 대해서도 경기운영 미숙사유로 자격정지 3개월과 감봉 처분을 내리는데, 여기서도 피해자였던 허재에게 과도한 징계를 내리는 모습을 알 수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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