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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그룹의 경쟁력은 과소평가되었고 (참고로, 대우와 삼성의 사업 영역은 그다지 겹치지 않았음. 대우전자나 종합상사 등이 겹치기는 했지만, 대우와 현대의 사업 영역은 자동차, 조선, 무역 등 훨씬 더 많이 겹쳤고, 한때 사람들은 정주영과 김우중을 라이벌로 부르기도 했음) (원래 사람들이 이병철과 정주영을 많이 비교했지만 사실상 80년대부터는 김우중이 그만큼 급성장하게 됨) (스폰서 링크) . . 김우중의 특혜 논란 결론김우중의 '부실기업 정상화 능력'은 당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지만, 정책자금을 지원받는 등의 특혜 역시 존재했고, 이 덕분에 빠른 성장을 하게 됨. 그렇다면, 김우중은 전적으로 특혜 덕분에 '모래 위의 집짓기'를 한 것일까요? 그것은 절대 아닙니다.오히려 대우그룹의 경쟁력은 과소평가된 면이 적지 않죠. . . 대우그룹이.. 더보기
김우중이 받은 특혜와 정주영의 비판 아무튼 누구의 주장이 사실일까요?정답은 바로 양자의 주장이 모두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김우중의 '정부로부터 부실 기업들'을 넘겨 받았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고, 김우중이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특혜를 많이 받았다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스폰서 링크) . . 여기에 김우중의 '사업의 비법'이 있습니다.김우중은 정부로부터 한국기계나 새한자동차, 옥포조선소 등의 부실기업들을 넘겨받으면서 '정책자금'을 지원받습니다. 바로 부실기업을 정상화한다는 명목의 은행 자금이었죠. 이 자금은 나중에 갚아야 될 돈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거저나 다름없는 돈이었고, 김우중은 부실 기업들을 하루빨리 정상화시켜서 이익을 냈고, 또한 정책자금으로 또다른 M&A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발판으로 삼게 됩니다. .. 더보기
박정희로부터 특혜는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이처럼 둘의 친분은 깊었지만, 김우중은 박정희 정권으로부터의 특혜를 극구 부인합니다. 김우중: "내가 정부로부터 특혜를 받은 것은 없다. 정부가 부실에 빠진 한국기계 (당시 공기업)을 삼성과 현대 등 다른 대기업들에게 먼저 인수를 타진했다." (스폰서 링크) . . 김우중: "하지만 다들 못한다고 했고, 결국 우리 대우가 지목되어서 내가 청와대로 가게 되었다(1975년 한국기계 인수). 당시 국내 기업들 중 우리 대우가 (무역 등의 성공으로) 은행 예금을 제일 많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우중: "그리고 (부실 기업이었던) 한국기계가 잘 되니까 정부에서 골치아픈 것들 (새한자동차, 대한조선공사 옥포조선소 등)을 또 우리에게 맡긴 것이다." (1978년 새한자동차와 대한조선공사 옥포조선소 인수) 김우중.. 더보기
김우중과 박정희의 첫만남 처음부터 특혜는 없었다, 라고 주장을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1960년대 초반, 김우중이 막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당시에, 직접 박정희를 찾아가면서, 둘의 인연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죠. 사실 김우중과 박정희의 첫만남을 자세하게 알게 된다면, 김우중의 성격도 알 수 있습니다. (스폰서 링크) . . 우선, 5.16쿠데타 이후에 김우중은 박태준 (당시 박정희 비서실장)을 찾아갑니다.그리고 사진 (박정희와 아버지 우당이 함께 찍은 사진) 한장을 내밀면서 박정희와의 면담을 요청합니다. 이 사진을 받아본 박정희는 당장 김우중을 만났고, "(아버지와) 많이도 닮았구먼"라며 굉장히 반가워합니다. 이후에도 김우중과 박정희의 개인적인 친분은 지속됩니다. . . 김우중: "박정희 대통령께서 1970년대 서울역 앞에 .. 더보기
샐러리맨으로 만족하지 못했던 김우중 그런데 원래 한성실업은 국내 판매만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였고, 해외 무역은 하지 않았습니다.하지만 일개 사원이었던 김우중이 주도하여 해외 무역 시장을 개척했고, 결국 김우중은 3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한성실업에서 이사로까지 승진하게 됩니다. (스폰서 링크) . . 하지만 자기 사업을 하고 싶었던 김우중은 결국 1967년 퇴사를 한 다음에, 대우실업을 설립하게 되었죠. 이후 불과 7년만인 1974년 1억불의 수출탑을 달성하는 등, 무역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능'을 선보였습니다. 사실 오늘날의 종합상사중에서 대우인터내셔널 (후에 포스코대우로 개명)이 한동안 부동의 1위를 지켰던 것은, 이런 김우중의 DNA가 대우인터내셔널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 .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김우.. 더보기
시장 선점의 중요성을 깨달은 김우중 하지만, 잠깐의 독점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김우중이 30부 정도를 판매할 무렵에는, 다른 소년들도 연달아 도착했고,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었기 때문이죠. 그러자 김우중은 또다른 전략을 선택합니다. (스폰서 링크) . . 바로, 당시 신문 가격이 50원이었는데, 상인들은 보통 100원짜리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잔돈 50원을 거슬러 주는데 시간이 걸렸고, 김우중은 미리 신문 1부와 잔돈 50원을 묶어서 준비를 합니다. 100원을 내미는 상인에게 신문과 잔돈 묶음을 함께 건네면, 그만큼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만족하지 못했던 김우중은 곧바로 세번째 '방안'을 생각하게 됩니다.바로, 방천시장에 제일 먼저 도착해서 곧바로 '외상'으로 신문을 판매하는 것이죠..신문이 필요한 상인들에게 신.. 더보기
천재적인 사업가 기질은 어릴 때부터 김관중: "나중에 보니 어머니 손가락이 부어올라서 벌겋게 되었어요." 6.25 피란 무렵부터 김우중 일가는 대구에서 지내게 됩니다. 아버지 우당이 대구 사범학교 교장을 오래 역임했고, 김우중 등도 대구에서 태어나는 등, 대구를 잘 알았기 때문이죠. (스폰서 링크) . . 그런데 당시 김우중의 형들인 김관중과 김덕중 등은 군대에 갔기 때문에, 김우중이 사실상의 소년 가장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1951년, 당시 김우중의 나이는 16살이었는데, 할 일이라고는 신문 배달밖에 없었습니다.이 당시의 일화로 김우중의 기업가 체질 (혹은 장사꾼 자질)을 잘 알 수 있습니다.김우중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며 청년들의 우상이 되었지만... 우선, 김우중은 대구의 방천시장을 주요 판매시장으로 삼습니다.. 더보기
김우중 집안이 가난했던 이유 이후 아주대 총장과 김대중 정권에서는 교육부 장관을 지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넷째가 바로 김우중이고, 김우중의 남동생이 바로 김성중입니다.원래 대우자동차 사장으로 일하다가 1993년 당시 대우그룹 협력업체였던 한국델코전지를 맡아서 독립하게 되었죠.(스폰서 링크) . . (현재 델코는 세계 최고의 배터리 제조업체로 성장하게 됨) 그리고 김우중의 유일한 여동생 김영숙은 윤석철 박사와 결혼하게 됩니다. (김우중 매제 윤석철)윤석철 역시 학계에서 유명한 학자이고, 한때 한양대학교 경영대학 석좌교수를 지내기도 했죠. 이처럼, 김우중 가문은 엘리트로 유명한데, 어린 시절의 김우중은 굉장히 가난하게 성장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우당이 대구 사범학교 교장과 서울대 상과대학 교수 등을 역임했고, 제주도 도지사에서 .. 더보기
대우 회장 김우중의 복잡한 가계도 우선, 김우중의 제일 큰형인 김태중의 고향은 일본입니다. 1921년 7월 4일생으로, 우당 김용하가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 태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김우중과는 배다른 형제로 보임) (스폰서 링크) . . 계속 일본에서 성장을 하다가, 나중에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고, 한때 대우어패럴의 고문을 맡기도 했죠. 참고로, 대우어패럴은 전두환 정권 시절에 '구로동맹파업'의 발단이 된 회사입니다. 당시 2천여명의 노동자들이 혹사와 저임금을 견디지 못하고 1984년 6월에 대규모 파업을 벌였던 사건이었죠. 그리고 김우중의 둘째 형인 김관중은 군인 출신입니다. 원래 정승화 장군의 부하로 일하기도 했고, 나중에 준장으로 예편을 한 다음에는 대우의 계열이었던 대창기업의 대표이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 . 김우중의.. 더보기
김우중 부친 아버지 우당의 이력 아이러니하게도, 김우중을 성공시킨 이유가 결국은 그를 패망으로 이끌었네요. 우선, 김우중의 어린 시절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김우중의 아버지 우당 김용하와 어머니 전인항은 당대의 엘리트들이었습니다. (스폰서 링크) . . 우선 김용하의 고향은 제주도였고, 평양 제2고보를 졸업하고 한때 일본 법정대학(法政大學) 예과로 유학을 떠나기도 했습니다.하지만 학비 문제로 결국은 경성제국대학 철학과 (현재의 서울대)에 입학여 졸업하게 되었죠. 이후 김용하는 함경북도 종성중학교의 교사, 대구 사범학교 교장(이때 김용하의 제자가 바로 박정희였음), 서울대 상과대학 교수, 제주도 도지사 등을 역임하는 등, 당대의 엘리트로 이름을 날렸습니다.하지만 김우중의 아버지 김용하는 여자 관계가 좀 복잡했던 것 같습니다. (밑에서.. 더보기
김우중 나이와 원조 샐러리맨 신화의 시작 당시 이미 대우는 재계 서열 4위에 오르면서, 명실상부한 4대 재벌에 포함이 됩니다.(김우중 회장 나이는 현재 82살이고 (1936년생), 1982년 당시 김우중 나이는 불과 47살이었음. 이래서 사람들이 김우중을 원조 샐러리맨 신화라고 부름) (스폰서 링크) . . 이후에도 대우의 성장(?)은 지속되었고, 1997년에는 삼성과 LG를 추월하고, 현대에 이어서 재계 서열 2위가 되기도 하지만, 1998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대우는 1999년 구조조정이 됩니다. 당시 부채 규모가 500억 달러였고, 추후 드러난 바에 의하면 대우그룹의 분식회계가 약 20조원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합니다.단군 이래 최대의 부도였고, 이와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되었죠. . . 이후 김우중은 해외로 도피생활을 .. 더보기
김우중 고향이 대구인 이유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엇갈립니다. 혹자는 김대중 정권에 의하여 안타깝게 대우가 기획 해체되었다고 말하고, 또 한편으로는 당시 부실 기업이었던 대우가 해체되는 것은 당연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 그리고 대우가 여전히 살아 남아 있다면, 동유럽과 중동, 아시아의 세계 경영을 하던 시장이 과연 우리나라의 영향력 아래에 여전히 있었을 것인지를, 한번 짚어봅니다. (스폰서 링크) . . 대우 김우중은 1936년 12월 19일 대구에서 태어납니다. 올해 82살이죠. (대우 김우중 나이) 지금은 고령이지만, 창업 1세대중에서는 김우중의 나이가 가장 어린 축에 속합니다. (김우중의 배경은 이병철이나 정주영 등의 다른 창업 1세대와 좀 다르기에, 창업 1.5세대로 분류하기.. 더보기
정주영의 이명박 평가 정주영의 이명박에 대한 평가는 어땠을까요?이명박은 분명 현대건설 사장 출신으로, 정주영의 부하 직원이었습니다. 과연 정주영은 이명박을 어떻게 봤을지 궁금하네요. (스폰서 링크) . . 먼저,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결정적인 계기 드라마 '야먕의 세월'에 대하여 비판적입니다. 즉, 야망의 세월에 나왔던 '이명박의 공들'이 드라마 작가에 의하여 각색되었다는 주장이죠. . . 태국 파타니 나리왓 고속도로 사건현대건설의 중동 건설 사업조선소 건설자동차 개척 등 이런 부분들이 드라마에서는 이명박의 공으로 나오는데, 사실 정주영의 말처럼 이것들은 '거짓'입니다. 정주영의 증언처럼, 당시 이명박의 선배들이 한 일이었고, 오히려 그룹 오너였던 정주영의 공이 결정적이었죠. (정주영이 '나는 밑의 직원이 매스컴에 나오면 그.. 더보기
정주영 명언 정주영 어록과 가치관 정주영의 명언, 현대 회장 정주영 어록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가장 대표적인 말이 "하긴 해봤어?"입니다.부하 직원들이 "힘듭니다."라고 보고할 때마다, 해보고 그런 말을 하냐는 뜻이었고, 이것 때문에 현대에서는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것이 거의 기업 모토가 되다시피했습니다. (스폰서 링크) . . 두번째로 정주영의 가치관을 잘 나타낸 말입니다. " 아무리 돈이 많아도 가치 있는 일에 쓰기에는 모자라는 것이 돈입니다. 그런데 왜 가치 없고 의미 없는 일에 돈을 낭비합니까?" "사람은 의식주를 얼마나 잘 누리고 사느냐보다는 많은 사람에게 좋은 영향력을 얼마나 미치면서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즉, 정주영은 돈만 아는 돈벌레가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치고 싶어했습니다. . . (스폰서 링.. 더보기
김정일의 물음에 정주영 회장의 답변 김정일: "왜 남북합작 공단을 신의주가 아니라 개성에 만들려고 합니까?" (개성은 휴전선과 가까운 군사적 요충지로, 당시까지 군사 시설들이 굉장히 많았기에, 북한 군부는 '개성 공단 계획'을 반대함) (스폰서 링크) . . 정주영: "물건을 만들어서 남쪽에 팔아야 합니다. 개성에서 만들어 남쪽으로 실어 가 수출해야 효율성 높아집니다." 이처럼 정주영은 철저하게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사업을 바라봤고, 이것이 결국 김정일에게도 먹혀서 개성공단이 진행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금강산 개발은 오히려 북한의 경계심을 역이용했습니다. 정주영: "금강산은 평양과 멀리 떨어져 있기에 개방해도 북한 정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마침 내 고향도 금강산이지 않습니까." . . 정주영: "(외국의) 관광객들이 들어가면 .. 더보기
정주영 회장 소떼 방북 사건의 이유 결국 정주영은 1998년 500마리의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통과하여 북한으로 가게 됩니다. (참고로 정주영이 소떼를 몰고 북한으로 간 이유)원래 이전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정주영은 17살 때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원'을 몰래 훔쳐들고 가출을 합니다. (스폰서 링크) . . 즉, 고향땅에서 소판 돈을 가져왔으니 그걸 다시 고향(땅이 포함된 북한)에게 되돌려 준다는 의미와 더불어, 당시까지 북한 농사에 굉장히 중요했던 소를 몰고가서 북한 경제에 도움이 되겠다는 의도였죠.) 당시 정주영은 민간인 신분으로 최초로 판문점을 통과하여 북한으로 갔는데, 사람들은 군사적 긴장감이 높았던 휴전선이 드디어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감을 갖게 되었죠. 또한, 정주영의 소떼 방북 사건은 전 세계 매스컴의 주목을 받.. 더보기
정주영 회장의 마지막 꿈은 그렇다면 정주영 회장의 마지막 꿈은 무엇이었을까요? 대개 사람들은 북한과의 통일 환경 조성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정주영의 꿈은 그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북한과의 통일은 물론이고 시베리아 개발을 통하여 우리 민족이 한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었죠. 정주영의 마지막 꿈- 시베리아 횡단철도 연결 (스폰서 링크) . . - 첫번째는 서울을 출발하여 원산과 러시아를 거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TSR) - 두번째는 서울 평양 신의주와 중국을 거쳐 유럽으로 연결되는 중국횡단철도(TCR) 정주영: "부산에서 독일의 함부르크까지 가는데, 배로 갈 경우에는 27일이 걸리지만, 철도(중국횡단철도)로 가는 경우에는 불과 7일이면 가능하다." 정주영: "운반 비용 역시 컨테이너 하나 당 배는 2200달러이.. 더보기
현대 왕자의 난과 정주영 정몽구 정몽헌 정주영의 마지막 꿈에 대하여 적기 전에, 먼저 현대 가문의 왕자의 난에 대하여 언급할 필요가 있네요. 지난 2000년 정주영의 아들들이 현대그룹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난(?)을 일으킵니다. 원래 정주영은 장남인 정몽구에게는 현대자동차그룹을 (원래 정주영 장남인 정몽필이 있었지만 이른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을 했고, 이후 정몽구가 장남 취급을 받음), 그리고 5남 정몽헌에게는 현대건설과 현대전자 등을, 6남 정몽준에게는 현대 중공업을 각각 물려줄 계획이었습니다. (스폰서 링크) . . (그외에도 3남 정몽근에게는 현대백화점 등의 유통 부문을, 4담 정몽우에게는 현대 알루미늄 등을, 7남 정몽윤과 8남 정몽일에게는 현대의 금융계열사를 물려줌) 그런데 당시만 해도 현대의 주력은 현대건설과 현대전자였고, .. 더보기
정주영과 이병철의 차이점 여기서 정주영의 도덕성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정주영과 이병철은 똑같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이야기를 합니다. 이병철의 사업보국"기업은 인류와 국가에 도움을 주는 사업으로 국가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 (스폰서 링크) . . 이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일자리입니다.이병철은 기업이 발전하여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국가와 사회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죠. 하지만 이전의 이병철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병철은 '삼분사건', '사카린 밀수 사건' 등 돈을 위하여 도덕심을 버린 행적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어쩌면 사업보국이란 대의명분일 뿐, 그에게는 '돈을 버는 것만이 지상의 가치'가 아니었던가 하네요. . . 게다가 현재 이병철의 후손인 이건희와 이재용의 삼성그룹은 해외 설비 투자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더보기
정주영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이유 그리고 1992년 정주영은 정계에 진출하게 됩니다.김동길과 함께 통일국민당을 창당했고, 대표 최고위원으로 선출이 되었죠. 정주영: "5공화국 (전두환 정권) 아래서 힘들지 않았던 기업이 없었겠지만, 아우 인영이가 옥고까지 치르면서 창원중공업을 강탈당했던 기막힌 사건은 잊혀지지가 않는다." (스폰서 링크) . . 이처럼 정주영은 정치권의 압박때문에 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는데, 당시 대놓고 금권선거를 자행합니다.(원래 정주영 역시 국보위때문에 자동차와 중공업중에서 하나를 포기하도록 압력을 받았음) 현대그룹 임직원들과 가족들을 노골적으로 동원했기 때문에, 당시 통일국민당 당원 수가 1200만명이나 될 정도였죠. 하지만 사람들은 금권 선거 및 재벌 정주영에 대한 반발감이 있었고, 대통령 선거에서 최종 특표수는 3..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