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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

이병철은 구인회를 버리고 방송을 얻었지만 그 외에도 구인회는 1960년대 초반에 이병철의 제안으로 방송 사업을 동업하게 됩니다.1964년 두 사람의 지분 50대 50으로 ‘라디오서울’과 ‘동양TV’를 설립했죠. 하지만, 두 그룹 사이의 알력이 심해서 결국 라디오는 삼성이, TV는 럭키가 하기로 합의를 봅니다.그런데 당시 전망이 밝은 쪽은 방송 사업이었고, 결국 이병철은 언론 사업 재편을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죠. (스폰서 링크) . . 결국 구인회는 이병철을 찾아가서 "자네가 다 (라디오와 TV) 하게. 자네 생각대로 다 하게."라고 하면서, 방송 사업에서 손을 털고 나가게 됩니다. 아마 구인회는 이병철의 전자산업 진출이 단순히 사돈의 사업 영역을 침입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이병철의 평소 여러 행동들이 못마땅했기 때문에 화를 낸 것이 아닌가.. 더보기
구인회와 이병철이 대판 싸운 이유 일단은 세간에 알려진 일화들입니다. 이맹희 (이병철 회장 큰아들): "(1968년 봄 안양 골프장) 야외 테이블에서 아버지(이병철 회장)와 구(인회) 회장님, 내가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다가, 아버지가 전자산업에 이야기를 꺼냈다." (스폰서 링크) . . 이맹희: "‘구 사장, 앞으로 우리도 전자산업을 하려고 하네.’ (중략) 당시 구 회장님은 화를 벌컥 내면서 ‘(이익이) 남으니까 하려고 하지’라고 느닷없이 쏘아붙였다. 즉, 이익이 보이니까 사돈이 하는 사업에 끼어들려고 하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이맹희: "(중략) 아버지는 구 회장이 화를 내자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저 민망해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일로 두 분 사이는 아주 멀어졌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하여 훗날 구인회가 남긴 술회.. 더보기
구인회와 이병철이 사돈을 맺은 이유 이렇게 구인회는 화학과 전자를 양 날개로 승승장구하게 됩니다.하지만 이 시기에 실패도 있었는데, 바로 이병철과의 합작 사업이었던 '방송 사업'이었습니다. 원래 이전 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구인회와 이병철은 지수보통학교에서 같이 공부한 사이입니다. (구인회가 이병철보다 3살 연상임) 그리고 나중에 구인회의 셋째 아들인 구자학이 이병철의 둘째 딸 이숙희와 결혼하면서 서로 사돈지간이 되기도 했죠. (스폰서 링크) . . 참고로 구자학은 LG의 구씨 집안 중에서도 좀 특이한 인물입니다. 원래 구자학은 해군사관학교를 나와서 미국으로 유학을 갈 생긱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어른들의 혼사 결정에 순순히 따랐고, 이때부터 주로 삼성에서 근무를 하게 됩니다. 당시 구자학은 제일제당과 동양TV, 중앙개발 등에서 근무를 하.. 더보기
박정희 정권이 LG를 도운 이유 구인회는 여기에 굴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구인회는 1962년 박정희 정권의 공보부 장관 이원우와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참고로 이원우 장관은 구인회의 동생인 구평회와 LG임원 박승찬과 동기동창임. 그래서 평소에도 구인회를 친형처럼 대우함) 이때 이원우는 구인회에게 '국정 홍보'의 어려움을 토로합니다. (스폰서 링크) . . "정부에서 하는 일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고 싶은데, 방법이 없습니다." 이 때 구인회는 '절묘한 수'를 제시합니다."정부의 일에 대한 홍보는 라디오 방송으로 하면 되지요." 이원우 공보부 장관: "하지만 우리나라에 라디오가 있는 집이 많이 없잖아요." 이에 구인회는 정부에 금성사가 만든 라디오 5천대를 기증하기로 제안했고, 이것이 박정희 정권에서 벌인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 더보기
꺾이지 않는 구인회의 신념 이후 3년동안 판매부진으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미제와 일제 밀수 라디오들과 미군 PX 유출 상품들이 시장을 석권하고 있었고, 주요 소비층들 (대부분의 부자들)이 국산 제품에 눈길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죠. 게다가 1961년에는 5.16 군사정변이 일어납니다. (스폰서 링크) . . 구인회 역시 5.16 직후 부정축재자 명단에 끼여 있었고, 어쩔 수 없이 약 3주 동안 사직동의 어느 집 행랑방에 몸을 숨기게 됩니다.그런 구인회를 대신하여 아우 구평회가 교도소에 잡혀 들어간 상황이었죠. 하지만, 5.16 군사 쿠데타 세력은 하루빨리 민심을 잡기 위하여 '경제 건설'을 내걸었고, 사업가들을 풀어주면서 구인회도 예전처럼 다시 활동을 할 수 있게 됩니다. . . 하지만 신규 진출한 라디오 사.. 더보기
LG전자의 태동 1959년 당시 구인회는 신규 사업 아이템을 찾고 있었습니다. 당시 럭키화학의 여러 제품들이 국내에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후발 주자들이 시장에 진입하면서 플라스틱 사업의 마진이 점차 떨어지고 있을 때였죠. 그때 구인회 회장은 우연히 반도호텔의 사무실로 들어서다가 윤욱현 기획실장이 음악을 감상하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스폰서 링크) . . 구인회 회장: "아, (음악 듣는 것이) 그리 좋습니까?"윤욱현 실장: "하하, 이게 정말 좋습니다. 하이파이 전축이라는 건데, 마치 오케스트라가 제 눈앞에서 연주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 순간 구인회 회장은 무릎을 탁 칩니다. "그래요, 이걸(전축) 우리가 만들어 봅시다."그러자 윤육현 실장은 "이건 전자산업 분야인데, (전축을) 하고 싶으시다.. 더보기
럭키금성이 LG그룹 이름이 변하고 "그래서 알아보니, 바로 미군부대로부터 흘러나왔는 합성세제라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락희화학에서는 세탁비누를 판매하고 있었기 때문에 '합성 세제' 사업은 '제 살 깎아먹기 생산'이라는 사내에서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하지만 허신구 상무는 자기 주장을 1년동안이나 굽히지 않았고, 결국 구인회도 허신구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스폰서 링크) . . "그래, 확신이 없지 않으면, 이렇게 1년동안이나 주장을 할 수가 없지." 이렇게 우여곡절끝에 나온 하이타이였지만 초창기 판매는 신통치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새 제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죠. (1966년 4월 발매) 하지만 구인회는 하이타이를 꾸준하게 판매했고, 1966년 연말부터 폭발적인 판매가 시작됩니다.사람들의 입에서 '하이타이'라는 말이 .. 더보기
LG회장 구자경의 파격적인 제안 사람들이 국산 치약을 아예 취급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이때 고민을 하던 구인회에게 큰아들 구자경이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아버님, 이번에 창경원(창경궁의 옛날 이름)에서 광복 10주년 기념행사를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 치약 10만개 정도를 뿌리면 어떨까요? 그러면 한번 써본 사람들이 다음에 우리 제품을 사지 않겠습니까?" (스폰서 링크) . . 이런 사은품(?) 행사가 오늘날에는 무척 일반화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무척 생소했습니다.이런 파격적인 제안이 거절될 수도 있었겠지만, 구인회 회장은 과감하게 아들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결국 럭키치약은 사람들의 선입견을 무너뜨리는데에 성공하게 되었죠. 이후, LG그룹의 화학 제품, 생활필수품 사업 영역은 계속적으로 승승장구를 하게 됩니다.미국.. 더보기
기업가 구인회의 통찰력 당연히 떠올린 다음 단계는 '치약'이었죠.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미제 '콜게이트'가 시장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을 때였습니다.이 때 구인회는 치약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했고,장남 구자경이 튜브 제조 기술을 겨우 알아내는 것은 성공했지만, 제일 중요한 '치약 만드는 기술'은 확보하지 못합니다. (스폰서 링크) . . 결국 구인회는 동생 구평회를 직접 미국으로 보내서 콜게이트사의 치약 제조 기술을 알아오게 시킵니다.(오늘날로 치면 산업스파이나 다름이 없는) 구평회는 미국 콜게이트사의 주변 회사를 통하여 마침내 치약 제조 기술을 파악하고 국내로 귀국하게 되었죠.(사실 치약 제조 기술이란 것이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고, 당시 미국 회사들 사이에서는 이런 보통의 기술들은 많이 알려진 상황이었음) 그리고 구인회를 .. 더보기
LG그룹이 4대 그룹으로 성장한 원동력 참고로, 구인회의 이런 성공에는 일면 '운'이 작용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인회보다 조금 더 빠른 시기에 유한양행은 국산 칫솔 개발 계획을 세웠고, 실제로 플라스틱 사출기와 칫솔제조기를 국내로 들여놓았습니다. 하지만 유한양행의 공장은 서울에 있었고, 이게 6.25가 터지면서 폭격때문에 폐허가 되었기 때문이죠.아마 6.25가 터지지 않았다면 유한양행이 칫솔과 플라스틱 사업의 선점 효과를 단단히 누리지 않았을까 하네요. (스폰서 링크) . . 아무튼, 구인회의 사업 초창기의 비결은 바로 '시장을 미리 보는 눈'과 '과감한 투자', 그리고 '생활필수품'이었습니다. 구인회는 크림 사업과 플라스틱 빗 사업처럼 미리 시장을 읽고 과감한 투자를 했습니다. 물론 이런 '시장을 미리 보는 눈'이 항상 성공을 .. 더보기
이승만이 LG의 빗을 보고 감격한 이유 이 덕분에 구인회와 락희화학은 6.25가 한창이던 1952년 8월 우리나라 최초로 플라스틱 사출 성형기를 국내로 도입하게 되었고,곧이어 '깨지지 않는 플라스틱 통'은 물론이고, 플라스틱 빗과 비눗갑, 칫솔, 담뱃갑 등의 다양한 플라스틱 제품들을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스폰서 링크) . .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부자들은 미제나 일제, 혹은 홍콩제의 밀수품 빗을 사용했고,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나무로 만든 빗을 사용할 때였기에,락희화학의 '플라스틱 빗'은 시장에 나오자마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일례로, 국무회의를 할 때 상공부 장관 이재형이 이승만 대통령이 '락희화학의 빗'을 보고할 정도였으니까요. "각하, 이 플라스틱 빗은 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기술로 만든 빗입니다." 그러자 이.. 더보기
LG가 6.25 당시 엄청난 투자를 한 이유 그러다가 구인회는 우연히 미군부대로부터 '플라스틱 통'을 하나를 얻게 되었고, '플라스틱 통' 제조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당시만 해도 국내에서는 플라스틱이 뭔지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음)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구인회는 플라스틱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스폰서 링크) . . 바로 기계와 원료만 있다면, 플라스틱을 얼마든지 만들 수가 있는데, 그 기계가 '굉장히 비싸다'라는 것이 문제였죠. "뭐라고? 2 ~ 3억원?" 플라스틱 기계 가격에 구인회는 까무라칠 정도로 놀랐지만, 곧 기계 도입을 결심합니다.하지만 주변에서는 모두 반대를 하고 나섰죠. "지금 한국전쟁때문에 이런 '큰 투자'는 정말 위험합니다." . . "다른 회사들은 전부 (전쟁때문에) 일본으로 도망갈 준비를 하는데, 우리가 이런 비싼 기.. 더보기
사업가 구인회의 위기 관리 능력 이처럼 구인회의 '럭키크림'은 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고, 당시 교사로 일했던 장남 구자경도 퇴근 후에는 공장에서 일을 도와야 할 정도로, 바쁘게 돌아가게 되었죠. 하지만 아무리 제품이 잘 팔리더라도, 여러가지 문제점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이 때 문제를 해결하느냐, 그리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서, 그 기업의 운명이 결정되죠. (스폰서 링크) . . 먼저, '럭키크림'은 제품 원가 (향료 가격)이 너무 높았고,또한, 크림통 뚜껑이 자주 깨지는 문제가 발생해서,소비자들의 불만을 사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메이쇼쿠' 사의 화장품이 국내로 밀수가 되면서, 시장에서 큰 인기를 얻을 조짐이 보였죠. 구인회는 "큰일이다. (메이쇼쿠의 크림은) 반투명의 아름다운 크림이 용.. 더보기
LG의 크림사업이 성공한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장품 입점은 성공했지만, 화장품을 사겠다는 사람은 없어서, 결국 구인회는 낙담한 뒤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었죠. 하지만 겨울이 되면서 구인회의 크림은 엄청나게 팔리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2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스폰서 링크) . . 첫번째는 구인회의 '아마쓰크리무'의 가격이 굉장히 쌌고, 두번째는 당시 해방이 되면서 일제 시대때의 '억압적인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지면서 여성들이 화장품을 바르는 것이 유행이 되었기 때문입니다.(태평양 전쟁때는 물자 부족으로 화장품 등이 굉장한 고가였음) 이런 분위기속에서 신규 제품이면서 값이 싼 제품인 구인회의 '아마쓰크리무'가 각광을 받게 된 것이죠. 이에 구인회는 크림 제조 기술자인 김준환의 실력을 믿게 되었고, 그와 함께 공장을 설립하여 자체 .. 더보기
LG에서 구씨 집안과 허씨 집안과 지분 비율 아무튼 이 때 허만정이 출자한 돈은 구인회의 조선흥업사 자본금의 1/4에 해당할 정도로 큰 금액이었습니다.(나중에 허씨 집안은 좀 더 투자를 해서 LG내의 구씨와 허씨 비율은 대략 65대 35의 비율로 나뉘게 됨) 아무튼 1945년 해방 직후 구인회는 부산에서 조선흥업사를 설립하지만 (미군정으로부터 허가받은 무역업 1호 업체), 당시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돈을 벌지는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인재와 자금을 얻었는데, 구인회는 향한 곳은 어디였을까요?바로 당구장이었습니다.(스폰서 링크) . . 당시만 해도 시대가 혼란스러워서, 마땅한 사업 아이템을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당시 구인회는 2명의 동생인 구철회와 구정회, 그리고 허준구 (구철회의 맏사위)와 함께 당구를 치면서 사업의 기회를.. 더보기
GS회장 허창수 가계도와 적통 구인회는 이런 정보를 얻고는 동생들과 함께 집안의 땅을 재빨리 팝니다. 그리고 당시 진주보다 더 큰 부산으로 진출을 하게 되는데, 그로부터 5년 뒤인 1950년에 실제로 농지개혁법이 실시가 되었고, 지주들은 정부로부터 땅 대신에 지가 증권을 받게 됩니다.하지만 극심한 인플레이션때문에 지가 증권은 곧이어 휴지 조각으로 변하게 되었지만, 구인회는 이미 땅을 다 처분한 뒤였기 이런 피해를 받지 않을 수 있었죠. (스폰서 링크) . . 아무튼 해방 이후의 어서선한 시기에, 갑자기 사돈 집안의 허만정이 아들 허준구를 데리고 찾아옵니다.(참고로 허만정은 구인회의 장인 허만식의 6촌이고, 동시에 허준구 역시 구인회 동생 구철회의 맏사위로, 구씨와 허씨 집안은 여러차례 겹사돈을 맺음) GS 회장 허창수 가계도 - 허만.. 더보기
구인회 아들 구자경이 군대를 피한 이유 게다가 구인회는 광목에 독특한 문양을 넣었고, 이런 개성은 소비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게 됩니다.그의 경쟁자들이 평범한 광목을 만들 당시에, 구인회는 '부가가치'를 넣으면 '상품의 가치'를 상승시킬 수 있다, 라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이죠. 이렇게 구인회는 포목으로 큰 돈을 벌게 되지만, 만주사변이 터지고, 1940년 일제는 생활필수품 통제령을 발동합니다. 이 때문에 구인회는 더 이상 포목 장사를 할 수 없게 되었고, 수산물 사업으로 전환을 했지만, 이 역시 태평양전쟁 터지게 되면서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스폰서 링크) . . 또한, 구인회는 1944년 트럭 30대로 운수업을 시작했지만, 전쟁의 여파로 이 분야에서도 돈은 그다지 벌지 못하고 1945년 광복을 맞게 됩니다. 참고로, 1945년 .. 더보기
LG 구인회 가계도와 적통 '집안의 장손'인 구인회만은 '천한 장사치의 일'을 하지 않기를 바랬기 때문이죠. 그런데 구인회 할아버지는 시대의 변화를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고, 또한 구인회의 재능 (2년 전의 지수협동조합 일)을 그대로 썩히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하게 됩니다.결국 구인회 할아버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손자를 옹호했고, 이 덕분에 구인회는 비로서 장사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죠. (스폰서 링크) . . 이렇게 구인회는 1931년 아버지로부터 자본금 2천원을 받고,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장사를 하던 동생 구철회의 자본금 1800원까지 합쳐서, 동생과 함께 '구인회상점'이라는 포목상을 시작합니다.(참고로 1931년 당시 구인회 나이는 불과 25살이었지만, 이미 슬하에 장남 구자경을 비롯하여 4남매가 있었음) LG구인회 가계.. 더보기
구인회 회장 부인 허을수와의 결혼으로 구씨와 허씨는 겹사돈도 많이 맺었고, 그 전부터 인연이 굉장히 깊었습니다. (아무튼 결혼 당시 구인회 나이는 14살, 구인회 부인 허을수 나이는 16살로 조혼이었음)(그리고 구인회 큰아들 구자경이 1925년에 태어나는데, 아버지 구인회와는 나이차이가 불과 18살밖에 나지 않았음.당시 시대상으로 이것은 굉장히 평범한 일이었음) (스폰서 링크) . . 아무튼 구인회는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 2학년을 수료하고 20살이 되던 1926년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당시 구인회의 고향 마을에는 일본인 무라카미가 잡화점으로 큰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승산리 일대에서 유일한 잡화점을 운영하면서, 잡화류와 문구류, 석유 등을 완전히 독점적으로 공급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당시 구인회는 "마을 주민들이 너무 비싼 돈으로 무.. 더보기
GS 창업주 허만정과 독립운동 또한, 구인회의 동업자 허씨 집안 역시 이런 특징들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그들 역시 강한 유교적 가풍을 갖고 있고, 또한 독립운동을 몰래 지원한 이력을 갖고 있죠. 특히, 허만정 (LG 구인회와의 동업자)은 구인회와 동업하기 전부터 백산상회라는 위장 회사를 만들어서 독립자금을 조달하는 등, 독립운동 지원에 헌신적이었습니다. (스폰서 링크) . . 사실 손바닥이 마주쳐야 박수를 칠 수 있듯이,LG의 구씨 집안과 허씨 집안이 이런 비슷한 면이 있었기에 동업을 할 때도 별다른 불협화음이 없었고, 또한 훗날 서로 결별을 할 때에도, 소위 말하는 '아름다운 이별'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제 연암 구인회의 어린 시절을 본격적으로 짚어봅니다.먼저, 구인회는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우다가 1921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