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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인 이야기/정주영

사업 초창기때 정주영 회장의 비밀

확실히 십대의 젊은 남자를 움직이는 것은 '사랑'이 아닌가 하네요.


아무튼 마지막 4번째 가출때 정주영은 인천에서 부두노동과 막노동을 하다가 경성 (현재의 서울)으로 가서 쌀가게에 취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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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쯤에는 정주영이 변호사가 되는 것을 포기한 것처럼, 정주영 아버지도 아들에 대해서는 거의 반포기를 한 상태같네요.

(정주영의 첫사랑은 나중에 정주영이 대북 사업을 하는 중요한 원동력중의 하나가 됩니다.)


이후 정주영은 여러가지 일을 하게 되지만, 성공만을 맛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선 정주영의 성실성을 눈여겨본 쌀가게 주인은 아들이 아닌 점원이었던 정주영에게 쌀가게를 넘기게 됩니다.


쌀가게 주인집 아들은 여자에 빠져서 가산을 탕진했던 반면에, 정주영은 '성실한 배달원', '장부를 쓸 줄 아는 배달원'으로써, 쌀가게 주인의 신임을 한몸에 얻었기 때문이죠.


(변호사가 되기 위한 발판으로 삼았던, 경성실천부기학원에서의 배움이 결코 쓸모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네요.)


하지만 불과 2년만에 쌀가게 (정주영의 복흥상회)는 문을 닫게 됩니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1940년부터 쌀에 대한 배급제를 시작하면서, 쌀가게의 존재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죠.



그런 다음에 정주영이 도전한 사업분야는 바로 자동차 수리공장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조선총독부 고위 관리나 일본군 고위 장교단, 잘 나가는 사업가들이 자동차를 몰았는데, 당시 기술 수준이 낮다보니 자동차가 한번 고장이 나면 수리에 10일씩이나 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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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분야에서 정주영은 3일만에 차를 수리해주는 '빠른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자동차 수리 분야를 파고듭니다.

쌀가게처럼 정주영의 '성실성'이 시장에 먹혀들었던 것이죠.


하지만 자동차 수리사업 역시 직원의 실수로 공장에 화재가 났고, 공장 내부가 모두 불에 타게 되면서 망하기 일보 직전까지 가게 됩니다.


이때 정주영은 자신의 후원자 오윤근을 찾아갑니다.

(말이 후원자이지 실제로는 사채업자임)


정주영: "돈을 다시 돈을 빌려주십시오. 만약 여기서 내가 망하면 (돈을 한번도 떼이지 않았다는) 당신의 이력에 흠이 생기지만, 만약 다시 돈을 빌려주면 그 돈으로 재기해서 갚겠습니다."


평소 정주영의 성실성을 높이 평가하던 오윤근은 쾌히 정주영에게 돈을 빌려주었고, 이 돈으로 정주영은 자동차 수리 공장을 다시 차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업 역시 오래가지를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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