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그룹의 제4세대 지도자 수업을 받고 있는 구광모 상무는 좀 특이한 사람입니다.이전 글에서 구광모가 구본무의 양자가 된 이유를 설명했는데, 그만큼 LG그룹은 유교적인 가풍이 확고부동한 집안입니다.장자 상속의 원칙을 지키기 위하여 구본무가 동생의 아들 (즉, 자신의 친조카)을 양자로 들이고, 후계자 수업을 할 정도니까요.(스폰서 링크) . .그런데 그런 유교적인 집안에서 구광모는 좀 독특한 사람입니다. (LG황태자 구광모)원래 LG의 구씨 집안 ..
마지막으로 LG그룹 창업주 구인회의 어록입니다."한번 사귄 사람과는 헤어지지 말고, 부득이 헤어진다면 적이 되지 말라."그리고 구인회의 동업자라고 할 수 있는 허만정의 유훈입니다."(사업의) 경영은 구씨 집안이 알아서 잘한다. (내 자손들인 허씨들은) 처신을 잘해서 돕는 일에만 충실하라."(스폰서 링크) . .둘 다 하나같이 인화를 강조했고, 자손들이 그런 선조의 뜻을 잘 따랐기에, 오늘날의 LG가와 GS가 있는 것 같습니다.또한, 구인회가 바라..
이번에는 구인회의 사돈 겸 동업자였던 허만정에 대하여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이전 글에서 소개한 것처럼, 허만정은 일본 유학을 막 마치고 돌아온 셋째 아들 허준구를 사돈 관계인 구인회에게 맡기고, 본격적으로 자금을 투자합니다.(참고로 허만정은 구인회의 장인 허만식의 6촌이었고, 그 아들 허준구 역시 구인회 동생 구철회의 맏사위임)(스폰서 링크) . .이 때 허준구는 구인회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허준구는) 금전을 관리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
그리고 이 덕분에 구자경은 재벌 2세대 총수중에서 현장일을 가장 자세하게 아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참고로 부자간의 나이차이가 불과 18살이었고 아버지의 사업을 초창기부터 도왔기에, 구자경을 우리나라 창업 1.5세대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음)또한, 구인회가 딸에게 호통을 친 일 역시 그의 평소 인품을 잘 알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스폰서 링크) . .원래 구순자는 구인회의 4녀인데, 어느날 구인회가 대학생이 된 구순자와 함께 외출을 하..
이후에도 LG는 구인회가 처음 만든 화학과 전자를 양대축으로 계속 성장, 발전해 나갑니다.우선 2015년 기준으로 삼성그룹의 매출액은 271조 9천억원, 현대차그룹은 171조 4천억원, 그리고 LG그룹의 경우는 114조 3천억원 등을 마크했습니다.만약 LG그룹이 1997년 반도체를 빼앗기지 않고 금융 부문을 포기하지 않았으며,그리고 2003년 이후 GS, LS, LIG 등의 방계 그룹등이 분리되지 않았다면, 그룹의 외형적인 면에서는 삼성과 현대와 여..
당시만해도 회사가 남에게 넘어갈 수도 있다고 걱정이 많았죠.하지만 구인회는 1년동안 회사내부의 인사들을 모두 설득했고(참고로 여러 차례 언급한 것처럼, LG그룹은 구인회의 동생들을 비롯하여 허씨 가문의 여러 인사들이 참여한 회사이기 때문에 구인회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경우에는 리더쉽의 훼손이 일어날 수 있음)(스폰서 링크) . .결국 1969년 우리나라 최초로 기업공개에 성공하게 됩니다.사실 구인회는 인화를 무척 강조한 경영자였습니다.구인회의 용인..
그 외에도 구인회는 1960년대 초반에 이병철의 제안으로 방송 사업을 동업하게 됩니다.1964년 두 사람의 지분 50대 50으로 ‘라디오서울’과 ‘동양TV’를 설립했죠.하지만, 두 그룹 사이의 알력이 심해서 결국 라디오는 삼성이, TV는 럭키가 하기로 합의를 봅니다.그런데 당시 전망이 밝은 쪽은 방송 사업이었고, 결국 이병철은 언론 사업 재편을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죠.(스폰서 링크) . .결국 구인회는 이병철을 찾아가서 "자네가 다 (라디오와 ..
일단은 세간에 알려진 일화들입니다.이맹희 (이병철 회장 큰아들): "(1968년 봄 안양 골프장) 야외 테이블에서 아버지(이병철 회장)와 구(인회) 회장님, 내가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다가, 아버지가 전자산업에 이야기를 꺼냈다."(스폰서 링크) . .이맹희: "‘구 사장, 앞으로 우리도 전자산업을 하려고 하네.’ (중략) 당시 구 회장님은 화를 벌컥 내면서 ‘(이익이) 남으니까 하려고 하지’라고 느닷없이 쏘아붙였다. 즉, 이익이 보이니..
이렇게 구인회는 화학과 전자를 양 날개로 승승장구하게 됩니다.하지만 이 시기에 실패도 있었는데, 바로 이병철과의 합작 사업이었던 '방송 사업'이었습니다.원래 이전 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구인회와 이병철은 지수보통학교에서 같이 공부한 사이입니다. (구인회가 이병철보다 3살 연상임)그리고 나중에 구인회의 셋째 아들인 구자학이 이병철의 둘째 딸 이숙희와 결혼하면서 서로 사돈지간이 되기도 했죠.(스폰서 링크) . .참고로 구자학은 LG의 구씨 집안 중에..
구인회는 여기에 굴하지 않습니다.그러다가 구인회는 1962년 박정희 정권의 공보부 장관 이원우와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참고로 이원우 장관은 구인회의 동생인 구평회와 LG임원 박승찬과 동기동창임. 그래서 평소에도 구인회를 친형처럼 대우함)이때 이원우는 구인회에게 '국정 홍보'의 어려움을 토로합니다.(스폰서 링크) . ."정부에서 하는 일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고 싶은데, 방법이 없습니다."이 때 구인회는 '절묘한 수'를 제시합니다."정부의 일..
"그래서 알아보니, 바로 미군부대로부터 흘러나왔는 합성세제라고 합니다."하지만 당시 락희화학에서는 세탁비누를 판매하고 있었기 때문에 '합성 세제' 사업은 '제 살 깎아먹기 생산'이라는 사내에서 반대가 극심했습니다.하지만 허신구 상무는 자기 주장을 1년동안이나 굽히지 않았고, 결국 구인회도 허신구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됩니다.(스폰서 링크) . ."그래, 확신이 없지 않으면, 이렇게 1년동안이나 주장을 할 수가 없지."이렇게 우여곡절끝에 나온 하이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