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의 명언, 현대 회장 정주영 어록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가장 대표적인 말이 "하긴 해봤어?"입니다.부하 직원들이 "힘듭니다."라고 보고할 때마다, 해보고 그런 말을 하냐는 뜻이었고, 이것 때문에 현대에서는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것이 거의 기업 모토가 되다시피했습니다.(스폰서 링크) . .두번째로 정주영의 가치관을 잘 나타낸 말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가치 있는 일에 쓰기에는 모자라는 것이 돈입니다. 그런데 왜 가치 없고 의미 없는 ..
김정일: "왜 남북합작 공단을 신의주가 아니라 개성에 만들려고 합니까?"(개성은 휴전선과 가까운 군사적 요충지로, 당시까지 군사 시설들이 굉장히 많았기에, 북한 군부는 '개성 공단 계획'을 반대함)(스폰서 링크) . .정주영: "물건을 만들어서 남쪽에 팔아야 합니다. 개성에서 만들어 남쪽으로 실어 가 수출해야 효율성 높아집니다."이처럼 정주영은 철저하게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사업을 바라봤고, 이것이 결국 김정일에게도 먹혀서 개성공단이 진행되었던 것..
결국 정주영은 1998년 500마리의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통과하여 북한으로 가게 됩니다.(참고로 정주영이 소떼를 몰고 북한으로 간 이유)원래 이전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정주영은 17살 때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원'을 몰래 훔쳐들고 가출을 합니다.(스폰서 링크) . .즉, 고향땅에서 소판 돈을 가져왔으니 그걸 다시 고향(땅이 포함된 북한)에게 되돌려 준다는 의미와 더불어, 당시까지 북한 농사에 굉장히 중요했던 소를 몰고가서 북한 경제에 도움..
정주영의 마지막 꿈에 대하여 적기 전에, 먼저 현대 가문의 왕자의 난에 대하여 언급할 필요가 있네요.지난 2000년 정주영의 아들들이 현대그룹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난(?)을 일으킵니다.원래 정주영은 장남인 정몽구에게는 현대자동차그룹을 (원래 정주영 장남인 정몽필이 있었지만 이른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을 했고, 이후 정몽구가 장남 취급을 받음), 그리고 5남 정몽헌에게는 현대건설과 현대전자 등을, 6남 정몽준에게는 현대 중공업을 각각 물려줄 계..
그리고 1992년 정주영은 정계에 진출하게 됩니다.김동길과 함께 통일국민당을 창당했고, 대표 최고위원으로 선출이 되었죠.정주영: "5공화국 (전두환 정권) 아래서 힘들지 않았던 기업이 없었겠지만, 아우 인영이가 옥고까지 치르면서 창원중공업을 강탈당했던 기막힌 사건은 잊혀지지가 않는다."(스폰서 링크) . .이처럼 정주영은 정치권의 압박때문에 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는데, 당시 대놓고 금권선거를 자행합니다.(원래 정주영 역시 국보위때문에 자동차와 중공..
1980년대의 정주영의 대표적인 업적은, 현대그룹보다는 오히려 우리나라를 향한 것이었습니다.바로 1981년에, 88 서울올림픽 유치 위원회 위원장으로 피선되어서 올림픽 유치에 밑거름이 되었고, 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다음에는 '올림픽 조직 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어서 서울올림픽이 제대로 개최되도록 역량을 총동원합니다.(스폰서 링크) . .당시 관계자: "서울에 올림픽을 유치하자는데 서울시가 전혀 나서지 않았다. 올림픽 전시관을 개관하는 데 당시 서울..
그런데 이 공사에 성공한 것에는, 정주영 특유의 '창조적인 사고방식'이 작용하게 됩니다. (아산 정주영 공법 사건)정주영: "공사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는 자재를 빨리 수송하는 방법밖에 없다. 울산에서 철구조물들을 전부 제작해서 해상으로 운반하자."(스폰서 링크) . .결국 현대는 당시 울산에서 89개의 철 구조물 '자켓'을 미리 제작해서 해상으로 수송을 하게 됩니다.(자켓 하나의 무게가 550톤이고 높이는 36미터로 10층짜리 빌딩과 맞먹음)(..
하지만 당시 현대건설 내부에서는 대부분이 정주영의 결정에 반대를 합니다.특히, 50년대부터 현대건설에서 일을 했고, 당시에는 현대건설의 해외건설담당 부사장을 맡고 있었던 정인영 (정주영의 친아우)이 적극적으로 반대를 합니다.(스폰서 링크) . ."회장님(아우 정인영이 형 정주영을 부르는 호칭, 정주영의 아우나 아내도 정주영을 보통 회장이라고 불렀음), 저희는 반대입니다. 그건 회사를 망하게 하는 욕심입니다."하지만 정주영은 그런 아우와 주변 임원..
결국 정주영은 포드사와 결별을 선언하고 단독으로 자동차 공장을 만들기 시작하게 되었죠. (1974년 7월)아마 정주영은 조선소를 막 성공한 이후에 자신감에 충만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현대의 자동차공장은 연간 5만 6천대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이었는데, 금액만으로 따지면 '조선소'보다 더 큰 모험이었죠.(스폰서 링크) . .정주영: "제가 무모하다고요? 난 그런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능성이 적어 보이는 일에 도전하는 것을, 사람들은 그렇게 ..
조선소 다음의 정주영 업적은 자동차 독자 모델 개발이었습니다.원래 정주영의 제대로 된 첫 사업이 바로 '자동차 수리 사업'이었기에, 정주영 본인부터가 자동차 엔진과 각 기관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이런 해박한 자동차 지식을 바탕으로 자동차 산업에 진출했는데, 사실 자동차 수리와 자동차 제조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스폰서 링크) . .아무튼 정주영의 자동차 초창기 사업은 바로 미국 포드사의 합작 파트너사였습니다.원래 당시에는 '현대건설'이..
아마 정주영은 후자였을 겁니다.당장 자신과 계약할 선주들을 찾아 헤맸으니까요.물론 대다수의 선주들은 정주영의 제안을 거절했고,그 와중에 정주영은 그리스의 선박왕 리바노스를 만나게 됩니다.(스폰서 링크) . .정주영: "다른 조선소보다 싼 값에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만든 선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돈을 돌려드리겠습니다."이런 정주영의 파격적인 제안과 열정에 리바노스 역시 감동을 받아서 결국 26만톤의 배를 2척이나 주문하게 됩니다.결국 ..
문제가 발생하기는 했지만, 결코 정주영의 공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그런 다음, 정주영의 두번째 업적은 현대조선소 건설인데, 사실 이 일화는 워낙에 유명하기에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의미로 다시 한번 제대로 짚을 필요가 있네요.(스폰서 링크) . .우선, 당시 정주영은 조선소도 없는 상황에서 배를 발주받습니다.1971년 9월 정주영은 사업계획서 한장과 조선소 건설 부지인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을 들..
그렇다면, 정주영의 업적은 무엇이 있을까요?정주영이 사업적으로 성공한 일들은 무척 많지만, 가장 큰 업적은 4가지를 꼽습니다.첫번째는 바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입니다.1968년 2월 착공해 2년5개월만인 1970년 5월 완공된 경부고속도로는 현대의 정주영을 비롯하여 16개 건설회사가 참여를 했는데, 이중에서 정주영의 활약상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스폰서 링크) . .가장 긴 구간, 가장 어려운 구간을 맡아서 완공했고, 이 덕분에 경부고속도로는 70..
참고로 정주영 여자관계는 무척 복잡하고 미스테리합니다.우선 정주영이 직접 밝힌 바에 의하면, (아들 중에) 막내인 정몽일만 '배다른 자식'이라고 공개한 적이 있었죠. (지난 1992년 대선 출마 당시에)(스폰서 링크) . .하지만 정몽일외에도 정주영의 혼외자들은 상당수라는 것이 추정 가능합니다.일단 6남 정몽준 역시 혼외자중의 한명이죠.원래 정주영과 국악인 안비취 (이미 작고) 사이에 난 아들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정몽준 회장 생모 루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