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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스타 결혼 생활

김병지 아내(부인)김수연- 용접공의 꿈

김병지 김수연 러브스토리 및 인생이야기

운동선수들은 대개 어릴 적부터 운동을 합니다.

프로 선수이고 경쟁이 치열할수록 잠깐의 외도도 허용되지가 않죠.


그런데 김병지는 온갖 난관을 겪은 후에 겨우 축구 선수가 됩니다. 그것도 유명한 프로팀이 아니라, 용접공으로 일하면서 그저 동네 직장인팀에서 활동하게 되었죠.


김병지가 어떻게 대표팀 골키퍼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김병지 아내 김수연과의 러브스토리는 어떤지 궁금하네요.


김병지 아내 김수연 사진, 그리고 아이들(김병지 가족 사진)


축구선수 김병지는 1970년 4월 8일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납니다(김병지 고향). 올해 45살이죠(김병지 나이).

(김병지 학력 학벌) 밀양초등학교, 밀양중학교, 알로이시오전자기계고등학교(당시 부산 소년의 집 고등학교)

(김병지 프로필 및 경력) 1992년 울산 현대 호랑이 입단하면서 프로 무대에 데뷔


이후 1985년 6월 5일 국가대표 A매치로 데뷔하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 2002년 한일월드컵 대표팀 선수로 활약합니다(2002년에는 후보 골키퍼였기에 실제 경기에 나서지는 않음).


그리고 K리그에서 엄청난 기록을 세우고 있습니다. 프로리그 통산 600경기 출장 기록을 세웠고, 현재에도 계속 기록을 갱신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은퇴하기 전까지 출전만하면 역사가 되는 것이죠. 한국 나이로 45살인데, 통상적으로 은퇴를 할 시기를 한참 지났습니다.

골키퍼가 다른 필드 플레이어보다 수명이 긴 편이기는 하지만, 여태까지 한국에서는 김병지처럼 오래한 골키퍼가 나오지 않았고, 외국에서도 보기 드문 사례입니다.



그외에도 김병지는 올스타전 12회 연속 출전, K리그 최초의 골키퍼 필드골 기록 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병지의 자기 관리가 얼마나 철저한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김병지가 데뷔 이후에 몸무게가 단 1kg도 더 찌지 않았던 것은 아주 유명한 사실이죠.


김병지: "(내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음주라고 할 만큼 술을 마신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축구부 친구들이랑 막걸리를 마셨다. 그리고 1998년 월드컵 예선을 통과한 뒤 우즈베키스탄에서 (고)정운 형이 맥주 한잔 권해서 마셨던 적이 있다. 그 뒤론 없다."


김병지: "항간에는 2002년 월드컵때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담배를 피웠다는 소문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루머다. 누군가가 나하고 술을 먹었고, 담배 피는 걸 봤다고 하면 그건 100% 거짓말이다. 나는 아무 것도 없는 제로에서 출발해 이 자리에 온 사람이다. 설령 대표팀의 벤치라도 나에겐 고마운 자리다. 그때도 내 심정을 이해해주고 걱정해주는 팬들이 많았다. 이운재가 나가든 내가 나가든 대한민국이 이기고 성공하는 것이었으니까 참을 수 있었다. 개인적인 상실감은 컸지만…."


김병지의 이런 말이 거짓말일까요?

그의 인생을 보면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김병지: "과거 내가 축구를 시작하고 골기퍼 장갑을 끼게 된 계기가 아주 우연이었다. 경남 밀양초등학교에서 3학년 때 육상부 단거리 선수로 활약했던 나를 눈 여겨 보신 축구부 코치님의 권유 덕분이었다."


김병지: "여러 포지션에서 뛰던 중 우리팀의 골키퍼였던 친구가 다리에 화상을 입어 운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임시방편으로 내가 골문을 지키기 시작했는데, 워낙 스피드가 빨랐던데다 공의 방향성을 읽어내는 눈치가 있었던 탓에 골키퍼로 그럭저럭 적응을 잘했다."


김병지: "이제야 고백하지만 그 때만 해도 골키퍼는 말할 것도 없고, 축구 선수로 이 자리까지 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건상 운동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나는 축구부 골키퍼로 밀양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런데 중학생이 된 후에는 키가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김병지: "마산공고에 진학할 때도 내 키는 163cm에서 더 자라지 않았다. 요즘은 중학교에서도 180cm 이상은 되어야 골키퍼를 맡긴다고 하는데, 당시로서도 더 이상 골문을 지킬 수 없었다."



결국 김병지는 당시 고등학교 감독의 권유로 축구 선수를 그만두게 됩니다.

아마 낙담이 컸을 것 같네요.

그런데 2년동안 쉬는 동안 신기한 일이 발생합니다. 키가 20cm 이상 커버린 것이죠. 하지만 때가 너무 늦었습니다. 축구부는 다른 동기들과 후배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2년동안 쉰 김병지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죠.


김병지: "그때 마침 부산 소년의집(현 알로이시오고)에서 골키퍼를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학을 가면 축구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모두들 만류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축구를 하고 싶었다. 결국 축구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전학을 결정했다."


소년의 집은 부모가 없는 고아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런데 김병지는 양친이 생존해 있는 상황에서도 오직 축구를 하고 싶은 염원에 전학을 간 것이죠.


그리고 김병지의 이런 결정은 별로 빛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나라 대입 체계상, 운동 특기생이 되려면 전국대회 4강에 들어가야 하는데, 김병지와 '부산 소년의 집'은 그런 성적을 낼 수가 없었고, 또 김병지는 2년동안 쉬었기에 프로로 들어갈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김병지: "고등학교 3학년, 8월 대회가 끝난 뒤 나는 선반기술자격증을 따는 한편 입시학원에 등록해 해군사관학교 진학을 준비했다. 국어, 영어, 수학에 기타 암기 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하지만 기초가 약한 영어와 수학을 따라잡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해군사관학교 진학도 실패하고 운동 특기생으로 일반대학에 지원한 것도 낙방했다."


결국 김병지는 대학 진학에 실패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용접 기술을 배우고, 창원 공단에 있는 LG산전(현 LG OTS)에 취직하게 됩니다.


김병지: "그곳은 직장인 축구팀이 한시적으로 운영되던 곳이었다. 매년 봄마다 시장배 직장인 축구대회나 도민체육대회를 하는데, 그 때면 오전에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운동을 하게 해주었다."


김병지는 여기서도 축구선수에 대한 꿈을 놓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군대에 갈 때가 되자 그는 돌연 상무(국군체육부대)에 지원하게 됩니다.


김병지: "일반 선수들은 프로팀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쉽게(?) 들어가는 곳이었지만, 나는 테스트를 거쳐 입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오랫동안 운동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 훈련에 열중했다. 20분 먼저 나가서 훈련하고 20분 늦게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식사 후 생기는 개인 시간에는 웨이트 훈련장에서 살다시피하면서 체력과 근력을 키웠다."


결국 김병지는 상무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프로팀이었던 울산 현대에 입단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이후부터는 팬들도 잘 아는 김병지가 됩니다. 프로리그에서 '꽁지머리 골키퍼', '골 넣는 골키퍼'의 모습으로 팬들 앞에 나타난 것이죠.




어떤 최악의 상황이 와도 김병지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키가 자라지 않아도, 또 대학 축구팀에 들어가지 못하고 직장일(용접)을 할때에도 결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중간에 수많은 유혹이 있었죠.

하지만 김병지는 술이나 담배를 한번도 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했고, 오늘날 K리그에서 엄청난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월드컵 4강신화나 그에 걸맞는 이운재의 활약과 비견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기록과 노력같네요.



그리고 김병지가 이런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성장했기 때문일까요, 그는 인간적으로 굉장히 성숙된 사람입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주전 골키퍼가 되리라고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거스 히딩크의 선택은 이운재였죠.


당시 히딩크와 김병지의 불화설이 떠돌기도 했지만, 이것은 단지 히딩크의 감독으로서의 용병술이었을 뿐입니다.


(예전글) 히딩크가 이운재를 선택한 이유가 나온 글이죠.

2014/06/02 - 이운재 부인(아내)김현주/홍명보와 히딩크의 차이점



어쨌든 당시 김병지의 상실감이 굉장히 컸을 것 같습니다. 바로 전 대회였던 1998년에도 좋은 활약을 펼쳤기 때문이죠.

그리고 김병지는 2006년 월드컵때 다시 한번 탈락의 고배를 마십니다. 2002년에는 그래도 후보로써 벤치는 지킬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아예 대표팀에서 탈락했던 것이죠.

하지만 김병지는 오히려 팬들을 다독입니다.


김병지: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팬 여러분이 가지실 실망감을 제가 다 거둬갑니다."


그러면서 김병지는 국가대표팀의 선전을 기원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쉽게 보일 수 없는 대범함이죠.



그런데 김병지는 말만 이렇게 번지르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좋은 활약을 보여줍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600 경기 출전 등의 기록은 이때에도 꾸준히 쌓아갔던 것이죠.


물론 김병지가 이런 대기록을 달성하고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할 수 있었던데는 그 혼자만의 공이 아닙니다. 바로 아내 김수연 역시 내조를 철저히 했었고, 김병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김병지: "아내가 자기 (미술)작업 얘길 할 때 보면 활기가 느껴져요. 아내가 저 만나서 많은 걸 포기했는데 이제 유턴을 시켜주고 싶어요. 엄마나 주부로서보다는 자기 자신을 찾게 하는 거죠."


김병지 가족 사진


결혼 생활을 하다가 서로 갈등을 빚고 이혼 위기를 겪더라도, 이렇게 상대방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갖고 있으면, 그런 위기는 쉽게 극복할 수 있죠.



김병지 부인 김수연은 김병지보다 3살 연하의 미술학도 출신입니다.

원래 대학에서 섬유공예를 전공했고, 설치미술가로도 활동을 했습니다.

나중에 홍익대 대학원에서도 공부를 했죠(김병지 아내 김수연 직업).


김병지와 김수연은 1998년도에 결혼식을 올렸고, 둘 사이에는 아들만 세명이 있습니다.(김병지 배우자, 김병지 자녀 자식)


첫째 아들은 김태백, 둘째 아들은 김산이며, 둘다 장래 축구 선수의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미안함 때문인지, 김병지는 아내의 부탁이라면 다소 무리라도 들어줍니다. 바로 1998년 포항과의 경기에서 골키퍼로써는 기록적인 필드골을 넣었던 것이죠.


김수연: "생일 선물로 골이나 한 골 넣어줘."


김수연은 다소 농담삼아 가볍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김병지는 실제로 그것을 해내버리죠.



김병지: "당시 1:1 동점 상황, 팀의 승리가 걸린 순간이었다. 마침 프리킥 찬스가 왔고, 그대로 슛을 날렸다."


(이 골은 K리그 사상 최초의 골키퍼 필드골로 기록됩니다.)

김수연에게는 사상 최고의 생일 선물이었을 것 같네요.


결국 골넣는 골키퍼는 아내 김수연 덕분에 탄생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로맨틱하네요.



참고로 김병지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전에 김병지 몰래 카메라편을 제작했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죠.


신동엽: "몰래카메라의 시나리오는 김병지가 지나가는 앞에서 괴한들이 여자를 괴롭힌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김병지가 치한들에게 날라차기 하고는 무지하게 때렸다."


신동엽: "결국 치한을 가장한 연기자들이 도망을 갔는데, 김병지가 그 뒤를 따라가서 또 때렸다. 결국 연기자들이 몰래카메라라고 밝히면서 제발 그만 때리라고 했다."


굉장히 재미있는 에피소드네요.

김병지 역시 욱하는 성질이 있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천수나 기성용 같은 구설수에는 한번도 오른 적이 없죠.


아마 술을 마시지 않는 철저한 자기 관리 덕분에 술집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비록 일개 축구 선수이지만,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사람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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