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대를 살고간 여배우중에 김지미가 있습니다.
여자에게는 잘 쓰지 않는 말인데, 당대의 풍운아라고 할 수 있죠.
한국 영화사 최고의 여배우로 손꼽히고 있고, 4번의 결혼(?)과 4번의 이혼(?)으로 세상을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김지미의 영화 인생과 전남편들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네요.
김지미 젊었을때 과거 사진
탤런트 겸 영화배우 김지미(본명 김명자)는 1940년 7월 15일 대전에서 태어납니다(김지미 고향). 올해 75살이죠(김지미 나이).
(김지미 종교 천주교)
(김지미 학력 학벌) 덕성여자고등학교, 경희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김지미 프로필 및 경력) 1957년 영화 황혼열차로 데뷔
이후 별아 내 가슴에, 청춘극장, 장희빈, 춘희, 토지, 을화, 명자 아끼꼬 쏘냐에 이르기까지 약 700편의 영화에 출연한 한국 영화의 산증인입니다(김지미 대표작).
명자 아끼꼬 쏘냐 등의 영화를 제작하는 등의 제작자로도 활약했고, 1995년부터 2000년까지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죠.
지금도 옛세대들은 화투를 치다가 6이 나오면, "김지미가 나왔네"라고 합니다. 화투 6자, 목단(모란)에 비유될만큼, 미인으로 이름이 높았죠.
김지미 젊은 시절 사진(영화의 한 장면)
여기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즉, 화중지왕이라고 하는 모란처럼 최고의 꽃으로 지칭되기도 하지만, 안좋은 뜻으로는 향이 없고 꽃잎이 너무 만개한 모란에 빗대어 남자에게 헤픈 여자라는 비아냥이 숨어 있죠.
그만큼 김지미의 인생은 화려하면서도 굴곡이 많았습니다.
김지미의 첫번째 남편은 영화감독 홍성기였습니다(김지미 첫남편).
당시 김지미는 1957년 김기영 감독에게 길거리 캐스팅으로 황혼열차에 출연했던 신인여배우였고(18살때), 홍성기는 여러 작품으로 영화계의 주목을 받던 차세대 감독이었습니다.
(홍성기 1924년생, 1949년 여성일기(한국 최초의 컬러 영화)로 데뷔, 애인, 애원의 고백, 실락원의 별 등의 작품을 남김)
김지미: "홍 감독이 나보다 12살 많은 늙은 총각이긴 했지만, 당시 유명한 감독이었다. 사실 영화를 찍는 건지, 사실인지도 모를 정도로 어수선하고 정신없이 몰아치는 와중에 결혼식을 치렀다."
둘은 1959년 결혼해서 첫딸을 낳습니다(이름은 홍경임).
하지만 1962년 9월 4일 이혼하게 되죠.
아마 당시 어린 김지미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제대로 모르고 결혼을 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이혼의 직접적인 사유는 최무룡과의 연애때문이기도 했죠(김지미 이혼이유).
김지미: "결혼 후, 국제극장에 속한 당대 최고 영화사에 최무룡(1928~1999)씨와 내가 전속배우가 됐다. 일주일에 한두 번 집에 들어갈까 말까 하는 상황이었다. 그 나이에 가정이나 남편이 중요하게 보였겠나.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 보니, 뭐가 문제인지도 모른 채 이혼하게 되더라."
남편 홍성기를 볼 시간은 별로 없고, 잘생긴 최무룡(영화배우 최민수 아버지)과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둘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됩니다.
이혼 당시 홍성기와 김지미는 각각 소감을 남깁니다.
홍성기: "하룻벌이를 하는 지게꾼의 신세가 부럽다."
김지미: "어차피 맞을 소나기다."
홍성기는 이혼 후에도 영화감독으로 계속 활동했고, 지난 2001년 타계합니다.
어쨌든 이들을 둘러싼 사건으로 당시 한국 사회는 떠들썩했습니다.
막 떠오르는 신인 여배우가 이혼하자마다 간통 사건에 연루가 되었으니까요.
김지미: "당시 최무룡씨와 현장에 앉아 서로 자기 속상한 얘기 같은 거 털어놓게 되지 않나. 그러다 정이 들었는데, 이게 '빵'하고 터져버리더라. 수습해야 하니까, 안 살 수가 없게 된 거다."
같은 달(1962년 9월 말) 최무룡의 부인인 영화배우 강효실은 막 출산을 한 상황이었습니다.
강효실: "아들 최민수를 놓자마자 열흘만에 남편과 김지미의 간통 사실을 확인했다."
결국 최무룡과 김지미는 간통죄로 구속이 됩니다.
아이를 낳자마자 남편의 불륜이라는 엄청난 사실을 직면하게 된 강효실에게 세상은 동정적이었고, 그만큼 김지미에 대한 비난은 컸습니다.
그리고 김지미씨는 자신의 집을 팔아 위자료 230만원, 채무변제 78만원 등 약 300만원을 강효실에게 주기로 합의하고, 11월 7일 석방됩니다.
(당시 최무룡에게는 돈이 없었음)
아직 이십대의 여배우가 이 정도의 사건에 연루되면, 한국에서는 거의 은퇴해야 하죠. 하지만 김지미는 그 후에도 변함없이 건재를 과시합니다.
김지미: "사람들이 참 희한한 것 같다. 나를 욕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또 한 편에서는 '내가 못한 거 실컷 해서 통쾌하다' '당당하게 잘했다'는 얘기를 편지로, 전화로 전해왔다."
한국 사회가 보수적이라고 하지만, 김지미의 불륜이 내심 부러운 사람도 많았던 것 같네요.
그렇게 김지미와 최무룡은 재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됩니다. 딸 최영숙과 아들을 낳는데, 아들은 돌이 지날 무렵에 사망하죠.
(김지미 딸 최영숙의 아명이 밍크였음.) (김지미 자녀(자식)은 딸만 2명)
하지만 김지미 최무룡 두 사람은 7년뒤인 1969년 6월 10일 결국 이혼하게 됩니다.
이때 유명한 말을 남기죠.
최무룡: "사랑에 파탄이 가서가 아니라 지미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혼한다."
즉,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유명한 말이었죠.
두 사람의 이혼이유에는 경제적인 문제가 적지 않게 작용합니다.
당시 최무룡은 영화배우를 넘어서 영화 감독과 제작에도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피 어린 구월산’(65)으로 감독 데뷔할 때도 김지미가 사재를 털어서 지원했고, 그 이후 ‘한 많은 석이 엄마’(66) ‘나운규의 일생’(66) ‘제3지대’(68) 등 15편의 영화 제작에도 김지미가 적극 지원하죠. 하지만 거의 대부분 실패하게 됩니다.
최무룡에게 뛰어난 연기 재능은 있지만, 감독이나 제작자로서의 재능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최무룡은 약 3,000만원의 빚을 지고 부도를 냄)
그런데 김지미와 최무룡 사이에는 이런 경제적인 문제외에 좀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김지미: "남편이 영화를 제작한다고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행방을 수소문해보니, 아침 일찍 세종로 국제극장 다방에 커피 마시러 온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밍크(딸 최영숙의 아명)를 등에 업은 채 남편이 나타난다는 다방에 아침 일찍부터 진을 치고 기다렸죠."
김지미: "밤 새워 마작을 한 남편과 그 일행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다방에 들어왔어요. “밍크 아버지, 이러면 안돼요”라 외치며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남편의 뺨을 때렸어요."
최무룡: "이러면 몸 상해. 밍크 엄마, 진정하라고..."
최무룡이 김지미의 건강을 챙기면서 오히려 진정시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김지미는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도, 영화 제작을 그만두기를 바라는 것도, 노름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김지미: "난 사실 그 사람이 ‘이 여편네야. 새벽에 어딜 찾아와?’라고 소리치며 내 턱이 부서지도록 때려 주었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오히려 내 몸을 걱정하더군요. 그때 느꼈죠. ‘아, 이 사람은 내가 평생을 맡길 남자가 아니구나’라고 말이에요."
이처럼 김지미는 자신을 제압할 강인한 남자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녀 역시 기가 세기로 유명했죠. 아마 자신의 본성과 내면의 부조화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김지미는 최무룡과 헤어지게 되고, 이번에는 11살 연하의 나훈아와 만나게 됩니다. 당시에 연상연하 커플이 드물었기 때문에 이번 역시 당시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죠(1976년).
다만 김지미는 나훈아와는 결혼 관계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김지미: "나훈아가 노래를 잘해 우리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와서 노래를 몇번 해줬다. 형제지간처럼 지내다 군대 다녀오고, 일이 없어 더 친해졌다. 오빠가 내 자금으로 신탄진에서 운영하는 공장에 자주 내려갔는데, 그 사람이 여러 번 따라왔다. 남녀관계니까 (육체적) 문제가 좀 있긴 있었지. 그러니 아니라고 할 수가 있나. 그래서 또 공개하게 됐다."
김지미: "나훈아와의 관계는 '연하의 남자와의 긴 연애'였다."
사실 두 사람은 결혼하지 않고 76년부터 82년까지 동거를 했으니, 그 말이 맞겠네요.
하지만 김지미는 나훈아와의 오랜 동거에도 그와 결혼하지 않습니다.
또한 김지미와 나훈아의 관계는 연인보다는 스승과 제자에 더 가까웠습니다. 나훈아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김지미가 예절과 서예 등 다방면에 걸쳐서 가르쳤기 때문이죠.
나훈아 역시 훗날 회고합니다.
"(김지미는) 나를 남자로 만들어준 사람이다."
하지만 김지미는 자신이 가르치는 사람보다는 최무룡때 고백했던 것처럼, 자신을 꽉 잡아줄 수 있는 카리스마 있는 사람을 원했죠.
아마 자신이 원하는 것과 본성간의 차이를 제대로 알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나훈아 역시 김지미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것이 그의 기질상 자신이 보호하고 지키는 아내를 얻는 것은 아니었죠. 결국 사실혼 관계였던 김지미와는 이혼하자마자 14살 연하의 가수 후배 정수경과 4년간 동거를 하다가 1985년 결혼식을 올립니다(김지미 나훈아 이혼사유).
(예전글) 2014/02/10 - 나훈아 아내(부인)정수경 이혼사유와 재판결과, 속내
그리고 김지미는 네번째(?) 남편 의사 이종구를 만나게 됩니다(1991년). 이번에는 연예계 사람이 아니라 심장 전문의였죠(김지미 남편 직업).
(참고로 이종구는 캐나다에서 약 30년간 유명한 심장 전문의로 활동했고, 이후 89년에 한국으로 들어와서 개업하게 됩니다.)
하지만 11년간 결혼생활을 유지했지만, 결국 이혼하는데, 사실 결혼 생활 역시 그리 행복한 편이 아니었습니다.
김지미: "이박사(김지미가 전남편 이종구를 부르는 호칭)가 저희 어머니께 참 잘해줬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3년을 더 사셨는데. 아마도 어머니는 의사 사위를 두면 당신이 더 오래 사실 걸로 생각하셨던 모양이에요. 그가 제게 관심을 보이자 어머니가 저를 자꾸 떠미셨어요. 그 뒤로 7∼8개월 동안 이박사는 사람을 시켜서 아침저녁으로 러브레터를 하루 두장씩 꼭 보냈어요. 외국에 나가도 팩스로 편지를 보냈고요. 열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저도 넘어가고 말았죠."
김지미: "저도 노년에 답답한 게 있으면 옆사람 깨워서 ‘나 지금 가슴이 답답하다’고 털어놓거나 ‘기침이 나니까 물이라도 떠다달라’고 말할 수 있는 상대가 필요해서 (결혼)하는 걸로 생각했거든요. 애정은 둘째 치고, 편안한 상대가 옆에 있어야겠다는 생각으로요. 그런데 그렇지 않았어요."
김지미: "지지고 볶으면서 서로 사랑을 확인하는 게 건전한 가정인데 저는 항상 ‘네, 그러세요’ 하며 살았어요. ‘다녀오셨어요’ ‘다녀왔습니다’ ‘나가요’ ‘안녕히 다녀오세요’ 이랬죠. 부부라면 싸움을 하고도 금세 ‘이리 와봐’ 하면서 껴안기도 하고, 자기가 잘못해놓고도 큰소리 ‘뻥뻥’ 치고 해야 하는데 격식 차리다보니 거리감만 생기고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분이 ‘저 늦어요’라고 하면 저는 ‘네 알았어요’ 하며 살았다니까요. 저 몹시 피곤하게 살았어요."
김지미: "제가 20∼30대였다면 진작에 이혼했겠죠. 여섯명이나 되는 손자 손녀들도 있는데…. 그냥 ‘사진 액자 속에 둘이 들어앉아 있는 것처럼 살자’ 하고 살았어요. 그러다 뒤늦게 이혼을 한 거죠. 제가 지금까지 한 일에 대해서는 후회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하지만 요번만은 후회를 했죠. ‘왜 진작 이혼을 하지 않았나’ ‘왜 11년을 끌었나’ 하고요. 지금은 너무나 자유롭고 편안해요."
결혼 3년째부터 이상이 생겼던 두 사람이었지만, 11년동안 서로 참다가 결국 이혼하게 됩니다(김지미 남편들).
이런 전남편들과의 관계외에도 김지미는 한국 영화계에서 무시 못할 업적을 쌓습니다.
임권택 감독 영화 '하류인생'에 보면 건달들이 서로 여배우를 데려가겠다며 시비를 벌이자 여배우가 육두문자를 하면서 깡패들보다 더 난동 부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김지미가 실제 모델이었죠.
김지미: "60년대에는 내가 동시에 32편의 영화를 찍은 적도 있다. 한 달 30일을 밤과 낮으로 60개로 나누고, 밤낮을 다시 반으로 나눠, 한 달 스케줄을 120조각으로 만들었다. 하루에 4개 현장에서 촬영하는 거지. 60년대 한국 영화전성기가 펼쳐지면서 영화제작편수가 갑자기 늘어났는데, 배우는 적었다. 배우를 잡아오려고 깡패출신인 영화사 제작부장들이 현장에서 주먹다짐하는 일이 많았다. 힘 약하면 매 맞고 배우도 못 데려간다. 나는 주먹 센 사람들 안 따라갔다. 맞은 사람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20대부터 나의 기질, 성격이 그랬다."
김지미가 설립한 지미필름 창립작 '티켓'(86년, 감독 임권택)이 크게 성공하게 되는데, 그 배경이 자못 재미있네요.
김지미: "여배우들과 왕래는 없었지만, 현장 스태프와는 친했다. 우리 사무실에 와서들 놀았는데, 내가 영화를 한번 해보자고 했다. 임 감독, 송길한 작가, 구중모 촬영기사, 나 이렇게 무작정 강원도로 달려갔다. 여관으로 커피를 시켰더니, 다방 종업원이 '빨리 마셔라. 안 그러면 티켓을 끊으라'고 하더라. 이걸 파고들어가 나온 게 그 영화다."
또한 91년도의 대작 '명자 아끼꼬 쏘냐'(일제시대, 소련으로 끌려간 여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감독 이장호)'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대작중의 하나로 꼽히죠(제작비 18억원).
김지미: "우리나라가 미약하고 힘없었을 때, 돈 몇푼 벌려고 끌려가서 죽거나, 못 돌아오는 사람들 얘기 아닌가. 해야 했다. 이 영화가 사할린 교포 영주귀국의 계기가 된 것만으로도 난 뿌듯하다. 영화는 실패했지만, 기획은 후회하지 않는다. 어차피 난 내 돈으로 영화 다 찍었다. 한 번도 남의 돈 안 썼다. 지금 남의 돈(투자자)으로 영화 만든다고 몇백억씩, 신인들에게 안겨주는 거, 절대 잘하는 일이 아니다. 돈(자본)에 대한 결벽성(潔癖性)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김지미는 영화에 대한 확고부동한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시 한평생을 영화계에서 보낸 원로답게 자본에 대한 경계 심리가 강합니다. 오늘날 영화 제작자들이나 감독들이 새겨 들어야 할 말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김지미는 자기 인생에 대한 깨달음도 남깁니다.
김지미: "살아보니 그렇게 대단한 남자는 없더라. 나이 많은 사람과도, 어린 남자랑도 살아보니, 남자는 항상 부족하고 불안한 존재더라."
김지미: "나는 마누라가 필요하지 남편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김지미: "딸 가진 부모들은 사윗감으로 의사, 판사, 변호사 같은 전문 직을 가진 사람을 선호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유명하고, 파워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 가정을 행복하게 한다고 생각하면 절대 오산이다. 결혼은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났을 때 가장 편한 상대와 해야 한다는 걸 이 나이가 돼서야 깨달았다."
김지미: "내게 조카가 서른두명이 있는데 사람 외에 다른 것은 보지 말라고 말한다. 그 사람의 장래에 희망을 걸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다고. 완전하게 갖춰진 사람을 만나려고도 하지 말라고 한다. 완전하게 갖춰진 것을 얻으려면 그만큼 희생이 필요하니까."(김지미 근황, 김지미 최근모습)
김지미가 노년에 나름 깨달음을 얻은 것 같습니다.
돈이나 직업을 보고 결혼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행동은 없죠.
평생을 함께 할 상대니, '가장 편한 상대'가 최고라는 진리죠.
다만 김지미 역시 아직은 깨달음이 좀 부족한 것 같네요.
김지미는 자신의 본능대로 움직였지만, 사실 사람은 자기 하고 싶은대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일례로 당시 최무룡에게는 갓 태어난 아들(최민수)와 딸 세명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가정이 파괴되는 슬픔과 불안을 겪어야 했죠.
남녀가 서로 만나서 사랑을 하는 것은 좋은데, 그것이 다른 사람(상대방의 배우자나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된다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마저도 김지미는 아직 깨닫지 못한 것 같습니다.
본인의 재능과 능력이 차고 넘쳤기에 항상 당당했지만, 또한 결코 약자의 자리에는 서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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