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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용 이숙 러브스토리 및 인생 이야기

축구선수 이을용을 떠올리면 한마디로 잡초 인생이 생각납니다.

축구 선수로 성공하기 전에 나이트클럽 웨이터, 공사판 막노동, 공장에서도 일을 하기도 했었죠.


그런 불우한 환경때문이었기에, 이욜용 부인 이숙과의 러브스토리가 더욱더 특별한 것 같네요.


(이을용 부인 사진)


이을용은 1975년 9월 8일 강원도 삼척군 황지읍(현 태백시)에서 태어납니다(이을용 고향). 올해 40살이죠(이을용 나이).

(이을용 종교) 불교

(이을용 나이)

(이을용 학력 학벌) 태백 황지초등학교, 강릉중학교, 강릉상고(강릉제일고등학교), 단국대학교

(이을용 프로필 및 경력) 


이을용에 대해서 가장 인상에 남는 기록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일 것입니다.

당시 이을용은 미국전에서 페널티킥을 실축하기는 했지만, 굉장한 활약을 했었죠.

폴란드전과 미국전이라는 중요한 경기(16강 진출이 달린 경기)에서 2어시스트를 기록하고, 3,4위전인 터키전에서 직접 프리킥을 골로 연결합니다.

총 공격포인트 3개를 기록하는데, 이것은 월드컵 단일 대회에서의 한국 선수 최고의 기록입니다.


이을용은 고향인 강원도와 외모와 관련된 별명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을용: "제 별명이 많다는 것은 저도 잘 알아요. 이을용하면 대표적인 별명이 ‘을용타’이잖아요. 그 외에도 많았어요. ‘꽃보다 감자’ ‘강원도의 힘’ ‘인민군’ ‘귀순용사’ 등등. 제 외모에다 고향이 강원도라는 사실이 더해지면서 희화화시킨 별명들이 유독 많더라고요."

(이을용의 을용타 사건은 밑에서 추가 서술함)


이을용: "맘에 드는 별명은 단 하나도 없어요. 최근에는 ‘축구선수 이봉주’라나 뭐라나. 이봉주 선수한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래도 제가 그 분보다는 낫지 않나요?"



# 목차

* 이을용의 불우했던 과거

* 이을용의 방황과 양아버지

* 이을용 을용타 사건

* 대표팀 시절 고기 일화

* 이을용과 히딩크의 2002년 한일 월드컵

* 이을용 부인 이숙의 흔치않은 내조



* 이을용의 불우했던 과거


이을용은 굉장히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아버지 이두원(이름)은 사업을 몇번 실패하고 직장 생활(에이스 침대 회사)을 하다가, IMF시절 정리해고를 당합니다. 그후 버스 운전기사로 일하기도 하죠.


그런 불우한 가정 환경에서 이을용은 축구에 매달립니다.

자신의 적성이 공부보다 축구에 맞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을용은 어린 시절부터 한 성격(?)을 합니다.

특히 축구계는 더러운 인맥과 지연으로 유명한데, 이을용이 직접 불의의 일을 당한 뒤에는 이 성격때문에 축구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이을용: "축구 선수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어린 저에게도 태극마크를 다는 게 유일한 희망이었어요. 고등학교 시절 전국 고교 선발팀(청소년 국가대표팀)에 뽑혔는데, 합격자 명단이 발표된 지 하루 만에 제 이름이 다른 선수의 이름으로 바뀌었어요. 억울하고 분해서 축구를 그만뒀죠."


하지만 이을용의 축구 재능과 성실성을 아까워한 주변의 권유로 이을용은 어렵게 다시 축구를 시작합니다.



* 이을용의 방황과 양아버지


이을용: "그런데 최만희 감독님이 팀을 맡았던 울산대 체육학과에 입학했다가 일찌감치 선배랑 치고 받고 싸우고 짐을 싸들고 나왔어요. 결국 충북 제천으로 향했는데, 거기에 아는 친구가 있었죠. 돈을 벌 생각으로 ‘서울회관’이란 나이트클럽에서 일했습니다. 웨이터 생활을 한 건 아니었고요, 업소에서 이런저런 심부름하며 자잘한 업무를 처리했었죠."


이을용: "그러다 우연히 그 업소를 방문한 축구인의 눈에 띄어 울산대 최만희 감독한테 다시 붙들려갔어요. 만약 그때 그 나이트클럽에서 축구인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이을용도 없었을 거예요."


아마 스무살의 이을용은 현실이 많이 답답했을 것 같네요.

특히 자신의 자리였던 청소년 국가대표팀 자리를 어거지로 빼앗겼다는 기분에, 상실과 분노가 컸던 것 같습니다.

결국 이을용은 다시 울산대를 뛰쳐 나옵니다.



이을용: "울산대에 들어갔지만 정신 못 차리고 또다시 팀을 뛰쳐나왔었죠. 예전에 나이트클럽에서 일했던 건 정말 편한 직업이었죠. 울산대에서 나와 한국철도에 입단하기 전까지 약 8개월가량이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것 같아요. 돈을 아끼려고 역전 화장실에서 잠든 적도 있었고요. 친구랑 대구로 내려가 가스배관줄을 만드는 공장에 취직한 적도 있었고, 공사판에서 막노동 일은 기본이고요."


이렇게 이을용이 방황하고 있을 때, 그를 구한 축구 지도자가 있습니다.

이을용: "그때 제 손을 잡아준 분이 이현창 선생님(당시 한국철도 감독을 맡고 있었음)이십니다. 강릉상고 시절, 그분이 강릉으로 전지훈련차 오셨다가 제가 뛰는 걸 관심있게 지켜보셨다고 해요. 울산대에서 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절 찾아다니셨더라고요."


이을용: "결국 저는 이 감독님 덕분에 한국철도에 입단 후 실업팀 생활을 했고, 감독님이 당시 혼자 보일러도 들어오지 않는 차가운 숙소에서 생활하는 절 안쓰러워 한 나머지 김치며 이불, 전기장판 등을 챙겨다 주시기도 하셨어요."


이을용: "당시 월급을 매달 80만 원 정도 받았는데 그 돈을 저한테 주지 않으시고 따로 관리하신 다음 제가 상무갈 때 통장으로 건네주시더라고요. 통장에는 1000만 원이 훨씬 넘는 거액이 들어있었어요. 그 통장을 받아들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 분은 감독님이 아닌 아버지이셨어요."



이을용 같은 인재가 축구계의 난맥상과 어린 시절의 방황으로 축구를 그만둘 뻔했는데, 이현창 같은 지도자 덕분에 계속 축구를 할 수 있었네요.

그나마 이런 사람이 조금이나마 있기에, 축구계가 유지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 이을용 을용타 사건


참고로 이런 굴곡진 생활과 어린 시절의 울분을 간직한 이을용은 가끔 거친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2003년 을용타 사건이었죠.

당시 동아시아대회의 중국전에서 거친 플레이를 펼친 중국 공격수 리이의 뒤통수를 후려 갈겨서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입니다(결국 퇴장당함).


이을용 을용타 사건 사진


사실 스포츠선수가 경기장에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극히 나쁜 행동이지만, 이을용은 오히려 칭찬을 받습니다. 당시 중국 선수들의 반칙성 플레이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죠(이을용이 공을 동료에게 패스를 했는데, 중국의 리이가 뒤에서 이을용의 오른쪽 발목을 걷어참).


(참고로 중국 선수들의 반칙성 플레이는 악명 높습니다.

프랑스의 지브릴 시세는 2006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중국과 치룬 평가전에서 고의성 있는 태클로 발목이 꺾이는 중상을 입고 독일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합니다.

우리나라의 황선홍도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중국 골키퍼와의 충돌로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바람에 월드컵 본선에 나가지 못했죠.


사실 중국은 거친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1990년대부터 장신 선수들을 이용한 '킥 앤 러시'라는 단순하면서도 투박한 축구를 계속해왔기에, 기술이나 체력에서 다른 나라 선수들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죠.

그래도 스포츠 정신에 입각해서 거친 플레이를 넘어서 더티한 플레이를 해서는 안되죠.)



* 대표팀 시절 고기 일화


이후 이을용은 실업팀과 상무에서 활동하고, 1998년 국가대표팀에 처음 뽑힙니다(당시 허정무 감독이 이을용을 뽑음).


이을용: "1998년 겨울, 프로 1년차 때 처음으로 들어간 대표팀 생활을 잊지 못하겠어요. 제 룸메이트가 하석주 선배였는데, 대표팀 입소 후 가방을 끌고 방으로 들어가니까 하 선배가 ‘너 누구야?’하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인사를 드리니까 밥 먹으러 가자고 하시대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식당에 들어서니까 하 선배가 ‘야, 너 이리 와서 고기 구워!’ 딱 한 마디 하시더라고요."


이을용: "전 먹지도 못하고 하석주, 고정운 선배 앞에서 연신 고기를 구워드렸더니 하 선배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은 앞으로 고기 먹을 날이 많이 남았지만, 우린 얼마 안 남았다’며 같이 먹자는 얘기조차 안했어요. 그때 서동원이랑 전 야채만 먹고 왔었죠. 선배랑 잘 때는 숨도 제대로 못 쉬어요. 코를 골까봐 어찌나 걱정이 되든지…."


축구 선수들조차도 군대의 악습에 젖어 있네요.

이런 선후배가 룸메이트가 되는 관행은 히딩크 감독이 부임하면서 동기 혹은 비슷한 연배끼리 룸메이트가 되는 걸로 바꾸어 버립니다.


이을용: "안정환과 김남일은 둘 다 말이 없는 편인데, 같이 방을 쓰면서 마음을 털어놔 친해졌어요. 정환이랑은 지금도 가끔 술을 먹는데 1차에서 소주 7~8병은 거뜬히 마시죠."(이을용 안정환 김남일)

(이을용과 안정환의 어린 시절이 묘하게 닮았네요. 아마 그래서 서로 더 친하게 지내는 것 같기도 합니다.)



* 이을용과 히딩크의 2002년 한일 월드컵


이을용: "허정무 감독 시절 대표팀에 뽑혔다가 무릎을 크게 다쳐 6개월이나 쉬었죠. 이제 대표팀은 끝났구나 했는데, 히딩크 감독이 부임했고 테스트를 받아 다시 뽑혔죠. 당시 대표팀에 왼발잡이가 나 혼자였어요. 전술에 활용하기가 좋아 아직 몸상태가 안됐지만 히딩크 감독이 선택한 것 같아요."


이을용: "히딩크 감독은 수시로 내 화를 돋궜어요. 실수도 안했는데 큰 소리로 나무라고 심하게 대하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보니 일부러 그랬어요. 내가 숙소생활이나 운동장에서 얌전하다고 판단한거죠."


이을용: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히딩크 감독이 대표팀 통역에게 ‘을용이는 화가 나면 다부져지고 매를 먼저 맞아야 잘 하는 스타일’이라고 했대요. 내가 좀 그렇거든요. 그만큼 선수 파악이 대단했죠."


이을용: "히딩크 감독은 월드컵 전까지 잘 해도 게임에 잘 넣지 않았어요. 안정환이도 그랬고요. 경쟁심을 유발시키면서 속을 긁는거죠. 독기가 생기도록요. (이)운재 형에게 ‘게임에 나가고 싶으면 10㎏을 빼라’고 했는데 결국 그 말 듣고 주전이 됐죠."


히딩크의 용병술이 대단하네요.

역시 2002년 월드컵의 성과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을용: "당시 우리나라 축구 선수들의 문제점이 창의적이지 못한 플레이였어요. 그런데 히딩크 감독은 이를 역이용했죠. 그분은 한국선수는 가르치면 가르치는대로 한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개개인과 미팅을 통해 전술을 주입시켰죠. 피지컬을 키워 전원수비, 전원공격의 벌떼축구로 완성시켰죠. 단, 뛸 때와 안 뛸 때를 제대로 알려줬어요."


이때부터 한국 축구는 선진 축구 기술을 흡수하게 됩니다. 체력 훈련 프로그램이나 비디오 분석 등의 선진기술이 정착되기 시작했죠.


이을용: "하지만 그 이후 세계축구는 성장하는 데 우린 그 때 이후 정체된 느낌이 들어요. 훈련 프로그램은 비슷한데 선수들의 장·단점 파악이나 심리학적 리더십이 아쉬워요. 요즘 유럽 감독들이 잘 하는 게 뭐냐면 심리학입니다. 세뇰 귀네슈 감독도 마찬가지더라고요. 명장들의 공통점인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서도 선수들의 심리를 잘 파악해서, 능력의 120%를 끌어낼 수 있는 명장이 탄생했으면 하네요.



이렇게 이을용의 축구 인생은 다이나믹합니다.

한때 나이트클럽이나 공장에서 일한 적도 있었고, 실업팀의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다가 마침내 국가 대표가 되었죠. 국가 대표가 된 다음에는 팀을 위하여 결정적인 공헌을 합니다.


이을용: "태극마크를 달기 위해 엄청난 경쟁을 뚫어야 했다. 그걸 이겨내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바로 자신감이다. 비록 현재 실업팀에 있다고 해도 목표를 갖고 노력한다면 언젠가 대표팀 주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후배들에게도 자신감을 잃지 말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확실히 실업 선수가 국가대표팀에 발탁되기는 흔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직접 그런 신화를 일구어낸 이을용이기에 허튼 소리로 들리지 않네요.



* 이을용 부인 이숙의 흔치않은 내조


이을용 아내 사진


또한 이을용은 성공하기 전에 현재의 부인 이숙을 만나게 됩니다.

당시 이숙은 서울 방배동의 피아노 교습소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었죠(이을용 아내 이숙 직업).


1995년 초 이을용은 소속팀(한국철도) 선배의 소개로 이숙을 만나게 됩니다.

나이는 이숙이 이을용보다 3살 연상이죠(이을용 나이 차이).


당시 이을용은 상처를 많이 받은 상태였고 성격이 무뚝뚝했습니다.

그러다가 활달한 성격의 이숙을 보고 첫눈에 끌리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실업팀에 있으면서 장래가 불투명한 자신을 이숙이 좋아해줄지, 자신을 하지 못합니다.


결국 이을용은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숙을 당시 숙소인 한국철도 보선사무소로 초대합니다.

열악한 숙소를 본 이숙은 놀라고, 이을용은 자신의 결정을 후회합니다.


이을용 가족 사진


그런데 그 이후도 이숙의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이을용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이을용의 빨래를 대신해주며, 아버지가 운영하던 갈비집으로 데려가서 고기를 구워주기도 합니다.


이을용의 진심이 이숙에게 전해진 것 같은데, 이숙 역시 대단하네요.

장래가 불안정한 남자를 그렇게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하는 여자는 흔치 않죠.

보통 결혼한 부부여도 경제적인 문제로 이혼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을용 부부는 그러지 않을 것 같네요.


결국 이을용과 이숙은 1999년 11월 27일 결혼식을 올립니다(이을용 배우자 이숙).

그후 두 사람은 아들 2명과 딸 1명을 낳게 됩니다.

(이을용 자녀 자식)(이을용 가족 관계)(이을용 딸 이소을)


(왼쪽이 이을용 아들 이태석, 오른쪽은 김병지 아들 김산)


이을용 은퇴식


이을용의 축구 인생을 보면 좀 안타깝습니다.

보다 좋은 환경과 악습이 없는 축구계에서 성장했다면, 원래보다 더 좋은 선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고난과 역경을 뚫고 축구선수로 성공한 이을용의 의지와 노력이 그만큼 더 빛나는 것이기도 하고요.


또한 이을용이 무명 시절이었을 때부터 제대로 내조를 한 이숙 역시 대단한 것 같습니다. 평범한 헌신과 믿음이 아니었던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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