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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인 이야기/구인회

박정희 정권이 LG를 도운 이유

구인회는 여기에 굴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구인회는 1962년 박정희 정권의 공보부 장관 이원우와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참고로 이원우 장관은 구인회의 동생인 구평회와 LG임원 박승찬과 동기동창임. 그래서 평소에도 구인회를 친형처럼 대우함)


이때 이원우는 구인회에게 '국정 홍보'의 어려움을 토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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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하는 일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고 싶은데, 방법이 없습니다."


이 때 구인회는 '절묘한 수'를 제시합니다.

"정부의 일에 대한 홍보는 라디오 방송으로 하면 되지요."



이원우 공보부 장관: "하지만 우리나라에 라디오가 있는 집이 많이 없잖아요."


이에 구인회는 정부에 금성사가 만든 라디오 5천대를 기증하기로 제안했고, 이것이 박정희 정권에서 벌인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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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박정희 정권은 (금성사와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하여) 라디오 밀수품 단속에 적극 나서게 되었고,

이에 사람들은 국산 라디오 제품인 금성 라디오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후부터는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합니다.


이후 전자산업은 화학산업처럼 LG의 양대산맥중의 하나로 우뚝 서게 되었죠.


우리나라 최초의 선풍기 (1960년), 최초의 자동전화기 (1961년), 최초의 자동전화교환기(1964년), 우리나라 최초의 흑백TV (1966년), 최초의 에어컨 (1968년), 최초의 세탁기 (1969년) 등 금성사는 우리나라 전자 제품들의 거의 대부분을 '최초'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결국 사업 초창기에 어려움은 컸지만, 나중에는 그 선점효과를 톡톡히 누릴 수가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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