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사카모토 료마는 5남매의 막내로 자랐기에 울보에 겁쟁이였고, 12살때까지 오줌싸개였습니다.
료마를 실질적으로 키웠던 셋째 누나 오토메가 료마의 오줌싸개 버릇을 고치게 되었죠.
이렇게 무척 평범 (사실상 평균 이하)했던 료마는 14살때부터 무술 수련을 했고, 19살때 에도 (당시 막부 일본의 수도)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일본은 조선처럼 서당 등의 학문 교육기관이 없고, 지배층인 무사들은 도장에서 무술 수련을 하던 시절이었음)
사실 료마를 영웅시하는 일부 일본인들은 료마의 검술 실력이 굉장히 뛰어나다 라고 추앙을 하기도 하지만, 실질적인 료마의 검술 실력은 그다지 보잘 것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훗날 료마는 하급무사답게 칼을 차고 다니기도 했지만, 신분 보호를 위하여 권총을 가지고 다니기도 했죠. (사카모토 료마 직업은 하급 무사였지만, 일본의 정치가로 활동하게 됨)
사카모토 료마의 권총 사진
아무튼 료마는 검술 실력 향상에는 그다지 큰 흥미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에도 유학 시절에 오히려 존왕양이론자와의 만남을 자주 가졌는데, 20살 전후의 료마 역시 '양이론자'였던 것 같습니다.
(존왕양이 뜻 - 왕을 받들고 서양을 배척하자, 라는 주장.
우리나라의 척화 사상과 일맥 상통)
훗날, 료마는 개화파로 거듭나게 되는데, 그는 왜 처음의 자기 생각을 버리게 되었을까요?
사실 당시 일본은 굉장히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존왕파 (일왕을 받들자는 주장)와 막부파 (전통적인 지배체제인 막부에 충성을 계속하자)의 대립은 물론이고,
개화파와 양이파의 대립, 각 막부의 지역 감정 등이 서로 얽키고 설킨 상태였죠.
하지만 일본은 이를 하나로 통합하고, 결국 근대화에 성공하게 되었고, 반면에 당시 중앙집권제 국가였던 조선은 이에 실패하고 식민지의 길을 걷게 되었죠.
아무튼 에도 유학 시절 료마는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당시 미국의 페리 제독은 포함 외교로 일본의 문을 열라는 주장을 했고, 처음 본 증기선의 위력을 본 수많은 일본인들이 경악을 했죠.
당시 일본이 개항을 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양이파가 줄어들고 개화파가 크게 늘어난 것은 이렇게 서양의 신문물을 직접 본 메이지유신의 주역들 (대부분이 료마와 같은 하급 무사 출신들이었음)의 깨달음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반면에, 비슷한 시기의 조선은 어땠을까요? (약 십여년 뒤)
조선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으로 서양과 직접 전투를 벌이면서, 그들의 위력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집권 세력은 일본과는 정반대의 선택을 합니다.
개항 대신에 더욱더 철저한 쇄국 정책을 단행했고, 이것은 조선을 멸망으로, 민중에게는 고달픈 식민지 시대로 이끌었죠.
흥선대원군은 과연 서양 군사 문물의 놀라운 위력을 몰랐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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