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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이야기/사카모토 료마

사카모토 료마 아내의 재혼 이유

(이렇게 목숨을 잃을 위기에도, 료마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음)


당시 사카모토 료마 아내는 남편의 병구완에 신경썼을 뿐, 현대식 개념의 신혼여행을 즐길 여가는 없었던 것 같네요.


아무튼 결혼 생활을 했지만 사카모토 료마에게는 자녀(자식)은 없습니다. (사카모토 료마 배우자 와이프 나라사키 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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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계 후손은 단절되었고, 료마 형의 딸과 누나의 아들 등이 방계 후손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을 뿐이죠. (사카모토 료마 가족 관계)



참고로 젊은 나이에 료마가 암살된 후, 나라사키 료는 료마의 셋째 누나 오토메와 함께 지내기도 했지만 결국은 쫓겨나게 됩니다.

사카모토 료마 아내 사진


그리고 각지를 떠돌다가 여러 남자를 만났고, 노점상이었던 사람과 재혼을 하게 되지만, 결국엔 가난으로 고통을 받다가 생을 마감하게 되었죠.


(아마 전남편 사카모토 료마가 그렇게 일찍 생을 마감하지 않았다면, 그녀 역시 이토 히로부미의 부인처럼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행복한 말년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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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료마가 심혈을 기울이던 고베 해군 훈련소가 폐쇄가 되었고, 료마는 가메야마 조합 (일본 최초의 해운상사)을 꾸려 상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


여기에는 이와사키 야타로도 소속이 되어 있었는데, 바로 훗날 미쓰비시 그룹(일본 최대의 재벌 중 하나)의 창업주이죠.


그는 훗날 료마가 암살된 다음에 가메야마 조합의 지분을 바탕으로 미쓰비시 그룹을 만들게 되었죠.


또한, 일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사장 역시 사카모토 료마를 무척 존경했기에, 소프트뱅크의 기업마크를 가메야마 조합 것으로 그대로 따라합니다. (이전의 손정의 사장 시리즈 참조)


이처럼 료마가 일본 경제계에 미친 영향도 적지 않지만, 일본 근대화의 초석, 메이지 유신의 발판을 마련한 공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라고 할 수 있죠.



고베 해군 훈련소 폐쇄 이후,

료마는 상업 활동을 하면서 정치적인 움직임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당시 일본 최고의 번이라고 할 수 있는 사쓰마와 조슈의 화해를 물밑으로 시도하고 있었죠.


당시 사쓰마는 막부파였고, 조슈파는 존왕파였는데,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길만큼 사이가 나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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