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메이지유신때 크게 발전하게 된 초석이 되었죠.
하지만 료마는 일본 발전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게 됩니다.
대정봉환 한달 후에 여관에서 습격을 받고 죽었기 때문이죠.
료마 암살 배후에 대하여는, 막부파 (대정봉환에 대한 보복), 사쓰미 번 (대정봉환 이후 막부에 대하여 유화적으로 변한 료마를 제거하기 위하여) 등의 여러가지 설들이 분분하지만, 현재까지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사카모토 료마가 신선조에 의하여 암살당했다는 것 역시 믿을만한 증거가 없음)
아마 영원히 역사의 미스테리로 남을 것 같네요.
사카모토 료마 동상
아무튼 그 시대 일본에서는 이런 암살 사건이 그리 드물지 않았습니다. 당시 일본 정세가 굉장히 불안했고 막부파와 존왕파의 대립이 격했기 때문이죠.
료마 역시 그 전에도 습격을 받아 큰 부상을 받았음에도, 끝까지 자신의 길을 걸었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고 대의명분을 따랐다는 것이죠.
사실 이런 부분에서 보면, 당시 조선이 일본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개혁과 개방에 끝내 실패하게 되었고, 일본은 여러 악조건속에서 메이지유신을 성공시켰는데, 이런 일본의 저력에 대하여, 오늘날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카모토 료마의 제일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삿초동맹과 대정봉환에 기여한 부분이 불명확하고,
료마의 선중팔책 역시 당대 선구자들이 주창했던 여러가지 개혁방안들을 8개로 짜집기했다는 주장도 있죠.
그나마 료마란 이름이 당대에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지만, 오늘날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근대화 인물 1위'가 된 것은,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 덕분이라는 주장도 있죠.
실제로 료마의 삶은 굉장히 드라마틱한 요소가 강합니다.
일본의 격동기속에서 너무나 짧은 생애를 보냈고, 마지막 역시 '암살'이라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되었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카모토 료마의 업적은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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