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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김영하 작가 아내의 여자친구 평가/김영하가 남자를 싫어하는 이유

김영하 인생 이야기

소설가 김영하는 한국에 잘 알려진 작가입니다.

하지만 그의 젊을 때 일화나 남자를 싫어하는 이유는 잘 알려지지 않았죠.


또한, 최근에는 세계로 방랑을 떠나면서 작품 세계에 큰 변화를 보이게 됩니다.

과연 김영하 작가는 누군인지, 그리고 그의 변화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김영하 사진


소설가 김영하는 1968년 11월 11일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납니다(김영하 고향). 올해 47살이죠(김영하 나이).

(김영하 직업) 소설가

(김영하 학력 학벌) 신천중학교 졸업, 잠실 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학사,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석사

(김영하 프로필 및 경력) 1995년 단편 <거울에 대한 명상>을 계간 《리뷰》에 발표하면서 등단했고, 1996년 장편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로 제 1회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이후 장편소설 “퀴즈쇼”, “빛의 제국”, “검은 꽃”, “아랑은 왜”,  소설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오빠가 돌아왔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호출”등을 발표합니다.


특히 2004년 장편소설 '검은 꽃'으로 동인문학상을, 단편집 《오빠가 돌아왔다》로 이산문학상, 단편 <보물선>으로 황순원문학상을 받게 됩니다. 한 작가에게 상을 몰아주지 않는 한국 문단의 관례에 비추어 이례적인 사건이었고, 김영하의 이름을 한층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2004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전임강사가 되어 학생들을 지도했고, 2007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전업 작가의 길에 들어섭니다.


# 목차

* 어린 시절

* 김영하 결혼, 하지만 자녀는 없어

* 김영하 작품세계

* 김영하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력 1

* 김영하의 교과서 소동

* 김영하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력 2

* 김영하, 방랑의 시작

* 꿈꾸는 집필 환경

* 김영하의 잘못된 생각

* 김영하의 본심

* 김영하 뉴욕 타임즈에서 활동

* 김영하 제자 최고은 작가 아사

* 김영하의 변화



* 어린 시절


김영하 아버지가 군인이었기에, 어렸을 때는 여러 지방을 옮겨다니면서 성장하다가 1980년부터 서울에 정착하게 됩니다.

아마 이때의 기억이, 후일 그의 유목민적인 방랑의 시작이 아닐까 하네요.


젊은 시절 김영하는 반항아적 기질이 있었습니다.


김영하: "소설가가 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다. 대학원에 다닐 때 일반 회사에는 취직하기 싫어 귀를 뚫었다. 당시에는 귀를 뚫으면 취직이 안 됐으니까."


김영하: "신인 땐 예술적 자아가 어리고 미숙했죠. 그래서 귀걸이 하고 맨살에 조끼 입고 클럽 다녔나봐요. 지금은 멀쩡한 얼굴로 살아가게 됐어요. 오히려 예술적 자아들은 소설로 풀면 되는 거 같아요."


사실 귀걸이와 문신 등을 통하여 겉보기로 남들과 차별을 두는 것보다, 내면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개성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한데, 나이가 어릴 때는 그런 깊이 있는 생각을 하지 못하죠.



* 김영하 결혼, 하지만 자녀는 없어


김영하는 젊은 시절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녀를 가지지 않기로 결심하죠.


김영하: "저는 삼십대 초반에 이미 결정을 내렸어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요. 그러면 내 삶이라는 것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그냥 살아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냥 살아지는 것이라면, 그럼 세계는 뭐냐? 세계는 우리와는 전혀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이죠."


김영하: "저는 그냥 인간이라는 것은 우주의 한 점 먼지에 불과하다고 생각히요. 휴머니즘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죠. 인간이 무언가를 할 수 있고, 세계도 바꿀 수 있고, 그밖에 어떤 의미있는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는 반면, 저는 그 반대편에 있어요. 저는 인간들은 어리둥절한 채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다가 결국은 죽어 사라지는 존재라고 봐요."


결국 김영하는 인간을 이렇게 해석하고, 후손을 두지 않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김영하 자녀 자식)



물론 김영하 부인도 찬성을 하게 되죠.

(김영하 배우자 와이프)


김영하: "아내가 심리학과를 나왔는데 나보고 그러더라, 콤플렉스가 별로 없는 인간이라고. 나처럼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드물단다. 열등감이나 콤플렉스 같은 결핍이 있어야 뭐든 열심히 하는 법인데, 난 꼬인 데가 없다는 거다."



* 김영하 작품세계


김영하의 단편과 장편은 극명하게 서로 다릅니다.

이는 작품에 대한 김영하의 생각부터 다르기 때문이죠.


김영하: "저는 단편을 쓸 때와 장편을 쓸 때의 자세가 완전히 달라요. 단편을 쓸 때는 이런저런 걸 해보자는 마음으로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써요. 장편을 위한 연습이랄까. 장편은 인생이 걸린 문제잖아요."


김영하: "2~3년 길게는 5년씩 걸리잖아요. 그 기간 동안 그 인물들하고 살아야 되는데, 제가 경험해본 바에 의하면 장편을 하나 끝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요. 전 일기를 쓰기 때문에 알 수 있거든요."



* 김영하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력 1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영하는 바로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의 시나리오 작가입니다. (이 영화의 감독 이재한과의 공동 작업)


이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는 '청출어람'으로 꼽힙니다.

원래 원작이 2001년 일본에서 단막극으로 방영된 <pure soul:나를 잊어도>인데, 김영하와 이재한의 작업으로 영화를 만든 뒤 일본으로 다시 역수출을 하게 됩니다.


정우성과 손예진 주연의 영화도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판권이 팔린 뒤 일본에서 후카타교코 주연의 드라마로 리메이크되기도 했죠.

(후에 판권이 헐리우드에도 팔림)


김영하: "(내 머릿속의 지우개를) 처음에 쓸 생각이 없었는데, 초고를 읽고 나서 뭔가 오는 게 있었어요. 손예진이 자기한테 잘해주는 정우성을 보고 너무 고맙다고 옛날 남자 이름을 불러요. 치매는 단기기억을 잊는 병이니까 상대편에선 그걸 감당해야 하는 사랑인 거예요.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혹했죠."



김영하: "이재한 감독의 시나리오(초고)에서 가장 좋았던 건 정면승부 한다는 거였다. 정직한 멜로영화처럼 보였으니까. 개인적으로 한국 멜로영화들에 불만이 많았는데, 대개 전반부는 코미디이다가 후반부는 갑자기 멜로로 접어드는 식이다. 그런 변종멜로 보면서 처음부터 신파로 가면 안 되나, 정면돌파 못하나 싶었다."


이재한이 처음 초고를 작성한 뒤에 김영하에게 보내고, 후에 둘은 공동작업으로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영화를 찍게 됩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을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가 이렇게 완성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 같네요.



참고로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김영하의 작품중 동명의 소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김영하: "(두 작품이) 비슷한 면이 없진 않아요. 고등학생 나오고 남의 마음을 읽고 제목도 같고. 처음에는 모티브를 가져갔나 생각은 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뭐, 어쩔 수 없는 거죠."


김영하: "그 드라마를 제 소설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래서 제목이랑 표지를 ‘너목’들로 바꿀까 농담한 적도 있어요."


김영하가 약간 섭섭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네요.



* 김영하의 교과서 소동


2009년 김영하는 자신의 글을 교과서에서 빼달라고 소동을 벌입니다.


김영하: "내 글을 토막 내고 나도 모르는 ‘의도’를 학생들에게 객관식으로 묻는다니 말이 되나!"


교과서에 자신의 글이 실리면 인지도도 올라가고 자부심이 생길뿐만 아니라, 책 판매부수도 늘텐데, 김영하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네요.

하긴 학생들을 정형화된 기계로 만드는 현재의 교육에 자신의 글이 쓰인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김영하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력 2


김영하는 '검은 꽃', '빛의 제국' 등을 통하여 우리 사회에서 잊혀진 사람들을 재조명합니다. 검은 꽃은 1905년 전후의 멕시코 이민자들의 삶을 다룬 소설이었고, '빛의 제국'은 남파간첩(북한으로부터 잊혀진 간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외에도 김영하는 스스로 번역을 하기도 합니다.

2010년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했는데, 당시 간결한 문체 등으로 큰 호응을 얻었죠.


김영하: "사실 그 작품은 2003년부터 번역을 시작했어요. 이걸 혼자 번역하다가 중간에 관뒀어요. 그러다가 뉴욕에 가니까 제가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된 거죠. 이게 소설에 나오는 퀸즈보로 다리고, 플라자호텔이구나, 5번가는 이렇구나. 그때가 마침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을 기획할 때라서 론칭에 맞춰서 마무리를 지었죠."


김영하: "그런데 힘들어서 이젠 번역을 안 할 거예요. 내 소설은 이쯤 되면 됐다라는 걸 알 수 있는데 번역은 끝이 없어요. 확신이 안 서요. 책을 낸 지가 3년이 됐는데 쇄를 거듭할 때마다 고치고 끝이 없더라고요."


김영하 덕분에 위대한 개츠비를 쉽게 읽은 사람들도 많은데, 김영하가 앞으로 번역을 하지 않는다니, 좀 아쉽네요.




* 김영하, 방랑의 시작


김영하는 한국의 젊은 작가중 가장 인기가 많은 작가중의 한명입니다.

그런데 2008년 돌연 세계를 방랑하면서 글을 쓰겠다는 결심을 했고, 당시 언론사에서는 '신인류의 탄생'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그후에 정말 김영하는 안정적인 공무원 자리(한예총 교수 자리)를 관두고, 서울의 아파트를 팔고, 벤쿠버, 시칠리아, 뉴욕으로 떠나버립니다.


김영하: "마포에 있던 30평대 아파트를 판 돈이 아직 남아 있다. 한국의 30평대 아파트는 꽤 비싸잖나. 밴쿠버로 떠날 준비를 하며 집을 팔 때 사람들이 극구 반대하더라. 놔두면 오르는데 ‘아파트’를 왜 파느냐는 거다. 그런데 그때가 ‘상투’(꼭짓점)였던 것 같다."


확실히 2008년이 아파트값이 가장 크게 올랐던 때였습니다.



김영하: "한 가지 확실한 건 서울에서 어느 정도사는 수준이면 세계 어디에서도 잘살 수 있다는 거다. 작년(2009년) 5월부터 11월까지 뉴욕 브루클린에 살았는데 넉넉했다."


김영하: "서울에 5억짜리 아파트에 산다고 치자. 그 돈을 은행에 넣었을 때의 이자 소득을 생각하면 한 달에 약 200만 원의 월세를 내며 사는 거다. 대출이 끼어 있다면 그 비용은 더 늘어난다. 이 비용을 감안하면 어디에서라도 편하게 살 수 있다. 또 외국에는 보증금이 적지 않나. 기껏해야 한 달치 월급 정도니 기꺼이 살 수 있다."


김영하: "사실 내 처가 처음 뉴욕에 가서 월세로 약 2000달러를 내야 한다고 하니, 엄청 놀라더라. “매달 그 돈을 내다니 너무 비싼 거 아니냐. 그렇게까지 살아야 하냐?”고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계산을 하니까, 아내가 곧 설득당하더라."


* 꿈꾸는 집필 환경


확실히 외국은 월세가 비싸지만, 한국의 주거 비용은 이미 그 정도를 초월했죠.


김영하: "처음에 밴쿠버로 날아간 후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의 객원 연구원으로 있었다. 하지만 보수는 받지 않았다. 캐나다가 자국 노동 시장에 대한 보호가 워낙 강해서 보수를 받으려면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더라."


김영하: "대신 집필 공간 제공, 무제한 도서 대출 같은 편의는 충분히 제공받는다. 주거 시설도 알아봐주는데 공짜는 아니고 약간 할인을 해준다. 공짜로 집을 빌려주면 영원히 안 떠나거든! 내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외국에 그런 사례가 많다는 거다. 캐나다 같은 곳은 세입자의 권리가 워낙 강해 집에서 안 나가더라도 함부로 쫓아내지 못한다."


이후 김영하는 평소 꿈꾸는 집필 환경을 얻게 됩니다.



김영하: "벤쿠버나 뉴욕에 있을 때 매일 아침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이나 카페에 가서 글을 썼는데 그 시간이 참 행복했다. 점심은 대충 샌드위치로 간단히 해결하고 저녁에 돌아오는데, 그렇게 살면 마음이 충만해지는 느낌이다. 내가 오늘 어떤 문장을 썼고, 어디까지 이야기를 밀고 나갔고, 내 소설 속 인물들이 오늘 중요한 고비를 넘겼고…. 그런 생각을 하면 뿌듯한 거다."


김영하가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하는 것 같습니다.

김영하야 인쇄와 원고료를 받으니까 이런 생활이 가능하겠지만, 평범한 사람은 쉽게 하기 힘든 생활이죠.


그런데 경제력이 뒷받침된다고 하더라도, 김영하처럼 생활하려면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인간관계'가 소원해진다는 점이죠.

김영하 역시 기존의 인간관계를 대폭 정리하고 이런 생활을 선택하게 됩니다.



* 김영하의 잘못된 생각


김영하: "나는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앞으로 10년밖에 못 산다면 뭘 할까?” 앞으로 십년후에 죽는다고 가정하는 거다. 그러면 인생의 우선순위가 명쾌하게 정리된다. 우선 각종 경조사에 가지 않을 거다. 친구 애기 돌잔치? 절대 안 간다. 인터뷰도 안 할 거다. 누구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마음껏 하며 살 텐데 그런 곳에 갈 틈이 없다. 그리고 그 일이 내겐 소설 쓰기다. 10년이면 기껏해야 4~5편밖에 못쓸 텐데 다른 일을 할 여유가 없다."


김영하: "사실 나중에 조금 가난하게 살 마음의 준비, 외로울 준비(방랑하는 동안 인간관계가 정리될테니까)만 되어 있으면 누구나 행복하고 충만한 오늘을 살 수 있다. 뉴욕행을 결정했을 때 아내가 걱정을 하기에 “나중에 조금 적게 쓰면 돼” 하고 말했다. 실제로 나이가 들면 돈을 적게 쓰게 된다. 나이가 들면 만나는 사람도 줄고, 행동반경도 줄고, 뭐가 필요한지를 아니까 물욕도 준다."


확실히 김영하의 말이 맞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불필요한 경조사와 인간관계가 너무 많아서 '행복한 오늘'을 누리기 힘들죠.


다만 김영하의 말중에서 한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그것은 노년의 의료비입니다.

사실 나이가 들수록 (자녀들의 교육비, 김영하는 자녀가 없으므로 이 문제는 제외) 의료비가 증가하게 되는데, 김영하는 이 부분은 간과한 것 같네요.



* 김영하의 본심


사실 김영하는 젊은 시절부터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기 싫어했습니다.


김영하: "나는 남자들을 별로 안 좋아한다. 또한 정치, 축구, 도박을 싫어한다."


김영하: "축구가 굉장히 남성적인 서사다. 11명의 남자들 두팀을 이뤄 공방전을 벌이다가 결국 한쪽 이기고 한쪽은 지고. 난 여자들 옷 사는데 따라다니길 좋아한다. 아내가 옷 사러 갈 때 몇 시간씩 돌아다녀도 즐겁다. 아내는 그런 내가 여자친구(여친) 같단다."


김영하: "또 여자친구들은 내가 남자라는 걸 깜박할 때가 있다고들 한다. 난 남자가 많은 곳에 가면 불편하다. 여자들이 관계지향적인 데 반해 남자들은 지배를 원한다. 서열을 정하지 않으면 30분도 그냥 앉아 있지 못한다. 만난 지 30분 만에 선배라고 ‘영하야, 말 놔도 되지’, 이러는 거 너무 싫다."



확실히 남자들, 특히 한국 사회의 남자들은 서로가 서로를 '지배'하는 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만난지 30분만에 서로 나이와 고향, 학교 등을 물어서 형, 아우의 관계가 되죠.


김영하: "90년대 이후 최소한의 사람들과 최소한의 관계만 맺고 산다. 정치활동도 안 하고 아무것도 조직하지 않고 어디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문단에서도 신경숙, 은희경, 배수아 같은 여성작가들과 더 친하다.""


결국 세계를 방랑하면서 집필 활동을 하는 것이 김영하의 본성에 맞는 활동이었던 것 같네요.


김영하: "사실 아내는 부산에서 오래 살았고 서울에 올라와서도 한 곳에서10여 년 가까이 살았다. 그 때문인지 밴쿠버에 가기 전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석 달, 밴쿠버에서 1년, 또 뉴욕에서 6개월을 살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더라."


김영하: "시칠리아에서는 여행 가방 들고 계속 떠돌아다니고 밴쿠버에서는 할 게 없어 도처에 있는 숲에만 갔으니(웃음) 힘들었을 거다. 그런데 그 힘든 적응의 시간을 겪고 나니 처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는 어디를 간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제는 아내가 길어도 석 달이면 적응할수 있다”고까지 호언하더라."


김영하야 본인의 가치관이 있지만, 김영하 아내는 원래 그런 생각이 없었죠.

하지만 김영하와 이혼하지 않고 남편따라 방랑하는 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부인도 대단한 것 같네요.



* 김영하 뉴욕 타임즈에서 활동


이후 김영하는 인터내셔널 뉴욕타임즈의 고정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게 됩니다.

한국의 젊은 작가들중에서 가장 인지도 있는 작가중의 한명이기에, 뉴욕타임즈에서 뽑은 것 같네요.


당시 김영하는 한국 재벌의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냅니다.


김영하: "21세기인 지금, 아직도 한국에서는 재벌을 비롯한 기업들이 회사의 운명을 주술에 의존하고 있다."


김영하: "SK그룹 횡령 사건으로 최태원(53) SK그룹 회장과 김원홍 전 SK해운 고문이 1심과 2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많은 한국인들은 김 고문이 최 회장의 점쟁이 역할을 해왔다고 믿는다."


김영하: "사실 재벌과 점쟁이의 관계는 한국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정몽구 현대차 회장은 동생인 고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과 상속분쟁이 있었을 때 점쟁이를 찾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삼성그룹의 창업자인 고 이병철 전 회장은 풍수를 믿었고 사원 면접을 볼 때 관련 주술 전문가를 배석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김영하: "또한 재벌뿐만 아니라 보통의 한국사람들도 일생의 중대사를 놓고 점쟁이에 의존하는 일이 허다하다. 특히 상당수 한국인들은 눈, 코, 이마의 모양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는 관상의 힘을 믿고 있으며 이 때문에 자신의 얼굴 모양을 바꾸기 위한 성형수술이 성행하고 있다."


확실히 이 문제는 재벌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마찬가지 문제같네요.

또한 성형 수술 열풍이 '외모 지상주의'뿐만 아니라 이런 미신도 한 요인이라는 지적이 무척 날카로운 것 같습니다.



* 김영하 제자 최고은 작가 아사


2011년 무명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이 '아사'하게 되면서 한국이 발칵 뒤집힌 사건이 일어납니다.


최고은은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었다.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집 문을 두드려 달라'라는 충격적인 쪽지를 남긴채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이에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던 한국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죠.

재능있는 젊은 작가가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가는 동안 제대로된 도움의 손길을 주지 못했으니까요.


고 최고은 사진


그러던 중 최고은의 스승인 김영하가 격분하여 인터넷에 글을 올립니다(김영하 최고은).

(뉴욕, 벤쿠버 등지에서 생활하지만 여전히 블로그와 트위터를 사용하고 있었음)



김영하: "마지막으로 고은이에 대해 한 가지만 말하고 싶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고은이가 굶어죽었다고 당연히 믿고 있다는데 놀랐다. 아마도 최초로 보도된 선정적 기사 때문일 것이다. 신문에서 보도한 쪽지도 사실과는 조금 다르다."


김영하: "물론 그녀가 풍족하게 살아갔다는 것은 아니지만 의연하고 당당하게 자기 삶을 꾸려갔다고 들었다. 그녀의 직접 사인은 영양실조가 아니라 갑상선기능항진증과 그 합병증으로 인한 발작이라고 고은이의 마지막을 수습한 친구들에게 들었다."


김영하: "진실은 아직 누구도 모른다. 사람들은 편한대로 믿고 떠들어댄다. 갑상선 기능항진증은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지고 그러면서 몸은 바싹 말라가는 병이다. 불면증도 뒤따르고 이 불면증은 우울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진실을 외면한채 고은이를 아사로 몰고 가면서 가까웠던 사람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


비난이 폭주했기에, 김영하는 이 글을 마지막으로 블로그 절필을 하고 맙니다.



과연 '최고은 아사'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사실 김영하의 지적처럼, 최초 보도한 언론 매체(한겨레 신문)은 최고은 사망을 무척 '선정적'으로 보도했습니다.


아래는 최고은이 남겼던 쪽지의 원본입니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1층 방입니다. 

죄송해서 몇 번을 망설였는데...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없을까요...

번번이 정말 죄송합니다.

2월 중하순에는 밀린 돈들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전기세 꼭 정산해 드릴 수 있게 하겠습니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항상 도와주셔서 정말 면목없고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 1층 드림




어디에도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었다.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이라는 구절은 없었습니다.

진실만을 보도해야 하는 언론매체가 '소설'을 쓴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은이 사망 전에 '생활고'를 겪었던 사실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번 망설이다가 '쌀과 김치를 또다시' 요청했던 최고은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 안타까운 것 같네요.



그런데 김영하의 글중 한가지 유념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최고은 김영하).

'고은이를 아사로 몰고 가면서 가까웠던 사람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


아마 스승이었던 김영하 역시 제자 최고은의 죽음에 대한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아마 위의 변명성(?) 글을 남겼겠죠.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비난이 과연 '최고은의 지인'들을 겨냥해야 할까요?

아니면 우리의 미비한 사회 시스템을 성토하고, 이를 보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까요?



* 김영하의 변화


오랫 동안의 방랑 생활과 최고은의 죽음으로 김영하는 과거와 달라졌을까요?

확실히 최근 그의 작품을 보면, 기존의 김영하와는 완전히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김영하: "2012년 뉴욕에서 돌아와서 한국 사회를 보면서 여러 가지 변화들을 많이 느꼈다. 새 산문집 '보다(2014년 작품)는 그런 것들에 대해 쓴 것이다."


(보다 14~15페이지)

- 이제 가난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자기 시간을 헌납하면서 돈까지 낸다. 비싼 스마트폰 값과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부자들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제공한 시간과 돈을 거둬들인다. 어떻게? 애플과 삼성 같은 글로벌 IT기업의 주식을 사는 것이다.


(보다 45페이지)

- 미스 김 마인드로 무장하여 자격증 따고 자기계발에 매진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비정규직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그저 보고 웃을 뿐이고 웃다가 조금 눈물을 흘릴 뿐이고 그러다 아침이 되면 다시 전쟁터인 직장으로 간다.



김영하: "2년 동안 쭉 쓴 글들을 모았는데 키워드별로 글을 분류해 봤더니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글들이 많아 저도 깜짝 놀랐어요."


김영하: "2008년 해외로 떠나기 전에는 그런 글들을 많이 쓰지 않았어요. 확연하게 다녀와서 느낀 것은 사회적 불평등이라든가 경제적 불평등, 부와 빈의 문제 이런 것들이 첨예해 졌다고 할까요. 그런 것들이 가장 눈에 띄는 큰 변화였던 것 같아요.


김영하: "(한국인들의) 가족 관계라든가 사람 사이의 신뢰 관계 같은 것도 굉장히 척박해진 것 같아요. 특히 (한국인들의) 불안 수준이 굉장히 높아진 것 같아요."



김영하가 한국의 사람관계를 정리하고 멀리 떨어져서 한국 사회를 보게 되니, 오히려 비판적인 면이 증가한 것 같습니다.

사실 기성 작가, 특히 인기작가가 다시 사회 비판적으로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역시 기득권에 속해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김영하는 스스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인지, 다시 사회 비판적인 눈을 갖게 되었네요.

부디 김영하의 책이, 한국 사회를 위하여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되기를 바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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