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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인 이야기/이병철

이병철의 사업 성공 이유

미군정기에는 중국 대륙과의 무역 (공산화되기 이전의 중국 대륙), 그리고 6.25때는 일본과의 무역을 주를 이루었죠.


특히, 전쟁기간동안 이병철은 (포탄이 터진 다음의) 고철과 탄피를 녹인 놋쇠를 모아서 일본에 수출하고, 생필품을 일본으로부터 수입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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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공급이 가장 달리는 생필품을 하나하나 조사했는데 달리지 않는 물자란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6.25와 함께 국내 물자가 잿더미가 되었고, (남한에서의) 생산 능력이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이병철: "정부 역시 당장 수입을 촉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6.25 전쟁 당시) 부산에서의 사업 경쟁이란 자금 동원 능력과 기동력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이병철: "(전쟁 속에서) 경황없이 1년을 보내고 결산해 보니 3억 원의 밑천이 장부상으로나마 무려 17배 넘게 불어나 있었다."


이병철은 6.25전쟁 기간 동안 물자부족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결국 무역업보다는 제조업이 더 큰 이익을 창출한다는 판단하에, 1953년 제일제당을, 1954년에 제일모직을 설립합니다.


당시 제일제당 (설탕)과 제일모직 (의류)는 국민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생필품이었습니다.


설탕은 1953년까지 전량 수입에 의지했고, 모직 역시 마카오나 영국의 비싼 양복들을 수입해야 했죠.


결국 이병철의 제일제당은 설탕 1포에 100환 (당시 수입 설탕은 1포에 300환), 그리고 제일모직 양복은 1만 2천원 (당시 마카오 양복은 6만원)에 팔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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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후에는 밀가루와 식용유 등으로 확대)과 양복 (후에 다양한 모방 제품 생산) 등으로 수입 대체 효과를 얻을 수 있었고, 국민들 역시 싼 값에 좋은 국산품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병철 역시 굉장히 많은 돈을 벌었는데, 1954년 최고액 납세자로 선정이 되었고, 이때의 성공으로 '돈병철'이라고 불릴 정도로, 한국에서는 재벌의 대명사로 불리게 됩니다.

(원래 이전까지만 해도 무역업 등의 성공으로 부자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이때부터 한국 최고의 부자라는 이미지도 생기게 됨)


(후에 정주영이 건설업, 조선업, 자동차 등의 성공으로 삼성과 현대는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재력을 키우게 됨)

(정주영 역시 돈 많은 재벌의 상징이었지만, 이병철처럼 '돈병철'같은 별명으로는 불리지 않았음.

이것은 당시 이병철이 설탕과 의류 등으로 사람들에게 더 가까운 소비재로 돈을 벌었기 때문으로 보임)


그런데 6.25 전쟁 당시에 이병철의 삼성가의 전통(?)을 하나 세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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