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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인 이야기/이병철

이병철 부인 박두을 집안 재력

결국 이병철은 아내의 얼굴도 한번도 보지 못하고, 집안 어른들이 정해준 혼처와 결혼하게 됩니다.


원래 박두을은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으로, 대구 달성의 명문이자 지역 유지였습니다.

오히려 이병철 집안보다 아내 박두을 집안의 형편이 더 나았죠.


이병철 아들 이맹희: "당시 달성에 있었던 외가 (이맹희 어머니 박두을 집안) 쪽이 더 부농이었던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시집이라고 왔더니 집도 좁고 그렇게 가난해 보일수가 없었다."란 말을 자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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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아들 이맹희: "외가 쪽 지체가 워낙 높아서, (주변 어른들로부터) '한쪽으로 기우는 혼사'였다는 말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박두을에 대한 이병철의 첫인상은 어땠을까요?

이병철: "집사람은 순천 박씨 기동공의 4녀였다. (이병철의 장인은 박기동임) 결혼식을 올릴때 집사람의 얼굴을 처음으로 봤는데, ‘건강한 여성’이라는 것이었다."

삼성 이병철 부인 박두을 사진


그런데 이병철의 자서전을 보면, 재미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 (나는) 1929년에 결혼하였다.


사실 1926년에 결혼을 했는데, 1929년에 결혼했다는 것은, 이병철의 거짓말이었던 셈이죠.


이병철의 자서전 호암자전이 나왔던 1986년에는 조혼이라는 풍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였습니다.

따라서 이병철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조혼에 대하여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이런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닐까 하네요.


이런 점을 보면, 이병철과 이건희의 차이점을 알 수 있죠.

이병철은 지주의 아들이긴 했지만 일반인들의 상식을 알고 있었고, 아들 이건희나 손자 이재용은 재벌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그런 일반인들의 상식을 잘 모른다는 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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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을 올린 다음 이병철은 경성으로 복귀하여 계속 공부하다가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중동중학교 졸업, 일본 와세다 대학교 입학)


일본 유학 시절 이병철은 집안으로부터 매달 학비 200원을 받았는데, 당시 일본 중산층 가정의 한달 생활비가 50원이었을 정도로, 이병철은 풍족한 유학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건강 악화로 이병철은 자퇴를 하고 다시 한국 (당시는 조선)으로 귀국하게 됩니다.


(참고로 이병철의 일본인 부인은 구로다 미찌꼬 (혹은 구라다 미찌코)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설명)


그런데 일제시대 이병철은 친일파였을까요?

아니면 독립운동을 몰래 도운 재벌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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