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혼 남자 스타들의 이야기

양평이형(하세가와 요헤이)의 한국과 일본 비교 발언

양평이형 인생 이야기

양평이형의 인생이 매우 흥미롭고 신비롭네요.

일본인이 양평이형이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그리고 그가 왜 한국으로 왔는지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또한 그가 한국과 일본을 비교한 것과 그에 대한 장기하의 평가도 한번쯤 읽어볼만하네요.


양평이형 사진


하세가와 요헤이(일본어 長谷川陽平(장곡천양평) 별명 양평이형, 한국 이름 김양평)은 1971년 11월 4일 일본에서 태어납니다(양평이형 고향)(양평이형 국적 일본). 올해 44살이죠(양평이형 한국 나이)(일각에서 재일 교포2세라는 설이 있는데, 요헤이는 순수 일본인입니다).


(양평이형 가족관계) 아버지 류 라이타, 어머니 나츠 케이코

(양평이형 프로필 및 경력) 일본에서 록그룹으로 활동했고, 1995년 한국 방문을 시작으로 곱창전골, 황신혜밴드, 뜨거운 감자, 김창완밴드, 장기하와 얼굴들 등의 다수 밴드에서 활동합니다.

(참고로 하세가와 료헤이는 잘못된 이름임)


# 목차

* 양평이형 가족 내력

* 어린 시절 기타와의 인연

* 어린 시절 신기한 조짐

* 불우했던 어린 시절

* 양평이형 한국으로 온 이유

* 어려웠던 초창기 시절

* 양평이형 한국과 일본 비교 - 문화적인 충격

* 양평이형 수많은 밴드 탈퇴 이유

* 장기하의 양평이형에 대한 평가

* 양평이형 여자친구(양평이형 여친)

* 달만 보고도 살 수 있는 사람

* 양평이형 한국에 대한 생각



* 양평이형 가족 내력


참고로 원래 한국이름을 장양평으로 지으려고 했습니다.

양평이형: "처음에 한국와서 하세가와'가 한문으로 '장곡천'이라 '장양평'이 좋을까 했는데 김창완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나도 김인데, 형제 같은 사람이니 너도 김씨가 아닌가'라고요."


양평이형: "그래서 결국 김양평으로 만들었어요."


하지만 무도에 출연한 이후 무도 멤버들을 비롯하여 너도나도 '양평이형'이라고 부르는 바람에 이제는 '양평이형'이라는 별명이 굳어지게 되었네요.



잘 알려지다시피 양평이형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본의 유명배우인데, 그로 인해 양평이형은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양평이형 아버지 사진


양평이형 아버지 과거 젊었을 때 사진


장기하: "양평이형의 아버지 류 라이타는 한국의 이순재 선생님처럼 일본의 국민배우이다."


사실 류 라이타는 1966년에 데뷔를 하여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한 일본의 인기 배우입니다. TV CF에도 자주 출연했고, 특히 수사극으로도 유명했죠.

국내에도 영화 '20세기 소년' 시리즈와 '기묘한 이야기' 등으로 알려졌습니다.


또한 양평이형의 어머니 나츠 케이코(본명 하세가와 치카코) 역시 일본의 유명한 여배우였습니다. 다만 근래에는 양평이형의 아버지보다는 활동이 줄어들었죠.

(참고로 두 사람은 나중에 이혼을 하게 됩니다.)(양평이형 집안)


양평이형 어머니 과거 사진



* 어린 시절 기타와의 인연


양평이형: "어릴 적에 친한 애가 통기타를 샀어요. 그걸 보고 '어, 나도 해볼까' 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비틀즈를 들었거든요. 약간 막연한 그런 게 있었죠. 음악이라는 게 뭘까? 그런데 마침 친한 친구가 통기타를 산 거죠."



양평이형: "그런데 나한테 하는 말이 '사실 일렉기타를 사고 싶었는데 부모님도 있고 해서 통기타 먼저 샀어'였어요. 그걸 들은 저는 '일렉이 더 좋은가? 그럼 일렉부터 사지' 해서 일렉기타를 샀어요. 그러면서 치게 된 거죠."


양평이형: "저는 대놓고 '이렇게 노력했습니다'라고 말한 만한 게 없었어요. 대신 틈만 나면 만지고, TV 보면서 치고 그랬어요. 마음먹고 '오늘은 다섯 시간 연습한다' 이게 아니라 계속 만지고 있는 스타일이었죠."


양평이형: "연주하다가 놓고, 밥 먹고 음악 듣다가 거기에 맞춰 기타 치고. 이만큼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예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거의 없어요. 한국어도 그래요. 저는 '한국어 공부한다' 해서 공부하지는 않았어요. 좋아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공부해야 한다'라기보다는. 그래서 저는 공부 못 하잖아요."


확실히 양평이형에게 기타와 한국은 좋아하는 대상이었던 것 같네요.

그 덕분에 자연스럽게 둘 다 경지에 올랐으니까요.



* 어린 시절 신기한 조짐


그렇게 어릴 적부터 비틀즈와 기타를 좋아하던 소년에게 어느 날 매우 놀라운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양평이형: "제가 중학교 3학년인가 그랬을 거예요. 아예 한국과 연결이 안 되는 때였죠. 곱창전골이든 신중현 선생님이든 산울림이든 연결점이 아예 없었을 때였어요. 어머니께서 모 잡지의 편집장 분과 아는 사이였는데, 그분이 '굉장히 잘 맞추는 점술가가 있다. 점 받을 수 있는데 혹시 보러 지금 올래?'해서 친구들과 갔대요."


양평이형: "그 때 같이 가셨던 분이 류이치 사카모토 씨 매니저와 어머니 친구였던 그 잡지 기자의 여자친구분. 이렇게 셋이서 가셨어요. 어머님 차례가 왔는데 점술가가 '당신은 배우로서는 여기가 한계다' 이랬대요."


양평이형: "그런데 그 점쟁이가 갑자기 '당신 애 있지 않나요?'라고 물었대요. 그래서 '있다'라고 하니 아이 이름이랑 생년월일 써달라고 하더래요. 그래서 제 걸 써줬는데 그분이 깜짝 놀라며 '이 사람은 돼지해, 돼지날, 돼지시에 태어났다. 굉장히 운이 좋다. 강한 운을 가지고 있고, 서른 넘어서는 계속 뭔가가 잘 된다. 이 사람은 예술 같은 걸 시키는 게 좋겠다. 혹시 하고 있는 게 있느냐'라더래요."



양평이형: "그래서 '요즘 기타 사서 치고 있다"라고 하니 '기타를 치고 한국으로 갑니다'라고 했대요. 뜬금없이. 어머니는 '이 사람이 뭘 말하는 건가' 했대요. 그런데 계속 '한국 가면 서른 살부터 음악으로 일이 잘 되고, 계속 올라갑니다. 떨어지지 않고요. 환갑까지 계속 갈 거예요'라고 했대요.


그 점쟁이가 단순히 립서비스를 한 걸까요?

아니면 정말로 앞날을 본 것일까요?

궁금하네요.



* 불우했던 어린 시절


어쨌든 하세가와 요헤이는 어렸을 때 불운한 시절을 보냅니다.


요헤이: "어렸을 때 유명 배우 부부인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다. 또 우리 가족은 어딜 가든 알아보는 사람으로 인해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없었기에, 어린시절이 매우 불행했다. 그때 아버지와 같이 유명한 사람은 절대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요헤이: "부모님이 알려진 배우라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귀찮게 하는게 싫었다. 돌멩이 같은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데 요헤이가 한국에 와서 유명하게 되었으니, 역시 인생이란 아이러니한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요헤이는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요헤이: "공부를 싫어했어요. 못하는 건 어쩔 수 없죠. 공부 잘하는 건 공부를 좋아하는 거예요. 제 생각은 그래요. 안 그러면 두 번이나 대학교를 떨어졌겠어요?"

(양평이형 학력 학벌)



요헤이: "저는 스포트라이트를 맞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조금도 안 했어요. 음악은 고등학교 때만 하는 거고, 대학 가서는 취미로 할 수 있지만 그냥 저는 그렇게 살아가는 거다 했죠. 그런데 대학 두 번 떨어지고, 계속 밴드가 생각나니까 '이건 밴드 하라는 건가?' 했죠."



이렇게 요헤이가 재수를 할때 그의 아버지 류 라이타는 어린 요헤이에게 대학 등록금만큼의 거금을 주면서 마음껏 살아보라고 하기도 합니다. 아마 아들에 대한 실망으로 이런 행동을 한 것 같네요.


참고로 요헤이 집안은 부모 류 라이타와 나츠 케이코의 연기 활동으로 일본에서도 재력(재산)이 상당한 수준입니다.


장얼(장기하와 얼굴들) 멤버: "별장에 놀러가봤는데, 화장실이 거실만 했다. 집이 정말 으리으리하더라."



요헤이: "도쿄에 있는 집은 소박해요. 아버님은 스테이트 하우스가 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별장이 좀 큰 건 사실이에요. 그렇다고 여기저기 집이 많은 것도 아니에요. 물론 아주 부자는 아니어도 불편함 없이 살아온 건 맞아요. 하지만 재벌은 아니란 걸 말하고 싶네요."



* 양평이형 한국으로 온 이유


그러다가 요헤이는 1990년대 중반 도쿄의 레코드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됩니다. 

그때 그는 비틀즈때문에 영국에 갔다올 정도로 영국 음악에 푹 빠져 있을 때였죠.

(참고로 요헤이는 일본어와 한국어는 물론, 영어와 독일어까지 구사가 가능합니다. 양평이형 4개 국어)


요헤이: " 제가 20대 중반쯤에 일본 중고 레코드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아르바이트를 했었죠. 그때 점장이 단골손님한테 '진짜 특이한 알바생이 있다. 나이도 어린데 사이키델릭을 좋아하고, 굉장히 음악을 많이 안다. 너한테 맞을 거다' 이야기를 했는데, 그 손님이 나중에 '곱창전골' 리더가 되었어요."


이 단골손님이 바로 사토 유키에입니다.



요헤이: "그분(사토 유키에_과 친해져서 같이 공연도 보러 다니고 그랬는데, 그게 1994년일 거예요. 그때 제가 영국 런던에 가서 2~3주 정도 있었는데 정말 좋았어요. '아, 역시 음악 하려면 여기에 와야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때 했던 밴드도 다 그만두고 '런던에 갈 준비를 해야겠다, 런던에서 오래 있어야겠다' 마음먹고 있었어요."


이렇게 요헤이는 영국의 매력에 푹 빠져서 영국에 오래 머물 생각으로 준비를 하고 있었죠.


요헤이: "그 사이에 단골손님이었던 그분이 한국 갈비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한국에 다녀왔대요. 그러면서 '내가 한국에 다녀왔는데 정말 재밌더라' 이야기하시기에 '뭐가 재밌어요?' 물으니 '옛날 음악이 정말 장난이 아니다, 거기서 CD를 샀는데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왔으니까 한 번 들어봐라. 속았다고 생각하고 한 번만 들어봐라 이건 분명 하세가와가 좋아하는 거다'하면서 테이프를 줬어요."


확실히 우리의 '옛날 음악' 역시 장난이 아니었죠.

신중현과 엽전들, 산울림의 음악은 90년대 중반의 일본에서도 통할 정도로 세련되었죠.


요헤이: "그리고 테이프를 들었는데 충격적인 거예요. A면에 신중현과 엽전들, B면에 산울림 음악이 들어있었어요. 이런 음악이 옆 나라에 있었다는 걸 몰랐어요. 사실 그 전만 해도 저는 조용필 씨밖에 몰랐어요. 심지어 조용필 씨는 일본 TV에 나와 트로트 같은 음악을 부르셨거든요. 한국에서는 로큰롤 하시는데. 감을 못 잡겠는 거예요. 이런 록이 있었다는 걸 아예 생각도 못 했던 거죠."


결국 요헤이는 급격하게 방향을 틀어서 영국이 아닌 한국으로 향하게 됩니다.

요헤이: "처음에 음악을 하려고 한국으로 온 게 아니라 일단 LP판을 사려고 왔어요. 당시 인터넷도 안됐고 일본에서 한국 음반을 구할 수 있는 길도 없어서 무조건 한국에 가야하는 방법 밖에 없었거든요."


요헤이: "이토록 가깝고, 닮은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 한국인데 음악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고, 일본에서 음반을 구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어요. 이렇게 대단한 음악이 있는 나라를 그 동안 몰랐다는 것도 놀라웠고요. 그래서 더 빠지게 됐죠."


확실히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인터넷 전자 상거래가 없었고, 또한 일본에 한국이 많이 알려져지 않았던 때였죠. 요헤이가 받은 충격이 엄청났을 것 같네요.



* 어려웠던 초창기 시절


요헤이: "그 당시만해도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으니깐 정말 연구를 많이 했어요. 상상도 많이 했고요. 그러다가 제가 원하는 무엇인가를 얻었을 때의 그 기쁨과 희열은 말로 설명할 수 없었어요. 지금은 지금대로 정보가 많으니깐 편하고 빠른 점은 좋지만 그 때 만큼 스스로 공부를 한다거나 상상하는 노력은 덜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결국 요헤이는 '곱창전골'이라는 일본인 밴드로 한국에서 활동하게 되는데, 당시 굉장히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됩니다.



요헤이: "원래 일본에서도 LP판 수집이 취미였어요. 그런데 한국에 오면서 많이 팔았으니까요. 한국행 비행기 표를 사야 했거든요."


요헤이: "활동하려면 비자가 필요하고, 비자가 없으면 연주를 못하잖아요. 개런티도 받지 못하고. 연주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무료 공연으로 하고. 돈벌이가 안 되는 거죠."


요헤이: "저는 부모님의 도움이 아닌 자기 힘으로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모다두었던 LP판도 많이 팔았죠."


요헤이: "그때는 한국에 무비자로 2주만 있을 수 있었어요. 그러니 한국 와서 2주 있다가 다시 일본 가고, 다시 한국 와서 2주 있고. 그걸 한 달에 몇 번 반복했어요."



* 양평이형 한국과 일본 비교 - 문화적인 충격


그런데 사실 요헤이는 일본에서도 밴드 활동을 했습니다.


요헤이: "일본에서도 활동했었어요. 한 밴드는 대형 음반사에서 음반 내자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한국에 오기 전에 일본 인디에서 3개 밴드를 동시에 했어요. 그게 마침 다 해체되고, 그렇게 관두다 보니 밴드가 없어지는 거예요."


요헤이: " '이건 신의 계시다' 해서 한국에 오게 되고, 계속 왔다 갔다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된 거죠. 저는 '여기서 돈을 벌겠다', '활동 꼭 하겠다' 이런 야망이 있었던 게 아니라 사람을 알고, 여기에 계속 오다 보니까 이렇게 됐어요. 사람을 알아가는 방법 중에 하나가 음악을 하는 거였어요. 음악을 하게 되니까 사람을 많이 알게 되고, 한국 사회나 문화도 알게 되더라고요."


이렇게 요헤이는 한국인들을 알게 되면서 점차 한국에서 활동하는 기간이 길어집니다.

또한 요헤이가 한국에 온 이유는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요헤이가 세계 2위의 음악시장인 일본을 버리고 한국으로 오게 된 데에는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사정이 숨어 있죠.



요헤이: "일본이 세계 2위 시장이라는 이야기만 들으면 일본을 부러워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일본은 밴드가 클럽에서 공연할 때 돈을 내야 해요."


요헤이: "예를 들어 하루에 다섯 개 밴드가 나온다면 클럽에서 한 밴드당 20장 정도 티켓을 줘요. 이걸 팔라는 거죠. 만약 5장 밖에 못 팔았다면 나머지 15장은 밴드가 사야 해요."


요헤이: "즉, 클럽 주인은 배고픈 거 없어요. 일본은 클럽 시스템이 좋다고 하는데, 당연한 거죠. 클럽은 손해가 없으니까요. 그만큼 밴드에게 부담이 가는 거죠. 이름이 좀 있는 밴드는 당연히 '무대 나가도 된다' 하고, 밴드가 좀 팔린다 싶으면 그냥 나오라고 하는데 정말 밑바닥에서 하는 밴드들은 그 부분에서 힘든 거죠. 그걸 제가 경험했어요."


요헤이: "그래서 처음 한국 와 깜짝 놀란 게, 관객 몇 명 없는 공연을 했는데 공연장 사장이 저한테 이러는 거예요. '미안하다, 내가 홍보를 잘 못해서 관객이 별로 안 왔다'라고요."


요헤이는 공연장 사장의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랍니다.

문화적인 충격이었죠.



요헤이: "우리(공연팀)는 돈 안 내고, 이만큼 해 준게 고마운데. (공연장) 사장이 '미안하니 우리가 뒤풀이는 쏠게' 이러는데 인간적인 거예요. 장사가 아니라, 그 사람들은 음악이 좋아 클럽을 하는 거 아니에요? 안 그렇다면 돈을 더 많이 버는 방법이 있겠죠. 제가 그런 초창기 한국 인디신을 경험했고, 그걸 정말 감동적으로 봤어요."


요헤이: "일본에서는 자기 일을 하면서 계속 밴드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한국에서 돈을 받고 연주한다는 게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 꿈같은 일이에요. 일본에서는 이런 합주실이 있고, 음악으로 어느 정도 생활이 될 정도의 돈을 번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에요.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면 '와~ 너 진짜 대단하다'라고 할 거예요. 일하면서 자기 음악을 하는 게 일본에서는 당연한 거니까요."


이렇게 한국과 일본이 서로 다른 환경을 가지고 있네요.

확실히 메이저 공연팀에게는 시장이 큰 일본이 좋겠지만, 이름이 별로 없는 인디팀들에게는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는 한국이 더 매력적인 것 같습니다.


양평이형 써니 사진


* 양평이형 수많은 밴드 탈퇴 이유


그렇게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요헤이는 굉장히 많은 밴드들을 거칩니다.

곱창전골, 황신혜밴드, 뜨거운 감자, 김창완밴드, 장기하와 얼굴들, 델리스파이스, 산울림 등 15개 정도의 팀에서 객원멤버, 정규멤버, 프로듀서로 활동하게 되었죠.


요헤이: "(제가 그렇게 많은 팀들을 거친 것은 옮기겠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되어갔던 것 같아요. '뜨거운 감자' 같은 경우는 지금과는 음악이 전혀 달랐으니까요. 좀 더 야성적인 게 있었는데, 저는 그런 쪽을 좋아하지 않아서 아니다 싶은 것이 있었죠."


요헤이: "'황신혜밴드'는 프로젝트에 따라 멤버를 계속 바꿔가는 밴드였어요. 다른 프로젝트로 간다고 해서 저는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었죠."


요헤이: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살다 보니까 그렇게 되는 거, 이사 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요? 이 집이 살기 힘들어서 이사 간다는 게 아니라 살다 보면 이사 가게 되는 그런 경우. 그런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제가 불만이 있어서 나간 밴드는 하나도 없어요. 상황이 안 맞게 되는 경우가 많았지요. 싸워서 빠진 건 전혀 없어요. 아직도 그분들과 좋은 관계 가지고 잘 지내고 있어요."



참고로 무도 쓸친소 특집에 요헤이는 김C와 같이 출연했는데, 서로 대화를 하지 않았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해명합니다.


요헤이: "김C와 지금도 연락해요. 무도 끝나고 뒤풀이에서도 둘이 한참 마셨어요. 옛날이야기도 하고요. 저는 심지어 김C가 독일 베를린에 살 때도 놀러 가고, 김C 집에서 자고 그랬어요."


요헤이: "제가 김C와 방송 때 이야기를 안 했다는 건, 안 나왔을 뿐이에요. '여기까지 찍겠습니다. 잠깐 쉬겠습니다' 하고 쉴 때 대기실에 가면 계속 이야기했어요. 또 자리도 먼 데다가 김C는 준하 씨와 이야기해야 하고, 저는 하하와 멤버들이 있었잖아요. 방송에서 멤버들끼리는 서로 이야기했지만, 제가 다른 가수들과 이야기하지는 않았잖아요. 방송에서 안 나왔을 뿐이지 김C와는 계속 이야기했었어요."


결국 편집상의 문제였네요.

하긴 서로 다름팀이었던 요헤이와 김C가 팀원들을 놔두고 서로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가는 것도 우스웠을 것 같습니다.



* 장기하의 양평이형에 대한 평가


이렇게 요헤이는 여러 밴드를 거치고, 한국의 홍대 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위치를 점하게 됩니다.

그런 요헤이에 대하여 가수들의 평가는 어떨까요?



김창완: "불굴의 의지가 있는 아무도 꺽지 못하는, 그렇게 음악이 절실한 사람이다."


장기하: "하세가와 요헤이가 우리 밴드의 ‘음악적 중심’이다."


요헤이: "처음 기하 밴드를 보고 ‘록시 뮤직’이 떠올라 이것저것 추천해 줬더니, 기하가 자기들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내가 뭔가를 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후에 프로듀싱을 부탁받았고, 기타를 몇 곡 치게 되면서 활동을 같이하게 됐어요."


2집 발표 후 장기하가 직접 쓴 일곡일담을 보면, 요헤이가 앨범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장기하 일곡일담의 #8 '그 때 그 노래'에서

- 편곡 과정에서 공동 프로듀서 하세가와 요헤이 형의 제안들 중 70퍼센트 이상이 수용되었지만 반려된 것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이 노래에서였는데, 그것은 “추억에 대한 노래니까 낡은 의자의 삐걱거리는 소리를 살짝 집어넣자”는 의견이었다. 나의 반대로 꺾인 주장이었는데, 잘 한 일인지 아닌지는 들으시는 분들이 판단해 주시길.



* 양평이형 여자친구(양평이형 여친)


양평이형 이상형

요헤이의 이상형은 그의 어린 시절 아픔이 그대로 녹아 있는 것 같습니다.

요헤이: "여자친구가 있을 때도 매일 안 만나요. 서로 자기 시간을 가져야죠. <도라에몽>에서 ‘너의 것은 너의 것, 내 것은 내 것’이라는 대사가 나와요. 각자의 세계를 존중해줘야죠. ‘자이어니즘’이라고 해요. 각자의 세계를 존중해야 하는 것."


요헤이: "너무 마른 여자분은 제 스타일이 아니에요. 저는 진짜 조금 먹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긴장해서 그럴 수도 있죠. 예를 들어 처음 만날 때. 그런데 조금 먹고 '맛있어요' 그러면 '정말 맛있어요?' 이렇게 물어보고 싶은 분이 계실 때가 있어요. 제 이상형은 정말 잘 먹는 사람. 많이 먹는 게 아니라 맛있게 먹는 여자, 음식 먹을 줄 아는 여자 좋아해요."


요헤이: "식사를 정말 맛있게 먹는 여자. 너무 마르지 않은 여자. 저는 얼굴 안 따져요. 제 취향에 맞는다면 누군가가 '왜 그런 여자랑 사귀어?'라고 해도 저는 상관없어요."


즉, 다른 사람의 시선과는 상관없이(미모는 안보고), 요헤이의 기준에만 맞으면 될 것 같네요.



요헤이: "저는 작전을 세워주는 여자가 좋아요. '이렇게 해서 나한테 반하게 만들 거야' 이런 여자의 작전 있잖아요? 그런 작전에 걸리고 싶어요. 아니면 '오빠 나랑 사귀자. 알았지?' 이렇게 이야기해주는 여자가 좋아요."


확실히 요헤이는 적극적인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네요.

그런데 좀 이상한 사실이 있네요.


요헤이: "마지막 연애는 연애라고 하기에는 힘든 그런 게 있었어요. 1년 정도전인가?(2012년)"

아마 썸만 타다가 끝났는지도 모르겠네요.


요헤이: "한국 여자와 연애하면 굉장히 진한 사이가 되는 것 같아요. 친한 게 아니라 진한 사이요. 30분에 한 번씩 전화하고, 같은 옷을 입고 다녀야 하는.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한편으론 좋아요."


자이어니즘을 좋아하는 양평이형으로서는, '진한' 연애 스타일에는 잘 맞지 않을 것 같네요.


그런데 요헤이는 같은 일본인인 사유리와 전화 소개팅을 합니다.

(라디오스타 양평이형 사유리)

사유리: "요헤이에게 호감이 있었는데 하세가와가 나를 개무시했다."


사유리 스타일상 적극적이었을 것 같은데, 요헤이는 이런 4차원적인 여자는 별로 안 좋아할 것 같네요.



* 달만 보고도 살 수 있는 사람


요헤이에게는 3가지 특징적인 점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유명 미남 배우였기에 어렸을 때의 관심받는 삶이 불행했고, 또 그 자신은 별로 미남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죠.


요헤이: "부모님이 영화배우다 보니까 내 외모가 더 지적을 받는 것 같아요. 사실 그냥 보통인 것 같은데 노홍철이처럼 ‘(부모님은 영화배우인데)형은 왜 그러냐’고 하더군요."

외모를 지적하는 것이죠.

아마 노홍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또 현실에서도 지적하는 것 같습니다.


요헤이: "또한 이상하게 화면으로 보면 살찐 것처럼 나오는 것도 싫어요."


요헤이가 화면발이 잘 받지 않는 것 같네요.

어쨌든 미남이었던 아버지와의 비교는 어린 그를 불행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이제는 한국에서 유명해지게 되었죠.



요헤이: "무도에 나간 뒤 솔직히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어딜 가나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홍대 부근에는 나가기가 무서워요. 아버지께 “제가 한국 사이트 검색어 1위고 아버지가 2위예요”라고 전화했더니 “그런 시절도 한 번 있어봐야 인생답지 않니?”라고 하시더군요. 해가 뜨는 날도 있겠지만, 저는 해가 지면 달만 보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이에요."


확실히 요헤이는 달만 보고도 살 수 있는 사람같습니다.

사실 그는 인기에 크게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죠.


요헤이: "사실 (무도 출연 이후에도) 저는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요. 저는 기차를 타고 가는 것뿐인데, 잠깐 졸은 다음 일어나보니 완전 다른 경치가 보이는 그런 거 있잖아요? 기차에서 내리니까 사람들이 다른 이야기를 하고, 다른 말을 하고, 다른 인종이 있고, '저 사람 어디서 온 거지?'라고 나를 보는 듯한 느낌?"


요헤이: "저는 달라지지 않았어요. 앉아 있고, 눈 감고, 눈 떴는데 완전 다른 곳에 왔다는 느낌? 정도죠."



* 양평이형 한국에 대한 생각


요헤이: "이제 '일본으로 돌아가겠다'라는 것보다는 '한국에 언제까지 있게 될까?' 생각하게 되요. '한계'가 아니라 '한국이 나를 언제까지 받아줄 수 있을까?'라는 거죠."


요헤이: "저는 어차피 지금 일본에 가든, 10년 후에 가든, 5년 후에 가든 이제 한국과 인연은 못 끊어요. 말도 이렇게 하고, 한국 문화도 조금 알게 됐고, 심지어 일본보다 여기에 아는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인연을 끊겠어요."


요헤이: "독일에 가도, 뉴욕에 가도, 런던에 가도 한국 사람 보면 반갑고, 이야기하고 그러잖아요. 인연은 절대 못 끊어요. 저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저를 받아줄 수 있는 건지 그리고 제가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그거만 생각해요. 힘들어서 돌아가겠다거나 언제 돌아가겠다는 생각은 안 해요."



앞으로도 한국에서 계속 좋은 음악 활동을 했으면 좋겠네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