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남자배우(50대 이상) 결혼 생활

최일화 아내(부인)전일주-낙관보다 비관이 좋은 이유

최일화 전일주 러브스토리 및 인생 이야기

탤런트 최일화는 늦깍이 배우입니다.

오랫동안 연극판에서 무명배우로 일하다가 늦은 나이에 대중들에게 알려졌죠.

그런 최일화의 인생과 그에게 큰 힘이 되었던 전일주의 러브스토리가 흥미롭네요.


하지만 최일화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낙관적인 생각을 비관적인 생각으로 바꾸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최일화에게 '비관적인 생각'이 성공으로 이어졌을까요?


또한 최일화는 성공한 다음에도 자신만을 위해 재산을 사용하지 않네요.


최일화 사미자 사진(최일화가 대선배 사미자에게 애교를 부리는 모습)


연극배우 출신 연기자 최일화는 1959년 5월 9일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납니다(최일화 고향). 올해 56살이죠(최일화 나이).

(최일화 프로필 및 경력) 1983년 연극배우로 데뷔


오랫동안 무명배우로 있다가 2003년 동아연극상 연기상, 2003년 배우협회 연기상을 수상하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TV에는 2003년 야인시대(최일화 드라마 데뷔작), 2005년 패션70s 등을 비롯하여 산너머 남촌에는, 신데렐라 언니, 제빵왕 김탁구, 드림하이, 백년의 신부, 개과천선, 유혹 등의 드라마와 이재수의 난, 꽃피는 봄이 오면, 우아한 세계, 화차, 신세계, 신의 한수 등의 영화에 출연합니다.



최일화는 어린 시절부터 그리 녹록치 않은 삶을 삽니다.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동생드롸 함께 '아이스께끼'를 팔러 다니거나 고물을 주워서 가계에 보탬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죠.


최일화: "당시엔 보통 사람들의 삶이 다 그랬기에 힘들단 생각을 안 했어요. 중학교 때는 공부를 곧잘 했는데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방황을 시작했죠. 집안 사정도 어려운데 공부만 할 수는 없겠다는 자각이 생겼으니까요. 고교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인천지역의 혼성 고교 서클을 이끌며 연극 대본을 쓰고 작품의 주인공으로 나선 일이었습니다. 일찍부터 그렇게 나섰던 걸 보면 연극이 운명이었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최일화는 학창 시절부터 연극에 대한 관심이 높았지만, 군대를 제대한 다음에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졌기에, 스스로 가장이 되어야 했습니다.



최일화: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와 특별한 기술도 없기에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신발공장에서 신발에 깔창 까는 것을 돕고, 프레스 옆에서 기능공을 보조하고, 악기 회사도 다니고…."


그렇게 공장을 비롯한 생활 전선에서 일하던 최일화는 어느날 삶의 돌파구를 찾기 위하여 연극을 찾습니다(1984년 극단 마당세실에 입단).


최일화: "당시 오전 7시에 출근하는 영업사원으로도 근무했는데, 잠을 떨치려고 하루에 커피를 30잔씩 마셨어요. 그때 속을 다 버린 탓에 지금은 커피를 한 모금도 못 마십니다."


이렇게 연극과 직업 생활을 동시에 해야했던 최일화는 너무 피곤해서였을까요? 연극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주로 소품 담당 배우로 단역에서만 전전했죠.

그렇게 최일화는 마흔이 넘은 나이까지 벽에 포스터를 붙이고, 무대 설치를 위해서 뛰어다니면서 연극 바닥에 전전합니다.


최일화: "연극 인생에서 제 청춘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45살까지 대학로에서 포스터를 붙였어요. 배우보다는 소품 만들고 조명, 음향을 하고, 그런 일들을 해왔기 때문에 젊은 얼굴로 무대에 오른 적이 거의 없죠."



이런 생활이 최일화가 아내 전일주를 만나 가정을 이룬 다음에도 지속됩니다.

(최일화와 전일주에 대한 이야기는 밑에 서술)


최일화: "나이는 먹고, 아이는 자라고, 빚은 늘어나 주변 사람들이 ‘연극을 포기하라’고 권유하던 시절이었죠."


게다가 극단들은 하나같이 최일화를 거부합니다.

“배우감이 아니다” “나이가 많다” “배우로서의 개성이 없다”등은 나이 많은 최일화에게 큰 상처가 되었을 것 같네요.



이런 어려운 시기에 최일화는 낙관적인 생각을 버리고 비관적인 생각을 갖게 됩니다.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최일화는 늘 낙관적인 생각을 했기에, 어려운 상황에서도 연극을 포기하지 않을 수가 있었던 것이죠.


최일화: "80~90년대, 저는 대사가 한 마디밖에 없는 단역을 주로 맡았어요. 그땐 ‘왜 내게 비중이 없거나 80세가 넘는 노역만 들어올까’ 하고 고민했었죠. 생각해보니 문제는 제가 조그만 역할을 하면서 ‘내일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어요. ‘이 역할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역이다’ 생각하고 치열하게 연기해야 했는데…. 역할의 중요성을 떠나 저를 무대에 세워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란 것을 마흔이 넘어서야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오늘이 내 생의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며 연기에 매달렸어요."


또한 최일화는 뒤늦게 자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최일화: "극단 신시를 이끈 고 김상열 선생님이 앤터니 홉킨스 이야기를 늘 들려주셨어요. 저도 95년 결혼한 뒤 대사를 1천 번씩 반복하는 연습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말이 1천 번이지 하루를 꼬박 해도 끝나지 않을 만큼, 힘든 작업이었어요. ‘오늘 비가 오는구나’ 같은 대사를 톤과 억양을 달리하며 계속 중얼거리는 거죠. 나중엔 요령이 생겨서 밥 먹고, 신문 보고, 걸어다니면서 저도 모르게 대사를 흥얼거리게 됐습니다. 직접 해보니까 홉킨스가 왜 그렇게 연습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어요."


같은 대사를 천번은 반복해서 연습을 한 사람만이, 그 미묘한 차이점을 알 수 있겠죠.



이렇게 최일화는 사십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노력의 중요성을 알게 되고, 직접 실천하게 됩니다. 

인생에서 아무리 뒤늦게 깨닫더라도, 그 이후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 치열하게 노력하면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이전과 똑같은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죠.



최일화: "그때부터 이를 악물고 죽을 만큼 연습했어요. 꿈에서도 제가 연기하는 인물이 나타날 정도였죠. 그러자 어느 날은 박정자 선생님이 오셔서 제게 악수를 청하며 ‘우리나라에도 이런 배우가 있구나’ 하고 말을 건네셨습니다. 그때 비로소 ‘아,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최일화는 2003년 연극 추적, 서안화차로 주목을 받고 TV 드라마에도 진출하게 됩니다.


그런데 최일화의 이런 성공에는 본인의 노력도 중요했지만, 최일화 부인 전일주의 내조 역시 결코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최일화: "92년 극단 신시에 무대 소품으로 쓸 ‘곰 탈’을 빌려달라고 한 아가씨가 찾아왔어요. 당시 소품을 담당하던 제가 ‘당신이 누군지 모르는데 어떻게 빌려주느냐’고 반문했더니, 이 맹랑한 아가씨가 ‘저만 믿고 빌려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 모습에 왠지 믿음이 가더라고요."(당시 최일화는 34살, 전일주는 22살)


원래 전일주 역시 연극배우이고 나이는 최일화보다 12살 연하입니다(최일화 아내 전일주 직업 배우)(최일화 부인 전일주 나이 차이 띠동갑 커플).

그리고 처음에는 최일화가 먼저 다가갑니다.


최일화: "이후 그 아가씨가 공연을 할 때 제가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찾아갔죠. 그렇게 집사람과의 만남이 이어졌습니다. 3년을 손도 못 잡고 지냈어요. 연애 당시 손 잡기까지 3년 반이 걸렸어요. 그러다 바위에 오를 때 처음 아내 손을 잡았죠."


최일화: "대시, 그런 거 할 주제도 아니었고 용기도 없었어요. 혼자 그 사람을 막 좋아하다가도 ‘내가 미쳤지’ 하고 수차례 마음을 접으려 했죠. 하지만 집사람이 마음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최일화가 아내 전일주와 가족 사진은 공개하지 않음)


이렇게 최일화는 순정적인 성격과 자신의 처지때문에 전일주에게 무척 힘들게 다다갑니다.

최일화: "그렇게 연애를 하다가 용기를 내서 중풍에 걸린 아버지와 편찮으신 어머니 이야기를 고백하면서 “결혼해달라”고 프러포즈했어요. 그런데 그 순간 아내가 붙잡고 있던 제 손을 스르륵 놓고 말더군요."


최일화: "‘내 인생이 뭐 그렇지’ 하며 체념했었어요. 그런데 몇달만에 아내가  “결혼하겠다”저를 찾아왔어요. 그동안 진지하게 고민했던거죠."


최일화: "하지만 그 다음이 더 큰 문제였어요. 처가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거든요."


처음 최일화가 장인어른과 장모님에게 인사를 드리러 방문했을때, 문전박대를 당합니다. 장모의 모진 말이 대문 너머로 들렸을 정도죠.

"나잇살 먹었으면 곱게 살아야지."


하긴 전일주 부모님의 입장에서도 사위가 변변한 직업과 수입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나이 차이 역시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을 것 같네요.

그만큼 전일주의 결심이 돋보입니다.

보통은 부부가 경제적인 문제로 이혼을 하는데, 전일주는 배우자에게 경제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결혼 결심을 했네요.



최일화: "집안의 반대에 부딪히자 아내는 제게 ‘아기를 먼저 낳자’고 제안하며 집을 나왔어요. 집사람이 임신 3개월이 돼서 처가를 찾아갔더니, 장모님께서 결혼을 서두르셨어요. 하루는 장인·장모께서 상견례를 위해 저희 부모님이 사는 인천 집을 찾으셨는데, 아버지는 꼼짝없이 누워 계셨고 서울에서 파출부 일을 하시던 어머니는 퀭한 얼굴로 두 분을 맞이하셨죠. 인천 집은 공동 화장실을 쓰는 낡은 단칸방이었고요. 이 모습을 보며 장인·장모는 눈물을 참느라 차마 말을 잇지 못했고, 죄인일 수밖에 없는 아내는 집밖에 서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지금도 잊히질 않아요."


결국 1995년 최일화는 선배 박인환으로부터 15만원을 빌려서 결혼식을 올립니다(최일화 배우자 전일주).

그리고 두 아들을 낳습니다(큰 아들 이름은 최한결, 둘째 아들 이름은 최한길)(최일화 자녀 자식)(최일화 가족 관계).


이후 전일주는 최일화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전일주가 시부모 수발과 생계유지를 도맡고, 최일화가 연극에 전념하도록 만들었죠.



최일화: "저는 쌀이 없어서 서너 살 된 큰아들에게 보름 동안 라면만 먹인 못난 아버지였습니다. 아내와 아들에게 어찌나 미안하던지..."


전일주: "(남편에게) 당신은 천천히 기회가 오는 사람이니까 조바심내지 말아요."


확실히 전일주의 말처럼 최일화는 연기에서도 천천히 성공하고, 연애에서도 천천히 성공하는 남자였죠.

아무래도 대기만성형인 것 같습니다.


결국 결혼 이후 온갖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던 전일주는 디스크 판정을 받고 수술까지 합니다.

최일화: "집사람이 저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어요. 아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겁니다. 장인·장모님도 제 생명의 은인과 마찬가지죠. 집안이 어려울 때 저 모르게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패션 70s’가 끝난 뒤 제가 빚이 그렇게 많다는 것을 집사람이 가르쳐줘서 처음 알았어요. 얼마 전 돌아가신 동서도 제게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주셨고요."


최일화 주변에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많았기에 최일화가 오늘날 활짝 핀 것이 아닌가 합니다.


최일화: "무명으로라도 한 길만 걸었던 건 연극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고집을 부렸던 거죠. 운이 좋아서 동아연극상도 받고 TV도 하게 된 것이고요. 그야말로 하늘의 별을 딴 거죠. 재능이 없다는 걸 알면 빨리 접고 다른 일을 찾았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가정이 편했을 텐데… 제 고집만 부린 제 자신이 좀 밉죠. 같이 사는 사람도 불편하게 만들었으니까 제가 미운 남자죠."



어려운 세월을 오랫동안 이겨냈기 때문일까요?

최일화는 초심을 잃지 않습니다.

‘연인’의 김은숙 작가가 이렇게 비판(?)하기도 하죠.


김은숙: "드라마에서 가장 선배격인 최일화씨는 항상 30분 먼저 도착해 대본을 연습하는 등 촬영장에서 늘 모범을 보여준다. 연기에 도가 트신 분이 왜 그렇게 열심히 연습하는지..."



이제 최일화는 어느 정도 성공을 했습니다.

비록 젊은 시절이 지나갔기에 TV 드라마에서 주연을 맡기는 힘들지만, 비중있는 조연을 맡으면서 극에 빠져서는 안될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죠(최근 5년간 한국 TV와 영화 전반에서 조연급으로 최다출연 1위에 등극).

게다가 수입 역시 연극 배우 시절보다 월등히 많아집니다.


이제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풍족한 생활을 할 수도 있겠지만, 최일화는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고, 조금 엉뚱한 일(?)을 벌입니다.

바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극단을 만들었는데, 이 극단의 성격이 조금 이상하죠.


보통처럼 이름난 유명 연극 배우를 불러서 공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무명 배우들 위주의 창작극을 공연하는 것이죠.



최일화: "저희가 내년까지 100명을 무대에 세울 건데 여러 각도로 재미있게 만들 겁니다. 제작자가 나서지 않고도 연극을 한다는 걸 보여줘야죠. 작가도 살리고, 배우도 살리고, 연출도 살리자는 의미로 창작극 위주로 할 겁니다."


최일화: "제가 25년 동안 무명배우였어요. TV나 영화한지 6년 밖에 안됐죠. 연극에서 ‘삼류배우’, ‘서안화차’, ‘추적’ 말고는 대사도 별로 없었어요. 그 오랜 세월, 왜 내가 유명해지지 않을까 생각해봤는데 무대에 많이 못 서니까 연기 실력을 닦을 기회가 없고, 공간이 없으니까 연습할 곳도 없고, 그러다 생계수단도 막막해졌죠. 저는 그래서 저 같은 사람을 위해서 연습실을 만들고 공연을 올리는 게 꿈이었어요."


즉, 최일화는 돈을 벌기 위해서 극단을 만든 것이 아니라, 자기 같은 무명 배우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 극단을 만든 것이죠(추가적으로 무명 작가와 연출가들에게도 좋은 기회가 됨).

최일화가 이렇게 무명배우들에게 외칩니다.


최일화: "이 무대에 서십시오. 주인공으로 무대에 서서 이걸 발판으로 다른 연극이나 TV, 영화에서 컨택받지 못하면 연극하지 마십시오’


최일화: "죽기 살기로 하자는 얘기예요. 평생 살면서 주인공으로 무대에 서는 게 쉽지 않거든요. 이렇게 한 번 무대에 서고 나면 1, 2년은 그 힘으로 살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최일화가 팬들에게 사인을 할때 덧붙이는 말은 특이합니다.

최일화: "싸인 할 때 팬들에게 해주는 말은 ‘꼭 꿈을 이루세요’에요. 사실 저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죠. 저 역시 꼭 연극다운 연극을 해보고 싶은 꿈을 여전히 가지고 있어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