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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원 정영애 러브스토리 및 인생이야기

정치인이었던 최종원의 연예계로 돌아와서는 연이어 황제 발언을 내놓고 있습니다. 과연 그와 아내의 관계가 어떤지 궁금하네요. 가부장적으로 보이는 최종원를 정영애는 왜 함께 살까요?

 

그리고 최종원의 과거 활동이 어땠고, 그가 왜 정치를 했는지, 제대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최종원 아내 정영애 사진

 

탤런트 겸 영화배우, 전 국회의원 최종원은 1950년 1월 27일 강원도 태백에서 태어납니다(최종원 고향). 올해 65살이죠(최종원 나이).
(최종원 종교 기독교)
(최종원 학력 학벌) 태백중학교, 태백공업고등학교, 서울예술대학, 경운대학교
(최종원 프로필 및 경력) 1970년대의 연극 '거룩한 직업', '젊은 연극자', '늙은 쥐'등에 출연

 

이후 1995년 드라마 째즈로 브라운관에 데뷔했고, 세친구, 왕과 비, 귀여운 여인, 대왕 세종,  명가 등에 출연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그 이전인 1979년부터 비목, 마유미 등의 여러 작품에 출연했고, '투캅스', '마누라 죽이기' 등에서 코믹 캐릭터로 이름을 알립니다. 사실 드라마보다는 영화에 훨씬 많이 출연했죠.

 

그러다가 2010년 강원도 '태백시 영월군 평창군 정선군' 7.28 재보궐선거의 민주당 국회의원으로 공천되어서 당선됩니다(사실 2004년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후보로 이름을 올렸지만, 당선되지는 못함)

그리고 2012년 제 18대 총선 경선에서 전 정선군수 김원창에게 패배해서 공천탈락을 합니다(최종원 공천탈락).

 


2010년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면서 최종원은 이렇게 말합니다.
최종원: "내가 탄광촌 출신이기에, 폐광이 되고 난 후의 주민들의 아픔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어요. 폐광이 된 후, 먹고살 기반이 없어진 지역 주민들 상당수는 고향을 떠났고 남은 사람들은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죠."

 

최종원: "저는 폐광촌에 대한 상처와 아픔은 우리 세대에서 끝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2세들에게는 먹고살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줘야죠.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산수가 뛰어난 강원도에 문화예술을 접목시키는 것이었죠. 이를 통해 관광을 산업화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최종원의 이런 발언에 대한 진정성을 알기 위해서, 우선 그의 인생을 알 필요가 있겠네요.

 

 


최종원은 실제로 강원도 삼척군 장성읍 장성리의 어느 탄광촌에서 8남매의 막내로 출생합니다(후에 삼척군의 장성읍은 태백시로 통합됨)

최종원: "8가구가 이어져 길다랗게 뻗은 사택은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할 정도로 좁았다. 여기에 공동수도와 화장실은 1개뿐이었다. 그나마 영하 20~30도씩 떨어지는 겨울이 되면 수도가 얼어터지고 사람들은 아우성을 쳤다."

 

최종원: "집에서 국민학교까지는 5리정도 떨어져 있었다. 이 마을 저 마을 거쳐 가야했다. 가는 길에 심심찮게 곡소리가 들렸다. 실족사한 광부, 탄차에 깔린 사람, 갱도가 무너져내려 죽은 가장... 그나마 시체도 못찾은 유족들도 있었다. 워낙 곡소리를 많이 들어서일까, 이웃의 죽음에 그저 무덤덤했다."

 

최종원: "이런 환경에서 애들도 어려서부터 술을 배웠다. 그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탄가루로 뒤덮인 탄광촌을 벗어나는 것은 그곳 사람들의 희망이었다. 나도 어려서부터 새까만 마을을 떠나 서울에 한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최종원과 당시 탄광촌 사람들의 가난한 생활이 생생하게 그려지네요.

 


최종원: "형과 누나들은 모범생이었다. 큰형(종남)은 서울대 공대로 진학했고, 둘째형 종탁은 한양대 공대로 들어갔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어렵게 학교를 다녔다. 누나 종월은 몇년동안 간호사로 일하면서 돈을 모아서 서라벌 예대를 갔는데, 나만 문제아, 별종이었다."

 

최종원: "제 때에 월사금(수업료)를 내기란 힘들었고, 종종 학교에서 시험도 치르지 못하고 쫓겨나기도 했다."

 

최종원: "고등학교 2학년때 둘째형이 죽었다. 형이 대학을 졸업하고 석탄공사에 취직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마을에서도 촉망받는 젊은이였지만, 탄차를 잇는 쇠사슬이 끊기면서 갱도로 떨어졌고, 현장에서 즉사했다. 세상이 싫었고, 탄광촌이 신물이 났다."(최종원 둘째형 사망)

 

최종원: "그냥 얼굴 아는 이웃의 죽음과 둘째형의 죽음에 대한 충격은 차원이 달랐다. 그때부터 술만 마시다가 태백공고를 졸업한뒤, 그렇게 싫어했던 컴컴한 막장으로 내려가 탄을 캐는 광부가 되었다. 싫어도 해야 하는 일, 운명이었던가 보다."

 

최종원: "그런 광부생활이 1년만에 끝났다. 광업소에 젊은 여직원이 하나 있었는데, 그녀와 농담을 나누다가 그녀 오빠와 시비가 붙었다. 그게 싸움이 커져서 패싸움이 되었고, 주동자였던 나는 사표를 써야했다."

 

 

어린 최종원은 서울에 있는 누나집으로 가지만, 마땅히 할일이 없습니다. 결국 누나의 권유로 서울연극학교(서울예전의 전신)에 입학하게 되죠.
그리고 학교에서 동료들과 연극을 하다가, 군대에 가게 됩니다.

 

최종원: "한 학기를 남겨두고 입대했던 나는 74년 6월 제대와 함께 연극판으로 돌아왔다. 학생신분이었지만 그때부터 친구들과 함께 본격적인 프로 무대에 섰다. 한창 혈기왕성한 청년기때 조금이라도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한태숙씨 등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열심히 뛰었다. 무대는 주로 명동 사보이호텔 옆골목에 있는 산마루였다. 그때 올린 작품이 '거룩한 직업', '젊은 연극자', '늙은 쥐' 등, 젊은이답게 신선한 느낌을 줬다는 평을 받았다."

 

최종원: "기성극단에 캐스팅돼 연습을 할때면 통금이 끝나는 새벽4시까지 손발을 맞췄다. 통금이 해제되는 4시가 되면, 누구나 할 것없이 포스터를 붙이러 다녔다. 잠시 눈을 붙이고 난 뒤, 다시 길거리로 나와 표를 팔았다. 그래도 피곤할 줄 몰랐다. 그때 생긴 습관때문에 마흔이 넘어서도 내가 출연하는 연극의 포스터는 앞장서서 붙이고 다녔다. 그저 숙명처럼 연극을 했었다."

 

 

최종원은 가난했던 연극배우 생활때문에 잠시 직장에 다니기도 합니다.
최종원: "75년에 잠깐 월급쟁이 생활을 했다. 직장은 선배가 일하던 '한국 후지전자', 콘덴서 세일즈를맡았다. 오전에 일을 하더라도 오후에는 연극을 할 수 있어 세일즈가 좋을 것 같았다. 당시 나의 판매 실적은 나쁘지 않았지만, 불과 1년만에 때려치웠다."

 

최종원: "회사일 때문에 연극공연에 지각했기 때문이다. 다음날 바로 직장에 사표를 썼다. 직장과 연극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느꼈다. 어려서부터 가난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내게 가난은 자연스러웠고, 연극은 하고 싶었다."


그렇게 돈보다는 연극을 택한 최종원이지만, 아내를 만나게 되면서 더욱더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최종원: "75년 여름 후배가 아내를 소개해줬다. 당시 그녀는 법원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때 20살로 나와 7살 차이였다. 첫만남은 으레 그렇듯이 차 한잔으로 끝났다. 결혼에 대한 깊은 생각이 없었던 터라, 건성으로 몇번 만나고 말았다(헤어졌다).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쑥맥으로 통했다."

바로 최종원 아내 정영애입니다. 나이차이가 7살이었고, 법원에 다녔지만 역시 가난한 집안의 딸이었죠(정영애 직업).

(최종원 아내 정영애입니다. 다른 정치가 부인과 달리 정영애는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냥 김장 담기 같은 행사에만 참석해서 사진 찍기는 극구 거부하죠. 그래서 공식적인 사진이 이 사진 하나밖에 없네요.)

 

그리고 몇번의 의미없는 만남 후에 둘의 인연은 끊어졌지만, 정영애의 의지로 둘의 인연은 다시 연결됩니다.

최종원: "어느날 공연이 끝난 뒤 그녀가 불쑥 나타나 꽃다발을 내밀었다. 순진하고 착한 마음씨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리의 만남은 다시 이어졌다."

 

최종원 부인 정영애가 직접 찾아가지 않았다면, 둘의 인연이 이어지지 않았을 것 같네요.

최종원: "중학교때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었던 그녀는 나를 잘 따랐다. 76년 여름 동거에 들어갔다. 나는 다짜고짜 그녀의 팔을 붙들고 명륜동 집으로 끌고가 부모님께 인사를 시켰다. 그날 단칸방을 이불과 장롱을 쌓아 둘로 나눠 한켠에 그녀를 재웠다."

 

최종원: "그 이후로 그녀는 한 집식구가 됐다. 형님들이 모아준 50만원으로 명륜동 산꼭대기에 전셋방을 얻어 살림을 차렸다. 주위의 반대도 있었다. 우리집도 가난했지만, 그녀의 집안 형편도 좋지 않았다. 아내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세 처남들의 학비를 댔다."

 

최종원: "77년 첫딸 나래를 낳았다. 나래라는 이름은 당시 연극 연습생이었던 탤런트 길용우가 지어줬다. 한글이름을 붙여주고 싶어 후배들에게 작명을 부탁했었다. 다음날 딸 이름을 호적에 올렸는데, 그때만 해도 한글 이름이 많지 않아 동직원과 싸워야 했다."

(최종원 자녀 자식 최나래)

 

최종원 큰딸 최나래 사진

 

 


최나래는 오랫동안 연극배우로 활동했으며, 장화홍련으로 드라마에 데뷔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 같네요.

최종원: "79년 아버지 환갑을 앞두고 형제들이 모였다. 주위에선 식을 올리라고 아우성이었다. 4월 5일 환갑날, 친지들이 모두 모이는 이날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어머니의 금비녀를 녹여 아내의 반지를 만들었다."

 

최종원: "예복은 세일즈 사원으로 일할때 월부로 산 정장 한벌. 구두는 근처 구둣방에 가서 '결혼식을 한다'고 우겨 7천원짜리를 5천원에 샀다. 주례는 연극계 원로로 예술원 회원이시던 이진순 동국대 교수님이 맡았다."

 

최종원: "식을 올리는데 20분이나 늦게 온 주례 선생님은 "연습에 빠지지 마라. 아내의 내조는 남편이 연습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라며 연극 얘기를 늘어놓았다. 결혼을 이유로 3일 동안 연습에 빠지겠다고 양해를 구했다가, 엉뚱한 주례사를 들어야 했던 것이다. 예식장은 웃음바다가 됐다."(최종원 부인 정영애)

 

주례가 좀 웃기네요. 아마 신혼부부의 앞날보다는 연극배우로서의 장래가 더 걱정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최종원: "공연이 끝나자 선배 동료들이 신혼부부를 단칸방에서 재울 수 없다며 돈을 모았다. 십시일반으로 모아 준 쌈짓돈으로 북한산 북악 파크호텔로 갔다. 그곳이 신혼여행지였다. 친구들까지 불러 술을 한잔 걸친 뒤 첫날밤을 보내고 돌아왔다. 아내는 서운해했다. 하지만 그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선물이었다."

 

이렇게 어려운 시절에도, 이웃과 동료들은 따뜻한 정을 나누네요.
현재는 예전보다 물질적으로 더 나은 사회가 되었음에도, 오히려 이런 이웃간의 따뜻한 정은 사라진 것 같습니다.

 

 

최종원: "이렇게 시작한 우리 결혼생활은 늘 가난에 쪼들렸다. 당시에 연기자들은 출연료를 얼마나 달라는 소리도 꺼내지 못할 때였다. 그저 주면 받고 안주면 못받는 시기였다. 출연료를 쪼개서 아내에서 쌀과 연탄을 사주면, 아내는 그것으로 생활을 꾸려나가야 했다. 연탄배달비를 아끼기 위해 직접 연탄을 짊어지고 산동네에 오른 적도 많았다."

 

최종원: "결혼후 지금까지 13번이나 이사를 했다. 집을 키워나간 것도 아니다. 오르는 집세를 감당하지 못해서 짐을 싼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리어카에 짐을 싣고 명륜동과 혜화동 일대만 13번이나 돌았다. 이사를 할때마다 아내는 내게 투정을 부렸다."

 

최종원: "누더기같은 출연의상과 포스털르 버리라는 것이 아내의 요구였다. 사람 잘 방도 없는데, 쓸데없는 짐짝을 왜 들고다니냐고 불평했다. 그러나 땀과 눈물이 배있는 의상을 버릴 수는 없었다."

 

 


이렇게 최종원은 가난한 삶에 대해서 뼈가 시리도록 체감을 합니다.
그리고 그 이상의 사건마저도 겪게 되죠.

 

최종원: "78년도에 둘째딸 남미가 태어났다. 그런데 아내가 산후 조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둘째를 낳고 병이 들었다. 연극 공연후 귀가한 나는 방안에서 끙끙 앓고 있던 아내를 업고 혜화동 고대병원으로 뛰었다. 응급실로 간 아내는 고통을 참지못해 뒹굴었다. 의사는 즉시 수술을 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최종원에게 자녀는 이렇게 아들은 없고, 딸만 2명입니다)


최종원: "그러나 돈이 없었다. 수술보증금을 마련해오지 않으면 수술할 수 없다는 말에 분노가 솟구쳤다. 애원으로 안 통하자 나중에는 유리창을 깨부시며 "돈을 마련해올테니 몸에 이상이 생기면 큰일 날 줄 알라"고 으름장을 놓고 (병원을) 떠났다."

 

최종원: "한밤중에 돈을 빌릴 곳도 없었다. 단골 포장마차집을 돌며 보증금을 겨우 마련했다. 의사에게 사정을 말하고 약은 약국에서 사다 썼다. 그래도 1주일 치료비만 80만원이 나왔다."

 

 

돈이 없어서 배우자의 수술을 하지 못했던 최종원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정말 가난이 미치도록 한스러웠을 것 같네요.

 

최종원: "(결국 돈을 갚기 위하여) 전셋방을 빼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인근에 살고 있던 누님집에 얹혀 '더부살이'를 했다. 누나 집에서 얹혀 사는 아내의 고생은 말할 것도 없었다. 두 아이들과 조카들까지 떠맡아 키우다시피했다. 나도 아내의 고통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최종원: "사실 연극배우는 거의 백수나 마찬가지다. 결혼 후 신혼일때는 일이 없어서 더했다. 아내가 10년 동안 외판원 등을 하면서 생계를 책임졌다. 그 일이 지금까지도 미안하고 항상 고맙다."

 

이런 말과 달리 최종원은 방송에서 가끔씩 가부장적인 남편의 모습도 보입니다.
최종원: "나는 집안의 황제다. 그렇다고 내 아내가 황후는 아니다. 그저 무수리일 뿐이다. 아내가 내 명령에 따라 손톱을 깎아주고, 발까지 씻겨준다. 나는 가끔 아내 밥상을 차려준다는 남편들 얘기를 들으면 뒷골이 띵한 게 소름이 끼친다."

 

최종원에 예능에 나와서 가끔 이런 말을 하는데, 그들 부부의 진정한 사연을 알고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면 왜 아직도 이혼하지 않고 사는지, 마냥 의아해질 뿐이죠.

 


어쨌든 최종원은 이렇게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위에서 언급한 영화에서의 코믹 연기로 이름을 날리면서 돈을 벌게 됩니다.
그런데 그 전에 최종원은 연극계에 큰 선물을 합니다.


최종원: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연극계에는 배우협회조차 없었다. 예전의 연극은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꾸민 동호인극이었지만, 80년대들어 경기가 좋아지면서 연극판도 바뀌고 있었다. 연극배우도 전문 직업인이었다. 그러나 제작자들은 배우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며, 출연료에는 여전히 인색했다. 당시까지만해도 연극배우들에게는 월급이 없었다. 얼마 주겠다는 사람도 없었고, 얼마를 달라는 사람도 없었다."


최종원: "극단주는 왕이었고, 배우들은 그나마 배역을 주는 것만으로 고마워해야 했다. 일부 동료들은 "연출자나 극장주가 아버지나 다름없는데 어떻게..."라며 감히 그런 요구를 하지 못했다."

 

결국 1983년 최종원이 앞장서서 연기자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최종원: "연극판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벌이는 30대 중반의 연기자들이 주축이 돼 불합리한 구조를 개선해보자는 데 뜻을 모았다. 그때 펼친 운동이 계약서 쓰기였다. 출연 계약을 문서화하자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누구 하나 계약서를 쓰는 사람이 없었다."

 

최종원: "박봉서, 이정희, 이인철 씨등이 가세했다. 이렇게 해서 83년 서울 연기자 그룹이 탄생했다. 상한선도 하한선도 없었고 개런티는 간섭하지 않았다. 다만 계약서와 달리 출연료를 못받았을 때는 공동 대처키로 했다."

 


아주 거창한 운동도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계약서 쓰기'를 내세웠죠.
그런 다음에 그 계약서 내용대로 이행하는 것을 주장합니다. 오늘날처럼 몇억원의 거금을 달라는 것도, 최저 임금을 달라는 것도 아니었죠.
하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옵니다.

 

최종원: "내가 1년동안 초대 회장을 맡았다. 후배들이 찾아왔고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극단주와 싸웠다. 내가 앞장을 서면 선배들은 "왜 네 일도 아닌데 끼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이때 붙은 별명이 '깡패, '산적'이었다."

 

최종원: "극단주들과 연출자들이 나를 따돌렸다. 8개월동안 연극 출연 섭외가 한편도 들어오지 않았다. '괘씸죄'였다."

 

하지만 최종원과 당시 동료들이 끝까지 버텨서 연극계에 초보적인 '계약서 쓰기'가 정착되었고, 또 비록 적은 돈이지만 계약서대로 연극배우들이 출연료를 받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아마 최종원 등이 이때 나서지 않았다면, 그 후로도 연극배우들은 계약서조차 쓰지 못하는 사회적인 약자로 오랫동안 핍박을 받지 않았을까 하네요.

 


어쨌든 최종원은 이렇게 가난과 탄광촌의 실생활을 잘 압니다.
그래서 강원도에서 폐광 지역이 된 곳에 문화 산업을 일으키려고 나름 노력을 했죠. 불과 2년 남짓이기에, 그의 노력과 능력에 대해서는 제대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사실 강원도에 문화사업으로 경제 기반을 만들자는 그의 주장이 현실성이 있는지, 또 최종원에게 그걸 수행할 능력이 있는지와는 별개로 그의 순수한 마음과 진정성만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네요.


다만 그의 인생을 보고 한가지 바람이 생겼습니다.
바로 이런 최종원처럼 오늘날 가난한 집안의 아이도 자신의 노력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사회가 계속 되었으면 합니다. 그런데 최종원 시대와는 달리, 오늘날은 사회적인 계층의 고착화가 너무 심하게 나타나서 많이 안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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