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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은 과연 서양 군사 문물의 놀라운 위력을 몰랐을까요?


그 역시 바보가 아니고, 그 점을 충분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비롯한 지배층이 쇄국을 선택한 것은, '국가의 발전'보다는 '자신들의 지배 체제 공고화'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고, 개항을 통한 사회적인 변혁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죠.


이 점이 훗날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극단적으로 바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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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짧은 에도 유학을 마친 료마는 고향 도사 번으로 되돌아간 다음에 도사 근왕당 (도사 출신의 하급 무사 중심의 존왕파)에 가입을 하게 됩니다.

(당시 도사 번의 중진들은 막부파였음)


이후 료마는 탈번 (번의 허락없이 번을 떠남)해서 에도로 향하게 됩니다. (당시 탈번은 사형에 처해지는 중죄였는데, 료마를 비롯한 많은 메이지 지사들은 탈번을 하여 대의를 쫓음)


그리고 에도에서 료마는 가쓰 가이슈를 만나게 되고, 그의 제자가 됩니다.


원래 료마가 가쓰 가이슈를 암살하러 갔다가 그에게 감복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가쓰 가이슈가 말년에 남긴 기록이고, 료마의 성격 역시 '암살'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아마 당시 서양 지식에 해박했던 가쓰 가이슈를 만나기 위하여 료마가 일부러 그에게 찾아갔고, 결국 그의 제자가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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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가쓰 가이슈는 힘들게 고베 해군 훈련소를 만들었고, 그의 제자인 료마 역시 그런 스승을 옆에서 돕게 됩니다.


(원래 막부 정권은 각 번을 견제하기 위하여 해군(수군)의 양성을 엄격하게 제한했기에, 일본에는 해군이 없었음.

이 때문에 해군의 초석을 쌓은 가쓰 가이슈와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 해군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됨)


료마 역시 스승을 위하여 해군 훈련소의 설립 자금을 당시 유력자로부터 빌리는 등, 여러가지 중요한 일을 합니다.

결국 1863년 10월 료마는 고베 해군 훈련소의 책임자가 되는데, 당시 그의 나이 27살이었죠.


(당시 가쓰 가이슈는 일본 해군의 총 책임자가 되었음)


해군 훈련소의 책임자로써 료마는 신분이 아닌 능력 위주로 지휘관을 선발하게 하는 등의 여러가지 개혁 구상을 내놓지만, 결국 초창기에는 이런 개혁들이 좌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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