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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료마가 대단했다는 점은, 당시 시대상을 뛰어넘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사이고 다카모리나 기도 다카요시 등은 자신이 속한 막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습니다.


하지만 료마는 각 번이 중심이 되는 세상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대의를 위하여 움직였다는 점입니다


사실 료마도 본인의 출세를 위해서는 자신의 번인 도사 번을 위하여 움직였어야 마땅함에도, 보다 더 큰 것 (일본의 부국강병)을 위하여 움직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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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료마는 상인으로 활동하면서도, '돈'을 위하여 움직이지 않았다는 증거는 또 있습니다.

료마의 가메야마 조합 소속의 증기선이 기슈 번의 증기선과 충돌하여 침몰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으로 료마는 기슈 번으로부터 거액의 배상금을 받게 되었고, 이 돈을 바탕으로 다시 무역을 할 수도 있었지만, 료마는 '대정봉환 (일본의 쇼군이 일왕에게 통치권을 반납한다는 선언)'을 위하여 움직입니다.

사카모토 료마 흑백 사진

결국 료마는 도사 번의 번주에게 대정봉환의 계책을 진언했고, 막부와 일왕도 이를 받아들여서 평화적으로 정권이 이양되게 됩니다.


사실 기득권을 포기하고 그냥 넘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이 이렇게 평화적으로 수행된 이유는, 당시 막부 지배자들의 착각 (영국식 내각제 구성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그대로 유지될 것)과 더불어, 당시 하급 무사들의 반막부 분위기, 그리고 그것을 잘 알았던 료마의 절묘한 정세 판단력이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결국 평화적인 대정봉환이 수행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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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삿초동맹과 대정봉환외에,

사카모토 료마의 업적은 무엇이 있을까요?


이후, 료마는 교토로 가는 배에서 선중팔책을 입안하게 됩니다.

(대정봉환 역시 이중의 하나로, 그외에는 신분 타파 및 서양 문물 수입, 해군 육성 등 8가지 정책을 망라함)


그리고 료마의 암살 이후 메이지 정부는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국가 정책으로 삼게 됩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때 크게 발전하게 된 초석이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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