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항왜란 임진왜란때 조선 측에 항복한 일본군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런 항왜중에 여여문이나 김성인 등이 있는데, 사야카(한국명 김충선)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의 하나입니다.


사야카(일본명 혹은 별명인지도 불확실함, 전체 일본 이름이 전해내려오지 않음)는 굉장히 특이한 인물입니다(사야카 沙也可(さやか)).


그에 대하여 정확하게 기록된 사항은 '가토 가요마사의 좌선봉장(혹은 우선봉장이었다고도 함)'이었다는 점과 조총에 대하여 능숙했고 조총 부대를 이끌었다는 점, 그리고 한문에 대단히 능했다는 점입니다.

관련이 있는 글

서애 류성룡이 이순신을 모함했나?


(스폰서 링크)


이 3가지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아래의 글이 이해됩니다.

먼저 그동안 사야카에 대하여 잘못 알려진 사실 2가지를 먼저 정리합니다.



첫번째, 사야카(김충선)이 조선에 상륙하자마자 귀순했다?


이것은 거짓입니다.

사야카는 임진왜란 발발후 대략 1년 정도 지난 후(1593년 경)에 귀순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야카의 상륙직후 귀순은 사야카(김충선 장군) 후손들이 펴낸 행장록에 나오는데, 아마 조선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하고, 그들의 조상이 일찍부터 조선에 귀순하려 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과장된' 기록이었던 것 같습니다.

(후손들이 펴낸 행장록은 선조에 대한 과장된 사실들이 종종 언급되죠.)



사실 임진왜란 발발 후부터 일본군 이탈병들, 즉 항왜들이 종종 생겼습니다.

하지만 조선군들은 당시 복수심과 두려움 등으로 처음에는 투항병이나 포로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아마 사야카가 전쟁 초기에 투항했으면, 그 역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겠죠.


사야카 김충선 장군 초상화 사진


두번째, 왜군의 조총은 이순신이 개발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순신은 뛰어난 전략가이자 전술가이면서 동시에 '무기의 성능 개선'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원래 고려말부터 존재했던 거북선도 그에 의해서 새로 진수되었고, 대포(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등) 역시 함선에 장착되어서 큰 위력을 발휘했죠.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조총에 관심을 기울여서 조총 개발에 힘을 썼다는 여러 기록들이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야카가 조선에 투항한 뒤에 조총을 개발해서 조선군에게 보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야카(김충선)이 이순신 장군에게 보낸 서신에 "이미 조총을 개발하여 (조총병들을) 훈련하고 있다."라는 구절이 나오기도 하니까요(사야가 이순신 시선).



다음은 사야카(김충선 장군)의 업적들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조총 개발 및 보급에 큰 공을 세웁니다.


또한, 경상도의 의병과 힘을 합쳐 왜군과 전투를 벌입니다.

특히 사야카(김충선)는 곽재우와 연합 작전을 펼치기도 합니다.


모두 78회의 전투를 치렀으며, 이때의 공을 바탕으로 정3품 첨지중추부사로 승진하게 됩니다.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의령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울산성 전투에 참가하여 가토의 1군을 섬멸하기도 합니다(종2품 가선대부로 승진. 후에 정2품 자헌대부로 승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에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우기도 했고,

1636년 병자호란때 청나라 병사 500여명의 수급을 베기도 합니다.


이후 삼전도의 치욕을 전해듣고는 대성통곡하며 대구의 녹리(후에 우록면)으로 돌아갑니다.


한때 청나라와의 국경 수비를 하기도 했지만, 청나라의 항의(위에서 말한 500여명의 수급을 벤 일 등)로 직책에서 해임되고, 대구 녹리로 되돌아가 여생을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사야가는 왜 조선에 항복했던 것일까요(사야가 김충선 장군 투항 이유)?

위에서 언급한 임진왜란 발발 1년 후라면, 각지에서 의병과 조선군들의 반격이 시작되지만, 왜군이 여전히 승기를 잡고 있던 시기입니다.


단순히 상황이 불리해지니까, 일본을 떠나 조선에 붙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죠.


먼저 사이카가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보냈던 항복요청서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명분 없는 전쟁에 본의 아니게 선봉을 서게 되었다. 仁義의 나라(조선)를 도저히 공격할 수가 없었다. 이에 나의 소원은 조선의 예의와 문물과 의관, 풍속을 배우면서 성인의 나라인 조선의 백성으로 살고 싶다."(사야가 김충선 장군 투항 이유)


원래 고대부터 한반도는 일본에 문물을 전수해 주던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은 한반도의 나라들(삼국시대, 고려, 조선) 등에 대하여 문물이 앞선 선진국으로 인식하고 동경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한문에 능했던 사이카로서는 더욱 더 조선의 문물에 심취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조선의 선비의 나라, 문물을 전해준 나라였으니까요.(사야가 김충선 장군 투항 이유)



또한, 사야가는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이었습니다.

이름 없는 왜군 장수라면 결코 맡을 수가 없는 직책이었죠.


그런데 사야카에 대한 기록이 일본에 남아 있을까요?


현재까지 사야카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몇몇 인물들에 대하여 추정을 할 뿐이죠.



* 사야카(김충선 장군)의 정체(실체)


- 사이카 마고이치란 설


한때 이런 설이 있었지만, 나이 때문에 그런 가능성이 적고, 그 휘하의 철포 용병집단인 사이카슈의 일원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오카모토 에치고

임진왜란 당시의 유명한 왜장중의 한명인데, 만약 이 사람이라면 조선왕조실록 등에 사야카(김충선)에 대하여 서로 연계하여 기록했을 겁니다.


- 하라다 노부타네

카토키요마사의 가신중에 하라다 노부타네는 조총과 관련이 있는 보급 관련 직책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한 후 생사가 불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사야카가 조선에 항복한 이후에 큰 활약을 했기에, 만약 그의 정체를 알았다면 일본측에서 단순히 '생사불명'으로만 기록할리는 없을 것 같네요.



이처럼 사야카의 정체에 대한 설은 분분하나, 현재까지 정설 혹은 가능성이 높은 가설조차도 없습니다.

일본측의 기록이 워낙에 없기 때문이죠.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혹은 슬픈) 기록이 있습니다.


사야가 김충선에 대한 글이 2편으로 이어집니다.

항왜 김충선 장군 후손과 일본교과서 평가


(스폰서 링크)
. .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