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 김영삼의 예언과 박정희의 사망
* 부마항쟁의 시초
* 전두환의 등장
유라준의 특별한 이야기
이 과정에서 여공 김경숙이 시위 도중에 신민당사 4층에서 추락하여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죠.
박정희 정권은 1978년부터 김대중을 가택연금에 처해 놓았는데, YH여공 사건이 발생하자, 김영삼마저도 처리하기로 결정합니다.
결국 김영삼의 국회의원 자리가 제명되었는데,
오히려 김영삼은 "나를 제명하면 박정희는 죽는다."라고 예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김영삼의 예언대로 실제로 박정희가 사망하게 되었죠.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김영삼에 대한 의원직 제명으로 신민당 의원 66명과 민주통일당 의원 3명이 집단 사퇴서를 제출합니다.
김영삼 박정희 사진
* 부마항쟁의 시초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 계열) 국회의원의 선별수리'를 하려고 했고, 이에 부산 및 마산 사람들이 크게 분노하게 되었죠.
이것이 바로 '부마항쟁'의 시작점입니다.
이에 놀란 박정희는 차지철 등과 대책을 협의했는데, 부마항쟁에 대한 강경 진압을 하려고 합니다.
박정희: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내렸다가 결국 사형을 당했다. 하지만 대통령인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면, 누가 (나를) 사형시키겠느냐?"
차지철 (경호실장): "캄보디아에서 300만명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는 (부산과 마산 시민) 100~200만명쯤 희생시키는 것쯤 별 문제겠습니까?" (당시로부터 불과 3년전에 캄보디아에서 수백만명의 인명이 자국 군대로부터 학살당함)
이런 박정희와 차지철의 대화를 들은 김재규는,
'이 땅에 캄보디아와 같은 학살은 막자'라고 결심했고,
박정희와 차지철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기게 됩니다.
결국 박정희와 차지철은 사망하게 되었고, 유신체제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죠.
(김영삼 제명 사건이 부마항쟁의 전체 원인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당시 유신체제의 불만 누적, 부가가치세 도입에 의한 물가 폭등, 중화학 공업 실패 등의 여러가지 요인이 있는데, 그 와중에 김영삼의 제명과 부산 마산 국회의원 선별 수리 방침이 결국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음)
확실히 김영삼의 '예언'은 아주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네요.
이후 12.12사태를 거쳐서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1987년 사상 최초의 대통령 직선제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은 분열로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민주화 지지자들로부터 큰 비판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87년 대선을 아니라, 1980년 상황부터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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