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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총 4개의 글중 두번째 글...윤복희진


가수 윤복희 미니스커트의 진실이 무엇인지 짚어봅니다.


# 목차

* 윤복희 미국 진출 동기

* 윤복희 오빠 윤항기에 대한 실망감

* 윤복희 남편 유주용 직업


유라준의 특별한 이야기


윤복희에 대한 이야기가 1편에서 이어집니다. (1편 새창보기, 1/2)

윤복희 노래,윤복희 여러분 내가만약 외 12곡 듣기


* 윤복희 미국 진출 동기


윤복희: "아버지와 함께 ‘윤부길과 천재 소녀 윤복희’라는 간판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했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또다시 마약에 손을 댔고, 전 9살때 아버지로부터 도망쳐서 서울로 갔어요."


윤복희: "당시에 너무 힘들어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어요. 내가 죽어버리면 더 이상 엄마를 그리워할 필요도 없겠지, 라는 생각때문이었죠."


윤복희: "부엌칼을 제 배에 댔는데, 순간 아픔을 느꼈고, 죽는 과정이 무척 고통스러울 것이다, 라는 사실을 깨닫았어요. 그 순간부터 '(이렇게 아프니) 한번 열심히 살아보자'라고 결심했고,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게 됐어요."


결국 윤복희는 서울에서 혼자 돈을 벌면서 삽니다.

당시가 9살때부터 14살때까지였으니, 어린 나이에 정말 고생을 많이 했을 것 같네요.


윤복희: "그러다가 서울에서 우연히 아버지를 만나게 됐어요. 아버지는 저를 보시고는 오빠를 부탁한다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오빠는 절대 연예계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하라고요. 얼마뒤에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그것이 아버지를 뵌 마지막 모습이었죠."


윤복희: "좀 더 자란 다음에, 당신께서 얼마나 힘드셨으면 갓 열 살 넘은 딸에게 아들을 부탁하셨을까,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썽요."


당시 윤복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나가는 가수들이 모인다는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합니다. 이 덕분에 당시 세계적인 재즈 스타 루이 암스트롱과 함께 미국으로 진출할 기회를 얻게 되었죠.


당시 루이 암스트롱은 1963년에 내한 공연을 가졌는데, 한국에 오자마자 윤복희를 찾게 됩니다. 왜냐하면 한국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미군들이 하나같이 '한국에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를 아주 잘하는 꼬마 가수가 있다'라는 말을 전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윤복희의 노래실력을 들은 루이 암스트롱은 바로 윤복희와 같이 공연을 하기로 결정했고, 공연이 끝난 다음에는 미국 진출을 주선하게 됩니다.


바로 윤복희가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진출하게 된 배경이었죠.

(윤복희 젊은시절 사진, 윤복희 리즈 시절)

* 윤복희 오빠 윤항기에 대한 실망감


윤복희: "그때 제가 루이 암스트롱 모창을 했는데, 그게 괜찮게 보였나봐요. 루이 암스트롱이 미국에 가서 같이 활동하자고 제안했어요. 그렇게 해서 1963년부터 해외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죠."


윤복희: "미국의 CBS 등의 특집 프로그램들이나‘에드 설리번 쇼’등, 그리고 영국의 BBC 방송 등에 출연하게 되었어요."


윤복희: "제가 한국에서 활동하던 14살때 그 동안 모은 돈으로 집을 샀어요. 그래서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명의를 오빠 (윤항기) 이름으로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귀국하고 보니까, 오빠가 이미 집을 팔았더라고요."


윤복희: "결국 다시 집을 사줬어요. 아버지 다음으로 실망을 준 사람이 바로 오빠였어요. 왜 남자들은 하나같이 그런 모양인가 란 회의가 들었죠."


그런데 이때 윤복희에게 희망을 준 남자가 나타납니다.

바로 윤복희 남편 유주용이었죠.

가수 윤복희 남편 유주용 사진


* 윤복희 남편 유주용 직업


유주용은 독일계 한국인으로 경기고와 서울대를 졸업한 수재였고, 영어, 독일어, 불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한 국제적인 인물이었습니다(직업은 가수).


원래 두 사람은 셜리 맥클레인 환영 공연에서 가수와 사회자로 만나게 되었는데, 당시 윤복희 나이가 14살때로, 이때 윤복희는 첫사랑을 시작하게 되었죠.


윤복희: "저를 그렇게 아끼고 사랑해준 사람은 처음이었어요. 제가 세상 살면서 필요한 건 전부 그분(윤복희 남편 유주용)한테서 배웠어요."


윤복희: "처음 미국에 가게 됐을 때는 음식 먹는 법(식사 테이블 예절) 같은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그분이 가르쳐주셨어요.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저를 데리고 다니면서 유행에 맞는 옷도 골라주셨고요. 마음속으로 ‘꼭 저 사람에게 시집가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됐어요.


윤복희: "바쁜 미국 생활중에 67년에 겨우 일주일 휴가를 얻어서 귀국할 수 있었어요. 사람들은 제가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부터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고 기억하는데, 사실 공항에서는 털코트에 장화를 신고 있었어요."


윤복희: "귀국 며칠 후의 패션쇼에서 미니스커트를 입었어요. 그리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사진을 앨범 재킷 사진에 넣었고요."

이 덕분에 윤복희는 '대한문긱 미니스커트 1호'라는 애칭을 받게 되면서, 초미의 관심을 받게 됩니다.

(참고로 윤복희가 공항에서 미니스커트를 입고 귀국하다가 사람들로부터 달걀 세례를 받았는 루머는, 1996년 광고대행사 웰콤이 신세계 기업PR용으로 만든 CF 장면입니다.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한 기법이죠.


물론 이런 광고를 무작정 만든 것은 아니고, 윤복희가 우리나라에 미니스커트를 최초로 도입했다는 사실, 그리고 대중들이 그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조합하여 하나의 가짜 영상을 만든 것이죠)


윤복희에 대한 이야기가 3편으로 이어집니다. (3편 새창보기, 3/4)윤복희진

윤복희 남편 유주용 이혼사유,윤복희 낙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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