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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배우(50대 이상) 결혼 생활

변희봉 고향 나이, 변희봉 과거 제약회사 다니다가

(1/3) 총 3개의 글중 첫번째 글


영화배우 겸 탤런트 변희봉 고향, 변희봉 나이가 어떤지,

그리고 변희봉이 과거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궁금하네요.


# 목차

* 변희봉 어린 시절에

* 변희봉 성우 생활의 실패 이유

* 변희봉진의 무명 배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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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겸 영화배우 변희봉(본명 변인철)은 1942년 6월 8일 전라남도 장성에서 태어납니다(변희봉 고향 전남 장성). 올해 75살이죠(변희봉 나이).

(변희봉 학력 학벌) 조선대학교 법학과 중퇴

(변희봉 프로필 및 경력) 1963년 DBS 동아방송 성우 1기로 데뷔


이후 1965년 MBC 성우 공채 2기로 입사

드라마 수사반장, 안국동 아씨,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 제2공화국, 걸어서 하늘까지, 찬란한 여명, 허준, 제국의 아침, 솔약국집 아들들, 꽃할배 수사대, 가족을 지켜라, 마담 앙트완 등과 영화 여자 세상,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공공의 적2, 괴물, 이장과 군수, 나는 왕이로소이다, 미스터 고 등에 출연합니다.


영화배우 변희봉 사진

* 변희봉 어린 시절에


원래 변희봉은 법학과를 다녔지만, 사법 고시에는 뜻이 없었습니다.

변희봉: "아버지는 제가 법조인이 되기를 바라셨지만, 난 그럴 능력이 처음부터 없었어요. 그래서 친척이 운영하는 서울에 있는 제약회사에 취직을 했어요."


변희봉: "그 회사는 축농증 약, 여자들 예뻐지는 약, 감기약 등을 만드는 회사였는데, 난 그저 약통 씻어 오는 것 같은 심부름을 담당했죠."


변희봉: "매일 숙직실에 누워서 라디오 연속극을 듣는데, 무척 재미있더라고요. 그래서 시험이나 한번 봐보자 라는 마음으로 성우 시험을 봤는데, 덜커덕 합격하게 된 거예요."


변희봉: "성우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사실 성우란 직업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고 시작했어요. 게다가 전라도 사투리 때문에 고생이 많았습니다. (회사에 입사 후) 성우 교육을 받는 동안, 담당 선생님들이 ‘넌 절로 가, 넌 (사투리 때문에) 안되니까 저기 가 있어'라고 하는 거예요."

* 변희봉 성우 생활의 실패 이유


변희봉: "동기였던 송재호, 전운씨 등은 경상도 출신이었는데도 사투리를 전혀 쓰지 않았어요. 하지만 난 그게 고쳐지지가 않더라고요."



변희봉: "그 수모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사람을 아주 비참하게 만들었죠. 하지만 그냥 박차고 나가면 안되니까, 한번 버텨보자는 심정으로 참았어요."


변희봉: "게다가 당시 경제적으로도 많이 힘들었어요. 성우를 하면서 월급을 3000원인가 받았는데, 그 당시 하숙비가 2700원이었어요. 그래서 하숙집에서 셀수도 없이 쫓겨나기도 했고요."


변희봉: "아버지 역시 제가 성우 생활을 하는 것에 반대하셨어요. 왜 멀쩡하게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그쪽 계통(연예계) 일을 하느냐고 성화이셨죠. 제가 이쪽 일을 하지 못하도록 달래도 보고, 참~ 여러 가지 방법을 쓰셨어요. 하지만 미친 나는 그런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못했죠."


그러다가 변희봉은 연극배우로 데뷔하게 될 기회를 얻게 됩니다.

변희봉: "한 2~3년 정도 그렇게 성우 생활이 순탄치가 않았어요. 그러다가 차범석 선생님의 극단 산하에서 연극을 하는데, 어떤 사람이 펑크를 냈다고 저보고 하겠느냐, 라고 물어보셔서 연극을 시작했어요."


변희봉: "당시 전 별로 희망도 없는 인생이었어요. 뭔가를 하기는 해야겠는데, 매일 술이나 마시고 다니던 시절이었죠... 그때는 참으로 (인생에) 질서가 없었어요."


이후 변희봉은 연극배우로 연기의 기초를 배우게 되었고,

TV가 활성화 되면서 탤런트로 진출하게 됩니다.

* 변희봉의 무명 배우 시절


변희봉: "당시에는 악역만 도맡아 했어요. 3.1절때는 왜놈 앞잡이, 6·25 때는 인민군 조무래기, 그리고 8·15 때는 이완용의 인력거꾼으로 출연했어요."


변희봉: "연속극 수사반장에서는 사기꾼이나 사이비 교주, 잡범 등으로 주로 나왔어요. 하지만 지금 이런 역할을 잘 소화하면, 앞으로 언젠가는 나에게도 좋은 역할이 오겠지, 라는 희망을 품고 진짜 열심히 했어요."


이후 변희봉은 정말 TV 탤런트로 빛을 보게 됩니다.

1979년 안국동 아씨에서 점쟁이 연기로 인지도를 올렸고,

1983년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에서는 '유자광' 역할을 맡으면서 '(세상이 다) 이 손안에 있소이다'라는 유행어를 만들 정도로 큰 인기를 누리기도 했죠.


하지만 당시에는 젊고 잘생긴 미남 배우를 선호하던 시절이었는데,

변희봉은 이미 나이가 들고 부인까지 있었던 상황이었죠.


변희봉에 대한 이야기가 2편으로 이어집니다. (2편 새창보기, 2/3)

변희봉 부인(아내)와 딸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