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리스트 시나위 신대철 아버지 신중현은 살아있는 '한국 록의 대부'라고 불립니다.
신대철을 비롯한 그의 형제들이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가 무척 궁금하네요.
또한, 신대철은 신해철의 의료사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높입니다.
'신대철 신해철 관계'와 더불어, 신대철이 명예훼손 피소 위험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가 무엇인지 짚어볼 필요가 있네요.
(신대철 신해철)
신해철에 대한 포스팅 (새창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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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 신대철 아버지 신중현
* 신대철 어린 시절
* 신대철 임재범의 첫만남
* 신대철 임재범 데뷔 계기
* 신중현의 속마음
* 신대철 신해철 관계
유라준의 특별한 이야기
작곡가 겸 기타리스트 신대철(본명)은 1967년 2월 16일 서울에서 태어납니다(신대철 고향 서울). 올해 49살이죠(신대철 나이).
(신대철 혈액형) A형
(신대철 학력 학벌) 서울 고등학교 졸업, 서울예술전문대학 영화학과
(신대철 프로필 및 경력) 1985년 시나위 1집 앨범 [Heavy Metal Sinawe]로 데뷔
시나위의 리더로 현재 구성원은 신대철, 김정욱, 김바다, 윤지현이 있고,
시나위의 과거 보컬로 임재범, 김종서, 서태지(베이스) 등이 있습니다.
* 신대철 아버지 신중현
신대철을 언급할 때 그의 아버지인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을 빼놓고 언급할 수는 없습니다(신대철 신중현 부자지간).
1938년생인 신중현의 대표곡으로는 미인, 님은 먼곳에(김추자 노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김추자 노래) 등이 있습니다.
특히 '한번 보고 두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로 시작되는 미인은 경쾌한 리듬으로 오랫동안 큰 사랑을 받았던 노래죠.
(신대철 아버지 신중현 대표곡)
또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신중현 아내(부인)은 명정강(이름) 역시 뮤지션 출신입니다(신대철 어머니).
신중현이 결혼하기전에 명정강은 미8군에서 드럼을 치던 드러머였죠(신중현 결혼 1962).
이런 음악가 집안에 태어났던 신대철은 자연스럽게 어릴 때부터 음악을 접하게 됩니다.
신대철 사진
* 신대철 어린 시절
신대철: " 어릴 적에 아버지가 TV에 나와 노래하던 모습이 생생해요. 당시에 '미인'이 히트하던 때였는데, 아버지가 TV에 나와서 노래하면, 우리 아들 셋(신대철과 동생 신석철, 신윤철)은 그 앞에서 턱을 괴고 앉아 지켜봤어요. "와, 우리 아버지가 저렇게 대단한 분이구나" 어린 마음에도 아주 우쭐했었죠."
신대철: "초등학생 때 기타를 처음 만졌어요. 아버지에게 기타 주법과 작곡법, 편곡법 등을 배웠고, 나중에 동생(신윤철)에게 가르쳐줬어요."
신윤철: "저도 초등학교 5학년 때 형(신대철)을 졸라 기타를 배웠어요. 당시 형이 기타를 치면 그 모습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더라구요."
신대철: "(처음에) 아버지에게 기타를 배웠는데, 약 두달 정도 배웠어요. 그 두 달 동안 (아버지로부터) 기타 레슨을 받았는데, 처음 배웠던 기타 교본이 (초급자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것였어요."
신대철 가족 사진
신대철: "아버지가 좀 집요하게 가르치시는 그런 성향이 좀 있으셨어요. 가르치실 때 보면은 좀 전에 가르쳐 주셨던 걸 또 하게 하셨거든요, 계속 반복적으로... 내가 속으로 '아, 그거 할 줄 아는데 또 얘기하시네' 뭐,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게(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결국 록의 대부로부터 초등학교때 받았던 2달간의 기타 개인 교습이 신대철의 운명이 되었네요.
신대철은 나중에 김도균(백두산), 김태원(부활)과 더불어 '대한민국 3대 기타리스트'라고 불리게 됩니다.
신대철: "개인적으로 김도균, 김태원과 모두 친하다. 사실 3대 기타리스트는 언론에서 만든 말이다. 1980년대 초반 록그룹 부활, 백두산, 시나위가 활동하면서 나온 얘기 들이다."
확실히 언론이 이련 면을 부추긴 점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신대철 김태원, 김도균의 기타 실력이 우리나라에서 톱클래스였고, 또한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할 정도로 서로 독보적인 스타일을 구축했기 때문에 이런 류의 '기사'들이 많이 팔린 것이 아닌가 합니다.
* 신대철 임재범의 첫만남
무명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던 신대철은 임재범과 함께 시나위 1집으로 데뷔하게 됩니다.
원래 신대철과 임재범은 전혀 모르는 사이였죠.
신대철: "이태원의 클럽 록월드 대기실에서 혼자 기타 연습을 하고 있었다. 영국 록그룹 레인보우의 'Rainbow Eyes'를 연주하는데, 갑자기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노래를 하더라."
신대철: "그런데 그 노래가 너무 매력적이더라. '어, 저 사람 뭐지?'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연주를 했다. 노래가 끝나고 몇초의 정적이 흘렀다."
신대철: "내가 그 사람에게 "우리 얘기 좀 할까요?"라고 물으니까, "그러죠."라고 대답하더라. 바로 앞에 있는 슈퍼마켓에 가서 삶은 달걀 하나와 소주를 사서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모르는 사람과 그렇게 된 상황이) 굉장히 신기했다."
신대철: "한 15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대철아, 나 모르겠니? 나 임재범이야."이러더라. "어, 임재범? 진짜?"라고 말했다."
당시 신대철은 기타로 조금씩 이름을 얻기 시작했고, 임재범 역시 노래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할 때였죠.
서로의 이름만 들었던 두 사람이 처음 만나게 된 장면입니다.
이후 임재범은 시나위로 영입되어서 보컬로 활동하게 되는데,
시나위의 리더는 계속 신대철이 맡습니다.
신대철이 임재범보다 5살 연하인데, 사실 한국에서는 나이 어린 사람이 리더가 되는 경우는 많이 드물죠.
아마 신대철이 어릴 때부터 리더쉽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신대철 과거 사진(신대철 젊었을때 사진)
* 신대철 임재범 데뷔 계기
신대철: "이태원 '락월드' 공연장에서 임재범씨와 몇차례 같이 공연을 했다. 관객은 많아야 열 다섯 명 정도되었는데, 갑자기 대기실에 '킹박'이라는 분이 들어오셨다. 지금으로 치면 이수만같은 분이시다."
신대철: "그분이 대뜸 "야, 너희들 곡 있어?"라고 묻더라. (음반 제작자가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뻔한 얘기다. 음반을 내자는 얘기지. 그 전에는 "우리 같은 음악을 누가 만들어 주겠어? 그냥 하고 싶은 음악이나 하자."라는 생각이었는데, 운 좋게 그렇게 시작하게 되었다."(신대철 시나위 데뷔 1985년)
신대철: "1집 'Heavy Metal Sinawe'에 '크게 라디오를 켜고' 등이 수록되어 있었다. 앨범이 나오자마자 킹박 선생님이 갑자기 난리가 나서 우리를 부르셨다. "초판 벌써 다 나가고 재판 찍고 있다"라고 하셨다. 당시에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그 후에 공연을 했는데,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많이 당황스러웠다."
이 1집으로 시나위는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됩니다.
이후 시나위는 임재범이 탈퇴하고, 김종서, 서태지(베이스) 등이 거쳐갑니다.
하나깉이 엄청난 명성을 가진 가수들이죠.
이렇게 신대철은 데뷔 이후 30년을 음악을 했는데, 여전히 그에게 아버지 신중현은 부담스러운 존재네요.
* 신중현의 속마음
신대철: "사실은 아버지가 참 부담스럽다. 거대한 산 하나가 있는데, 그게 넘사벽이니까. 내가 어떤 독립적인 인격체로 표현되지 못하고, 항상 '신중현 아들 신대철'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니까."
신대철: "한때는 이게 싫어서 미디어와 멀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내 동생들을 보니까 나보다 더 힘들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 나는 신중현 아들 신대철이지만, 내 동생들(신석철, 신윤철)은 신중현의 아들이자 신대철의 동생이 되는 거니까. (걔들을 봐서라도) 내가 힘들다면 안되겠다 싶더라."
신대철: "사실 음악가로서 아버지의 업적을 내가 뛰어 넘는다는 건 좀 힘들다. 그래서 그건 일단 포기했고..."
그런데 아들 3명이 모두 음악을 하겠다고 나섰을 때, 신중현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신중현: "음악을 하면서 비록 내가 고생은 했지만, 음악이 있어 행복했기에 아들들이 음악을 하겠다고 했을 때 말리기 싫었다. 사실 음악을 친구 삼아 인생을 사는 거, 그거 참 괜찮은 인생이었다."
신중현: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는 거다. 돈에 의지해 살았는데 만약 그 돈이 없어지면 자기 중심을 잃기 쉽다. 하지만 음악은 그렇지 않다. 내가 그랬듯이 아들들 역시 음악이 평생 의지해도 되는 친구가 되었으면 한다."
* 신대철 신해철 관계
중년 이후의 신대철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2가지 있습니다.
바로 신대철 신해철 관계와 더불어 신대철의 바른음원유통협동조합' 운동이죠.
가수 신해철이 의료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후에, 신해철의 가족과 동료 음악가들은 신해철의 억울한 죽음을 풀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게 됩니다.
신대철: "사실 의료사고 같은 건 늘 남의 얘기라고만 생각했다. 뉴스를 들어도 '그런 일이 있었구나'하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남 얘기로 들리지가 않는다. 환자가 가수 신해철이다. 그 병원 입장에서는 VIP 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사고가 발생했다. 어느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거다. 신해철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이를 계기로 뭔가 (법체계가) 바뀌었으면 한다."
신대철: "사실 그 날(신해철 화장날) 오전까지만 해도 (고 신해철을) 화장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모 법률 전문가께서 (의료사고로) 법정으로 갈 거면 부검을 하는 것이 맞다라고 강력한 조언을 해주셨다. 그런 의견을 들은 (나를 비롯한) 동료 가수 분들이 적극적으로 가족 설득에 나섰다. 그리고 가족분들이 정말 어려운 결정을 하게 된 것이다."
사실 신해철 사건에서 '부검'은 정말 중요한 결정이었습니다.
의료사고였지만 고인을 화장하게 되면, 증거가 남지 않기 때문이죠.
이를 위하여 신대철을 비롯하여 이승철, 남궁연 등이 신해철의 가족을 설득한 것이 주효했던 것 같네요.
신대철에 대한 이야기가 2편으로 이어집니다. (2편 새창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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