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김완선이 정주영과의 스캔들에 휩싸이기도 하는데, 여기의 핵심은 하나일 뿐입니다.
이와 연관된 '김완선 남편', '김완선 결혼 이혼' 등의 루머도 살펴봅니다.
또한 김완선은 무척 굴곡진 인생, 그리고 매우 도전적인 인생을 살아왔는데, 시대적인 분위기가 그녀를 그렇게 만든 면도 없지 않은 것 같네요.
김완선 이야기가 1편에서 이어집니다.
(스폰서 링크)
# 목차
* 김완선 은퇴 이유는
* 김완선 이모의 빚 때문에
* 김완선 대만에서의 성공을
* 김완선 2건의 소송을 동시에 진행하며(김완선 누드사건)
* 김완선 정주영 루머의 핵심은
* 김완선 이모 한백희의 별세로
* 김완선 남자친구 생각(김완선 남친)
* 김완선 결혼에 대한 생각
유라준의 특별한 이야기
* 김완선 은퇴 이유는
아직 김완선이 이모와 함께 활동하고 있던 1992년 김완선은 갑자기 은퇴를 선언합니다. 최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던 김완선이었기에, 당시 사람들의 충격은 컸고, 그래서 루머가 분분했죠.
(김완선 임신설, 김완선 재벌 스폰서설 등)
(이때 김완선 정주영의 관계가 루머로 돌기도 합니다. 백지수표설, 100억원 지급설이 돌죠. 이것에 대해서는 밑에서 언급함)
하지만 분명한 2가지가 있었습니다.
첫번째, 김완선은 데뷔 초기부터 해외 진출을 공공연히 언급했고, 이모에 의해서 그렇게 키워졌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1989년, 90년에 일본에 우리나라 트로트 가수를 제외한 댄스 가수로 최초로 진출을 시도했고, 후일 아무로 나미에를 비롯한 일본 여자 솔로 가수의 포맷의 전형이 김완선이었다는 설이 돌 정도로 큰 영향을 주었죠.
그 정도로 김완선의 춤은 대단했고, 가창력도 어느 정도 갖춘, 시대를 앞선 가수였죠.
(1990년: 《람바다(ランバダ)》 (일본))
김완선 사진
두번째, 김완선은 1990년 5집때까지 '일종의 폄하'를 당합니다.
당시 큰 인기를 얻기는 했지만, 그때의 시대적인 분위기로 댄스가수인 김완선은 다른 발라드 가수보다 가창력이 떨어진다는 선입견에 시달렸던 것이죠.
김: "'타의'로 댄스 음악을 불러왔다고 보면 거의 틀림없어요. 저는 원래 댄스음악보다 음악성과 분위기가 강조되는 발라드를 불러 '음악감상용 가수'가 되고 싶었거든요."
결국 1992년 6집 앨범에는 '그대는 바람처럼' 등의 댄스뮤직이 단 3곡만 들어있고, 나머지는 모두 발라드로 구성되었으며, 타이틀곡 '애수'는 손무현 작곡에 김완선이 직접 작사한 곡이었습니다.
당시 김완선 6집은 74만장이 팔리기는 했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에게 묻혔고, 김완선은 자신의 노력이 번번히 실패로 끝나는 것에 좌절감을 느꼈을 것 같네요.
김완선 몸매 사진
* 김완선 이모의 빚 때문에
결국 김완선은 6집 이후인 1992년 11월 '은퇴'를 선언하는데,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죠.
김: "이모(한백희)가 우리 부모님에게 진 빚이 좀 있었다. 이모가 영화의 계약금을 받으면, 먼저 부모님의 빚을 갚겠다며 나를 설득했다. 결국 나는 '여태 부모님께 잘 하지도 못했으니 그거라도 해야지'란 생각으로 고민 끝에 이모의 말을 따르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이모는 빚을 갚지 않았다."
김: "나도 처음엔 은퇴가 너무 극단적인 것이라 동의하지 않았지만, 이모는 기획 은퇴를 종용했다. 팬들에게 거짓말을 해야 했던 상황이 너무 괴로워서 눈물을 흘렸다."
결국 김완선은 1994년 대만에서 '퍼스트 터치'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됩니다. 당시 대만에서는 김완선같은 춤을 추면서 노래하는 가수가 거의 없었기에 큰 관심을 얻게 되었죠(김완선 일본 활동이름 - 진위엔쉬안(金元萱;김원훤)).
김완선 대만 활동 사진
(참고로 김완선은 어떻게보면 원더걸스가 아닌가 합니다.
한창 인기가 있을 때 각각 동아시아(대만과 중국)와 미국으로 진출하려고 했죠.
다만 김완선은 시장을 잘 공략해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던 점이 서로 다르죠.)
* 김완선 대만에서의 성공을
김: "당시 제 중국어가 좀 서툴렀는데, 그런 모습이 애기같이 귀여웠나 봐요. 관계자들이 말을 더이상 배우지 말라는 요청을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대만에서는 3집까지 냈는데, 우리나라 가수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남겨뒀어요."
실제로 후일 클론의 대만 진출에 김완선의 이미지가 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이후 김완선은 중국으로 진출을 시도하지만, 이때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김완선은 한국으로 컴백한 후 1996년 7집을 발표하고, 오룡비무방이란 댄스 그룹을 제작하기도 하지만, 별다른 빛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1998년 13년동안 같이 해온 이모 한백희와 결국 결별하게 되었죠.
그런데 한백희는 13년동안 김완선에게 돈을 주지도 않았을 뿐더러, 이미 김완선의 이름으로 여기저기 빚을 져 놓았던 상태였습니다.
김완선이 이모에 대해서는 애증의 2가지면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이모부에 대해서는 단지 "14억 원 가량의 부도를 냈다.",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 한다."는 언급만 했을 뿐입니다.
그녀의 이모부에 대한 심정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네요.
아마 이모부란 존재로 김완선의 결혼 생각, 이성관 역시 영향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 김완선 2건의 소송을 동시에 진행하며(김완선 누드사건)
김완선은 행사, 축제 등을 뛰면서 이모가 져 놓은 빚을 갚기에 바쁘게 활동을 합니다. 하지만 워낙 액수가 컸기에 그리 쉽게 해결이 되지 않았고, 또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모의 병원비까지 부담을 안게 됩니다.
하지만 새로운 앨범을 내지는 못하는 상황이었죠.
김: "현 소속사에서 음반 발매 약속을 지켜주지 않기에, 계약 파기 조건이 된다. 만일 조용히 해결 되지 않으면 소속사에 위약금을 물어 주고라도 나오고 싶다."
바로 김완선이 이모와 결별한 후에 들어간 소속사와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속사는 김완선의 앨범을 내지도 않고, 또 김완선을 그냥 놓아주지도 않습니다. 왕년의 댄스퀸을 그냥 손에 쥐고 있었던 셈이죠.
결국 김완선은 2003년에 특단의 조치를 내리는 데, 바로 '김완선 누드화보'를 촬영하게 된 것이죠.
김완선 누드 화보 계약 내용 - 계약금 5억원과 수익에 따른 러닝 개런티 지급
김: "아무것도 필요 없었고, 단 한가지 돈이 필요했다. 빚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했다. 그 땐 보이는게 오직 그것(돈) 밖엔 없었다."
김완선의 경제적인 압박감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김완선 소속사는 김완선에게 소송을 제기합니다.
"김완선이 회사와 상의 없이 일(누드 화보)을 독단적으로 처리했다."
또한 누드 화보를 촬영했던 제작사 역시 김완선에게 계약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고 단지 2억원만 지급합니다.
"누드 이벤트를 진행하면서 김완선이 소속사와 마찰을 일으켰다. 이에 따라 수익이 제대로 나지 않았고, 김완선의 초상권 확보가 힘들다."
결국 김완선은 2건의 소송을 동시에 진행하게 됩니다.
김: "약속된 돈도 못 받았고, 게다가 통장에 압류까지 걸려 살 수가 없다. 변호사 비용도 감당하기 힘들다. 너무 괴롭다."
결국 이런저런 소송과 재판끝에 김완선은 소속사와 계약해지를 했고, 누드 화보 제작사를 상대로는 승소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돈을 제대로 지급받았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네요.
* 김완선 정주영 루머의 핵심은
참고로 김완선이 정주영과의 루머로 곤욕을 치르기도 하는데, 이에 대하여 다시 언급합니다.
김: "그전부터 모 재벌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문이 한국에 돌았나 봐요. 그러다가 제가 해외에 장기간 체류하다 보니 출산설까지 퍼지게 된 것이죠. 전 그냥 어이가 없었어요. 사실이 아닌 거짓에 일일이 대응하기도 그랬고, 저만 떳떳하면 된다는 생각도 했고요."
김: "사실 (모 재벌로부터) 백지수표 유혹을 받기는 했어요. 하지만 그런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거절을 했었죠."
약 10년간의 시간차가 있는 이 사건들에서 김완선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먼저 만약 김완선이 정말 백지수표를 받았다며, 훗날 이모의 빚으로 그렇게까지 빚에 쪼달리다가 누드 화보까지 촬영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네요.
김완선 몸매(김완선 화보)
또한, 만약 김완선이 스폰서의 돈을 받는 경험을 했다면, 삶에 경제적인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기존의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했을 겁니다.
성매매 여성들이 그 생활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쉽게 돈을 버는 방법'을 알게 되면서 삶이 수동적으로 변하게 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김완선의 삶에 대한 적극성, 절박함 등은 그것과는 거리가 먼 것 같네요.
참고로 1992년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이때의 이야기 역시 김완선과 정주영의 루머가 터무니 없다는 것을 잘 알려줍니다.
이미 이십년도 훨씬 지난 일이니 시시콜콜 따질 필요는 없지만, 사람들의 선입견과 달리 김완선은 대선 때 다른 진영에 섰죠(김완선 정주영 김영삼 김대중).
* 김완선 이모 한백희의 별세로
아무튼 김완선은 누드 화보로 받은 2억원과 이런저런 행사와 축제를 뛰면서 버는 돈으로 빚을 어느 정도 막는데, 2006년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바로 병상에서 투병을 하던 이모 한백희의 별세였죠.
이미 결별을 한 상태였지만, 이모란 존재는 김완선에게 절대적이었습니다.
게다가 마지막까지 화해를 하지 못했기에, 김완선의 충격은 더 컸습니다.
결국 3년동안 하와이로 떠나서 뒤늦은 공부를 하게 됩니다(디지털 아트 전공).
김완선 이종 사촌 동생 사진(이모 한백희 아들)
김: "그냥 외국에 오래 있고 싶었는데, 당시 방법이 학생 비자밖에 없더라고요. 911 사건 이후부터 학생 비자로 간 사람들이 꼭 학교를 가야 한대요. 그래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전 제가 새벽 6시에 일어나는 아침형 인간으로 살 줄은 정말 몰랐어요."
김: "한 1년간 화창한 날씨 아래서 아름다운 자연을 보며 사니까 억울함, 원망, 분노 같은 부정적 감정이 옅어졌어요. 마음의 마음의 상처들이 치유된 것이죠. 우울증이 있는 분들에게 햇볕과 하늘을 보며 지내기를 권해요."
김: "결국 이모가 돌아가시기 전에 화해를 하지 못했어요. 어떤 사람이 고민이나 원망, 분노 없이 한평생을 살겠어요. 한때 이모에게 배신당했다고 느낀 적도 있지만, 사실 이모와 행복하고 좋은 일도 많았고, 그 덕분에 지금의 김완선이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후 하와이 생활을 마친 김완선은 2011년 초에 컴백을 하고, 활발하게 활동하게 됩니다.
여기까지 김완선의 인생은 영화보다 더 영화같네요.
신현하(김완선 매니저): "김완선이 친 이모 보호 아래 있어서 ATM기기에서 돈을 찾는 방법도 모를 정도로 세상 물정을 모른다. 심지어 버스, 지하철 요금도 모를 것이다."
김: "난 1997년, 29살때 처음 제대로 된 화장품 쇼핑을 했다. 그 전에는 이모가 사다준 우태하 스킨이라고 빨간 물약 같은 것만 발랐었다. 나 스스로 화장품 쇼핑을 하게 된 이후에 무엇을 사야하는지 처음엔 정말 막막하더라."
어떤 화장품을 사야하는지 조차 몰랐던 것을 보면, 정말 김완선은 새장안의 새였던 것 같습니다.
* 김완선 남자친구 생각(김완선 남친)
현재 김완선은 미혼입니다.
'김완선 남편', '김완선 이혼'등은 전부 루머이죠.
김: "스물다섯 살 때 대만 진출에 앞서 홍콩에서 잠시 중국어를 배우고 있을 때였다. 그때 연예 관계자들과 미팅하는 자리에서 왕가위 감독을 처음 만나 호감을 느꼈다."
김: "왕가위 감독이 보고 싶어 무작정 그의 집 앞에 간 적도 있었는데, 얼마 뒤에 왕감독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을 접었다."
김: "그러다가 다른 착한, 그리고 경제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프러포즈를 받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이 나를 정말 많이 좋아해줬던 것 같다. 하지만 당시 내 정신연령은 겨우 15살이었기에 ‘결혼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 생각하고 그 프러포즈를 거절했다."
* 김완선 결혼에 대한 생각
김: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는 사심을 갖고 상대를 만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30대 초반에 결혼하고 싶었던 적이 있어요. 괜찮은 남자가 있었는데, 돌이켜보면 나의 사심이었던 것 같아요. 여자나 남자나 서로 사심 없이 만나야지, 그렇지 않으면 뭔가 삐거덕거리게 되는 것 같아요."
김: "연애라는 게 그런 것 같아요. 내가 혼란스러운 상태에서는 혼란스러운 사람을 만나게 되죠. 내 마음이 정리되고 똑바로 서면 상대 역시 그런 사람을 만나는 거고요."
확실히 결혼이란 상대에게 기대기 위하여 사용하면 안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서로가 힘들어질 뿐이죠.
김완선 과거 사진
김완선 결혼 계획: "40대 나이에 결혼할 수는 없고, 나중에 50~60대가 됐을 때나 결혼할 생각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김완선은 이모와 이모부 부부를 보고 남자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본인이 그렇게 좋아하던 '능력이 출중한 이모'가 결국은 '밑빠진 독에 물을 붓다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으니까요.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인생을 살았던 김완선,
앞으로 더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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