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김완선은 나이가 올해 47살인데도 여전히 대단한 춤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시대를 너무 앞섰기에 불행했던 면도 있는 것 같네요.
또한 김완선의 이모 한백희와의 관계는 무척 복잡합니다.
애증이라는 단어로도 잘 설명이 안되죠.
김완선의 스캔들이나 루머가 굉장히 복잡한데, 김완선의 성격이나 가치관을 안다면 그 스캔들의 실체를 알 수가 있죠.
참고로 김완선과 함께 밴드도 구성했던
(스폰서 링크)
# 목차
* 김완선의 대단한 집안 내력
* 김완선 어렸을 때 언니들보다
* 김완선 이모 한백희와의 관계
* 김완선 한백희에 대한 애증으로
* 김완선 제대로 정산을 받지 못하고
유라준의 특별한 이야기
가수 김완선(본명 김이선)은 1969년 5월 16일 서울에서 태어납니다(김완선 고향). 올해 47살이죠(김완선 나이).
(김완선 종교) 개신교(기독교)
(김완선 가족 관계) 아버지, 어머니, 5자매 중 셋째
(김완선 키 몸무게 혈액형) 164cm, 44kg, B형
(김완선 학력 학벌) 세화여자고등학교 졸업, 하와이대학교 디지털아트 전공
(김완선 프로필 및 경력) 1986년 1집 앨범 [오늘밤]으로 데뷔
한국 여성 댄스가수의 시초로 평가받고 있으며, 대표곡으로 나만의 것,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가장 무도회 등이 있습니다.
* 김완선의 대단한 집안 내력
김완선 집안은 우리나라의 유명한 민속춤의 전통 명가입니다.
김완선 외할아버지가 바로 한성준 명인이죠.
(한국 민속춤의 아버지, 조선성악회(1933년)의 창립에 관여했고, 일제때 명맥이 끊기다시피한 전통춤을 집대성함)
그리고 김완선 이모중의 한명인 한영숙 명인 역시 한국 민속춤에서 중요한 위치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완선(이하 김):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승무를 추신 분이 저희 이모님(한영숙)이에요. 저도 어릴 때 창을 배우러 다녔고요."
김완선 사진
그 외에 김완선의 친가 역시 예술가 집안이었습니다.
김: "친할아버지가 탱화 화가셨어요. 할아버지 제자가 바로 만복 스님이고요. 아빠도 어렸을 때 탱화를 그렸는데, 중간에 한자를 배우기 싫어 그만두셨어요. 그리고 나중에 토목 설계를 하게 되셨죠."(김완선 아버지 직업)
김: "기억에는 없지만, 제가 어렸을 때 외가댁에서 잠깐 살았대요. 그때 저희 이모들이 재미삼아 꼬마들 데리고 동네 노래자랑대회에 나간 적이 있는데, 제가 우리 동네에서 1등을 하고 옆 동네까지 원정을 갔었대요."
김: "원래 제 성격이 많이 외향적이었대요. 그런데 엄마가 저를 외가댁에 맡겨놓았다가 다시 데리러왔는데, 제가 막 울면서 안 가겠다고 했대요. 엄마가 섭섭했는지 나를 데리고 방안에 들어가 문을 잠근 채 있다가 나왔는데, 그때 이후로 제 성격이 내성적으로 확 바뀌었대요.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고요."
김완선 과거 사진
김완선 리즈시절 사진(김완선 젊은 시절)
* 김완선 어렸을 때 언니들보다
김완선의 어릴 때 일화가 무척 미스테리하네요.
김: "우리 집이 딸만 다섯인데, 사실 나보다 언니들이 더 예뻐서 당시 매니지먼트 사업을 하던 이모가 언니들을 점찍었다."
참고로 김완선 이모가 바로 한국 최초의 여성 매니저 한백희입니다.
한백희 스스로가 미8군 가수 출신이었으며, 가수 인순이를 발굴했던 스타 메이커였죠.
김: "큰언니는 이모 밑에서 연습까지 하다가 본인이 스스로 재능이 없다고 판단해서 그만뒀고, 둘째 언니는 처음부터 그쪽 일을 하기 싫어했다. 반면에 나는 외모도 평범했고 성격까지 내성적이어서, 이모는 ‘쟤는 왜 왔나’라고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춤을 배우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여러 명이 함께 배우기 시작했는데, 석 달 후에는 내가 가르치고 있었다."
김: "이모한테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저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나는 쟤가 무서워요’ 그랬다고 한다. 내가 노래로는 미쳐본 적이 없지만 춤에는 미쳐봤다."
확실히 김완선은 춤에 대한 재능은 타고났고, 또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 김완선 이모 한백희와의 관계
또한, 김완선은 시대를 앞서간 한백희의 스타 육성법에 의하여 성장하게 됩니다.
김: "연습생 시절 이모의 집이 있는 도봉구 방학동의 4층 건물에서,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연습만 죽어라 했다. 오전에는 노래 연습, 점심에는 음악 공부, 저녁에는 춤 연습 등 하루 일과가 빽빽했다. 이렇게 7년 동안 감금된 생활을 했다. 어느 누구도 만날 수가 없었다."
김: "내가 가수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고 있을 때, 이수만씨가 사무실에 놀러 왔었다. 당시에는 거의 없었던 시도였기에, 많이 놀랐을 것 같다."
어쩌면 이수만의 SM도 한백희와 김완선의 모습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일 수도 있겠네요.
김완선 이모 한백희 사진
김완선이 아주 어릴 때부터 이모의 손에 의하여 스타로 양육되는데, 철저하게 이모의 계산대로 성장하게 됩니다.
김: "내가 인순이의 리듬터치에서 가수 데뷔를 준비하던 15살 때부터 작곡가 신병하 씨로부터 화성학과 오케스트라 편곡을 배웠다. 당시에 곡도 몇곡 썼는데, 너무 서정적이다. 이미지와 안 맞는다’라고 이모가 평가를 했고, 결국 앨범에 실을 수가 없었다."
김: "이모가 "네가 쓴 곡이 네 이미지와 다르다"라고 했다. 내가 당시에 반항심이 컸는데, 그 말에 마음의 상처를 받고는 작곡을 포기해버렸다. 내가 그때 왜 포기해버렸을까? 지금도 후회가 된다."
김완선이 인순이의 리듬터치에서 백댄서로 활동한 것은 무대 경험을 쌓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좋은 경험이 되었지만, 이모의 틀에 맞추기 위하여 '작곡'에 대하여 핀잔을 한 것은 '어린 김완선의 가능성'을 짓밟은 행동이 되었네요.
만약 김완선이 작곡과 작사를 꾸준하게 했더라면, 어쩌면 싱어송라이터 김완선을 보게 되었을지도 모르니까요.
또한 김완선의 반항심 역시 '반항'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를 해친 것이 되었고요.
이렇게 때때로 어린 사람들은 '반항'을 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스스로를 해치는 것인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김완선은 1986년 18살의 어린 나이로 데뷔하게 되는데, 당시 20살이라고 나이를 속이게 됩니다.
김: "당시 10대라고 하면 방송 활동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될 것 같아서, 스무살이라고 속이고 가수 활동을 했다. 88년 스무살때 3집 앨범 '나홀로 춤을 추긴 너무 외로워'라는 가사를 부를 때 너무 민망했다."
확실히 스무살이라면, 외로움을 알기에는 조금 이른 나이가 아닌가 하네요.
* 김완선 한백희에 대한 애증으로
김완선은 이모 한백희에 대하여 2가지 감정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첫번째, 능력에 대한 탄복과 마음의 상처였습니다.
김: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10대 가수가 많지 않았어요. 당시 저의 매니저(이모 한백희)가 시대적으로 상당히 앞서 가신 분이었고, 저 역시 이모의 생각이 정말 쿨하게 느껴졌어요."
김: "일에 관해서는 이모와 잘 맞았어요. 사실 이모가 스마트하고 단호하고 무서우면서도 능력 있는 분이셨으니까."
하지만 김완선은 이모와 점차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김: "3집 정도 내니까 제가 한국 나이로 스무 살 정도였어요. 막 자아가 생기려고 할 때였는데, 그걸 이모가 억눌렀죠.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자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김: "타이틀 곡 선정부터 무대의상, 메이크업, 심지어 인터뷰에 응하는 대답들까지도 전부 이모가 시키는 대로 했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저 자신이 점점 위축되고 작아져 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이런 부분에 더하여 이모 한백희의 '고도의 전략'은 어린 김완선의 마음을 상처투성이로 만듭니다.
김: "가수 할 때는 매일 혼만 났다. 그래서 나는 늘 자신감이 없었다. 무대에서 노래를 다 부르고 나면, 이모에게 혼날까봐 내려오기 싫을 정도였다. 다른 가수나 매니저들은 그런 나를 보고 ‘쟤 또 깨지는구나’라고 불쌍해하기도 했다."
김: "사실 지금 생각하면 이모의 전략이었던 것 같다.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말도 안되는 꼬투리를 나를 혼내면서 화를 돋우면, 다른 날보다 월등히 폭발하는 무대를 꾸미게 되는데, 이모가 그런 것을 노린 것 같다."
김: "확실히 나는 이모 덕분에 매번 한계를 뛰어넘고 정신력이 강해졌다. 하지만 나는 늘 모자라고 못난 아이란 생각에 주눅이 들었다. 칭찬받는 게 행복한 일인지도 몰랐다."
김완선의 무대에 이모 한백희의 공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어린 김완선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서까지 이렇게 해야 했나 싶네요.
* 김완선 제대로 정산을 받지 못하고
두번째, 김완선은 이모와 음악 내적인 갈등 관계외에도, '수입 정산 문제'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게 됩니다.
김: "이모와 함께 활동하던 13년동안(86년 데뷔부터 98년 결별까지) 단 한 번도 돈을 받지 못했다. 이모가 내가 일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 "이모는 원래 검소한 사람이다.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 한다. 이상한 남자를 만나면 인생이 불행해진다. 차라리 이모가 그 돈을 자신에게 썼더라면 덜 억울했을 것이다."
김: "내 전성기 때 한 달 수입은 당시 아파트 2~3채를 살 정도였다. 하지만 난 그 돈을 본 적도 없다. 이모와 계약서도 쓰지 않고 13년 동안 활동했는데, 이모부가 사업을 하다 14억 원 가량의 부도를 냈다. 그래서 내가 버는 돈이 모두 빚을 갚는데 쓰였다."
확실히 김완선의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 한다.'말이 의미심장하네요.
김완선은 이모와 1998년 결별하게 되지만, 완전히 인연을 끊지는 못합니다.
한백희가 2006년 당뇨병으로 별세하는데, 그 전부터 응급실에 갈 돈이 없어서 김완선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 요청을 김완선이 뿌리치지 못한 것이죠.
김: "참다 못해 이모를 찾아가서 따졌다. "그러기에 진작 나한테 돈 좀 주지... 돈을 조금이라도 줬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 아니냐!"라고 하자, 이모가 "미안하다. 완선아, 미안해."라며 눈물을 흘렸다."
김: "그 대화가 마지막이었다. 결국 이모와는 마지막까지 화해를 하지 못했다. 내가 용서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용서를 받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확실히 김완선은 세간에 알려진 대로 '맹할 정도로' 착한 것 같네요.
아무리 이모라고 하지만 13년동안 돈을 주지 않고 부려먹었다면, 대부분이 철천지 원수가 되고도 남으니까요.
그리고 김완선은 이모와의 일을 예능(무릎팍도사와 승승장구)에서 세상에 공개한 것을 후회합니다.
김: "사실 이모 얘기를 하고나서 가족으로서 그런 얘기를 전부 다 했어야 했을까하는 후회가 되었다. 나는 이모를 좋아했다. 그렇게 매력있고 똑똑하고 카리스마 있는 분은 아직도 보지 못했다."
김: "원래 돈이란 건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 거다. 이모와 좋았던 때는 밤을 새며 이야기하기도 햇다. 하지만 이모와의 일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방송에서 내 삶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했다.)"
이렇게 김완선은 이모 한백희에 대하여 애증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김완선 이야기가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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