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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배우(50대 이상) 결혼 생활

이순재 아내(부인)최희정과 이순재 정치적 스탠스 문제

이순재 최희정 러브스토리 및 인생 이야기

탤런트 이순재를 보면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보통 은퇴해야 할 나이에, 여전히 현업에서 열심히 뛰고 있죠.

직종을 떠나서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순재 아내 최희정과의 첫만남과 러브스토리, 그리고 이순재의 최대 스캔들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 활동과 그의 정치적 스탠스가 흥미롭네요.


이순재 역시 정치적인 발언에 대하여서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 같습니다.


이순재 아내 사진


탤런트 겸 영화배우 이순재는 1935년 10월 10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납니다(이순재 고향). 올해 나이가 80살이죠(이순재 나이).

(이순재 학력 학벌) 서울중학교, 서울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철학과, 경희대학교 한의학 명예박사

(이순재 프로필 및 경력) 1956년 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가'로 데뷔


사실 그전부터 연극배우로 활동하다가 1956년 TV탤런트로 데뷔합니다. 이후 1991년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로 큰 인기를 끌었고, 2006년에는 거침없는 하이킥으로 다시 전성기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그외에도 이산, 엄마가 뿔났다, 베토벤 바이러스, 선덕여왕 등의 수많은 작품들과 예능 꽃보다 할배 등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이순재 과거 사진 젊은 시절


# 목차

* 이순재 북침설 비판

* 이순재 어린 시절

* 배우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

* 이순재의 초창기 시절- 드라마 생방송

* 이순재의 특별한 비법 3가지 (첫번째)

* 이순재의 특별한 비법 3가지 (두번째)

* 이순재의 특별한 비법 3가지 (세번째)

* 이순재의 다른 여자와의 연애 시절

* 이순재 아내 최희정과의 러브스토리

* 이순재 아내 최희정 나이와 프로필

* 아내 최희정의 사업 수완

* 이순재 사업 포기

* 이순재 정치 입문 계기와 열린우리당 이상수와의 인연

* 이순재 정계 은퇴

* 이순재 후배들에 대한 일침

* 이순재 천안함 폭침과 이석기 사태에 대한 입장

* 이순재 4대강 찬성과 가우디 찬양

* 이순재의 인생에 대한 깨달음



* 이순재 북침설 비판


이순재는 우리 탤런트계의 산증인일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에서도 산증인입니다.

이순재: "요즘 보면 어떤 사람들이 6·25를 한국이 일으켰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그날(6.25전쟁이 터지던 날) 내 동생하고 수영복 팬티 사려고 동아백화점에 갔다가 직접 봤어. 그때 우리 집이 비누공장을 해서 돈을 좀 벌 때였거든."


이순재: "여름에 개천에나 가려고 수영복을 구경하는데 지프차가 나와서 “외출·휴가 나온 장병들은 즉시 귀대하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는 거야. 어느 나라가 군인들 외출·휴가 보내고 전쟁을 일으키나?"


확실히 70년대, 80년대 주사파들이 북한에 동조해서 북침설(남한이 북한을 공격했다)는 주장을 많이 펼쳤습니다. 그런데 이제 구 소련과 중국의 비밀 자료들이 공개되어서 북한의 남침이 뚜렷해진 마당에, 아직까지 이에 대한 별다른 해명이 없이 요즘도 떳떳하게 활동하고 있네요.

(또한 이순재는 이석기 사태와 그밖에 정치적인 사태에 대하여 주목할만한 발언을 하는데, 밑에서 언급하겠습니다.)



* 이순재 어린 시절


또한 이순재는 어린 시절 매우 엄격한 교육을 받았고, 이에 대한 교육관을 평생 간직하게 됩니다.

이순재: "당시 막 문을 연 서울중학교에 들어갔는데, 늘 ‘일류 학교가 되려면, 일류가 되려면 이 정도로 안 된다’고 가르쳤어요. 겨울이라도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모자가 비뚤어져도 엄청 혼났죠. 하지만 그 학교 출신이 사회에 나가서 사고 쳤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어요. 지금 열린교육 운운하는데, 교육은 엄격함이 필요합니다."


이순재가 평생동안 스캔들이나 별다른 루머가 없었는데, 아마 어린 시절부터 받은 엄격한 교육이 그 밑바탕에 있었던 것 같네요.


후에 이순재는 재수를 해서 서울대 철학과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곧 연극에 빠지게 되었죠.


이순재: "피난가서 공부하려니 참고서도 달랑 하나 있는 상황이어서 공부가 쉽지 않았어요. 결국 대학 입시에 한번 떨어진 후, 서울대 철학과에 합격했어요."


이순재: "대학 때는 영화에 빠져 지냈어요. 50년대인 당시 별다른 취미거리가 없었으니까. 한번 극장에 들어가 하루 종일 보는 날도 많았어요. 요즘은 할리우드 영화가 대세지만 당시에는 오히려 장르가 다양해 이탈리아·영국·프랑스·일본 예술영화에 매료됐죠. 영국 캐럴 리드 감독의 ‘심야의 탈출’은 개봉관에서 두 번, 재개봉관에서 네 번, 논산훈련소에서 한 번, 총 일곱 번을 보았습니다."



* 배우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


이순재: "우리(연기자) 같은 경우엔 연기를 시작하게 된 동기가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1960년대 초반만 해도 이 직종은 두 가지 핸디캡이 있었어요. 전혀 수익성이 없고, 사회적으로도 인식이 열악했죠. 지금은 부모의 70%가 권장한다는데, 당시는 자식이 배우가 된다고 하면 90%가 반대했어요."


이순재: "그런데 왜 연기를 시작했느냐. 그 당시 외국에서 기가 막힌 영화들이 많이 들어왔어요. 돈만 생기면 외화를 보러 극장에 갔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실주의를 추구했던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계열, 장 뤽 고다르와 프랑수아 트뤼포의 누벨바그 영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보면서 이건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기에 따라서는 얼마든 새로운 것을 창조해낼 수 있겠다 싶었죠. 실제로 영국에서는 음악가나 미술가들과 함께 배우에게 귀족 작위를 주기도 합니다. 예술이라는 것을 인정해주는 거죠. 우리도 돈을 벌겠다는 목적이 아니라 예술적 차원에서 연기에 접근하는 후배들이 많이 생기면 좋겠습니다."


이런 이순재의 고백처럼 이순재는 청년 시절 영화란 예술을 접하고, 당시 사회적으로 저평가받던 연극에 대한 흥미를 가집니다. 돈을 벌려고 연기를 시작했던 것이 아니었죠.




또한 당시 사람들은 배우들에 대한 안좋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배우들이 방탕하고 무분별하다는 생각이었는데, 이순재는 이 부분 역시 감안하고 도전합니다.


이순재: "지금이야 인기 직종이 됐지만, 그때(1950년대, 60년대)만 해도 아무나 건드려도 되는 직종이 거지와 배우였어요. 경제적 수익성도 없고 전도가 약속된 것도 아니었죠. 또 배우들이 생활에 절제가 없어 가정이 파탄 나는 일이 많아, 그렇고 그런 직종으로 각인됐어요."


이순재: "또 최근 고 장자연씨 사건으로 안타까웠는데, 50년대에도 권력으로 돈으로 배우들을 유린했죠. 그런데도 선택한 건 연기를 예술로 봤기 때문이에요. 또 처신만 잘하면 당당하고 깨끗한 직종이라고 생각했고요."


이순재는 이런 초심을 끝까지 유지했기에, 한평생 별다른 구설수에 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 이순재의 초창기 시절- 드라마 생방송


그리고 이순재는 연극 배우를 하다가 TV탤런트로 전업하게 됩니다.


김환표의 책 TV 드라마속에서 발췌

- 1950년대 드라마 제작 환경은 정말 열악했다. 녹화기는 둘째치고 카메라도 달랑 2대에 불과했다. 카메라조작을 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물었기 때문에 카메라 대신 의자를 카메라로 설정해 실습을 해야만 했다. 이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 생방송으로 드라마를 제작해야 했으니 드라마 촬영은 긴장의 연속일 수 밖에 없었다. 생방송인 관계로 가장 큰 문제는 NG였다.


- 들어나봤나 드라마 생방송이라고. 오늘날 우리가 <해피 타임>같은 곳에서 만나는 NG장면의 그 자유발랄함은 꿈도 못꿀 일이었고 모든 NG는 방송 펑크와 바로 연결됐다. 그 가운데 기가 막힌 예를 하나만 들어 둔다. “스튜디오 바닥이 마루장이어서 힐을 신은 여자 연기자가 의자에서 일어나 움직이는 장면에서 마루장 구멍에 힐이 박혀 꼼짝을 못 하자, 난데없이 “엄마야!” 하고 소리친 적도 있었다


지금은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녹화 기술이 없어서 드라마를 생방송으로 연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관련 인력이 없어서 연극무대의 연출자와 연기자를 데려와서 써야 했죠. 이순재는 이때 자연스럽게 TV 연기자가 됩니다.



* 이순재의 특별한 비법 3가지 (첫번째)


올해 80살이 된 이순재이지만, 여전히 현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두가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네요.


첫번째는 바로 그의 건강함입니다(이순재 건강비결, 장수비결).

요즘도 드라마 촬영장에서는 밤샘 촬영이 횡행하는데, 고령의 이순재가 제일 왕성하게 활동하기에, 후배들이 '강철 순재'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입니다.


60만 넘어도 기력이 딸리는 사람이 많은데, 이순재는 정말 대단한 것 같네요.

이순재: "어머니가 96세까지 건강하게 살다 가셨는데 그 체질을 물려받은 것 같아요. 사실 배우라는 직업, 내 일 자체가 매우 불규칙합니다. 정기적으로 헬스클럽에 나가거나 주말에 등산하기도 어렵죠."


이순재: "굳이 건강비결을 꼽자면 금주와 금연이 아닌가 싶어요. 집안내력도 있지만 술은 젊어서부터 별로 즐기지 않았고 담배는 82년에 끊었어요. 당시 ‘풍운’이라는 대하드라마에서 대원군 역을 했는데 대사가 길다보니 자꾸 목에서 가래가 끓어 ‘이 참에 건강도 생각하고 내 존재감도 한 번 보여줄 겸 끊자’ 했죠."



이순재: "과거 술 좋아하던 동료들이 많이 이 세상을 떠났어요. 젊어 연극하며 가난하게 살면서 일마치고 나오면 세상이 서럽고 자기 처지가 서러워 깡소주를 마시면서 많이 울기도 했죠. 동료들이 일찍 세상을 뜬 데는 그런 탓도 컸을 거예요. 이제 비로소 먹고 살만하니 다들 저 세상으로 간 겁니다. 얼마나 억울해요?"


이순재: "또한 쉬지 않고 일하다보니 잡념을 가질 시간이 없었어요. 육체적으로는 좀 힘들고 시간에 쫓기더라도 내가 좋아서 선택한 직업이다보니 다른 직업과는 달리 정신적 스트레스를 덜 받아요."


이순재에게는 특별한 비결은 없네요.

다만 금주, 금연,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열정적으로 하는 평범한 비결을 가지고 있는데, 사실 이것을 지키는 일반인들은 별로 많지 않죠.


대부분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자신이 싫어하는 직업도 본인과 가족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하고, 또 그 스트레스를 술이나 담배, 혹은 폭식 등으로 해소하곤 하죠.

대부분이 알고 있는 건강비법이지만, 참으로 지키기가 쉽지 않은 비법같습니다.



* 이순재의 특별한 비법 3가지 (두번째)

두번째는 항상 기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세입니다.

이순재: "지금도 하루에 1,2시간씩은 꼭 발성연습을 한다. 이것은 평생 훈련해야 한다. 연기라는 것은 수련과 훈련을 하면서 평생 실력을 쌓아가야 하는 하나의 과제이다. 연습을 안 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이순재: "연기자로서 평생의 업으로 삼으려고 한다면 능력이 있어야한다. 능력이란 바로 연기력이다. 의욕만 가지고서는 결코 '평생 연기자'가 될 수 없다."


이순재 정도면 현역 연기자중에서 최고참이며, 누구도 그의 연기력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꾸준히 연습을 하고, 또 발성과 발음을 중요시합니다. 이런 정신 자세가 경쟁이 치열한 연예계에서 그가 여전히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 이순재의 특별한 비법 3가지 (세번째)


세번째는 이순재의 '젊은 마인드'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순재: "스스로 젊다고 생각하며 사는 거예요. 나이 먹었다고 생각하면 늙는 거야. 움직일 수 있을 때 열심히 걸어다녀야지. 대접받길 바라면 안 돼. 가끔 후배들과 골프를 치러 가는데 거기에 나이 먹은 사람은 없어요. 없는 이유가 뭐냐. 자꾸 대접받으려 하니까 어울리기 힘든 거야. 동일한 조건으로 참여해야지."


이순재: "촬영할 때도 마찬가지야. 밥도 나이 먹었으니까 나부터 달라고 하면 남들에게 지장이 간다고. 그럼 다음에 날 부르지 않아. 몸 사리지 말고 해야 해. 그럼 의지도 생기고 자신감도 생겨. 저절로 건강해지지. 나는 그래. 내일 모레 내가 어떻게 될지 생각하면 (후배들과 동일하게 어울리는 게) 어렵지 않아요. 오늘도 오전부터 촬영하고 오후에 연습하고 이따 또 새벽 2시까지 촬영한다고."


이순재: "나이 먹었다고 주저앉아서 어른 행세하고, 대접받으려고 하면 더 금방 늙어버려. 우리 나이쯤 되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끝을 생각하기보단 현재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지. 나는 내일 당장 할 일이 있으니까 그저 ‘하면 된다’ 하고 살아. 인생은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좋아. 80이지만 ‘60이구나’ 하고 사는 거지."


이순재는 스스로 대접받기 보다는, 현재의 삶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가 오래도록 현역으로 활동하게 만든 밑바탕이 아닌가 하네요.



* 이순재의 다른 여자와의 연애 시절


이순재 부인 최희정(이름)과의 첫만남과 연애 과정이 흥미로운데, 그 전에 이순재의 연애 과정이 재미있네요.


이순재: "내가 졸업하고 배우생활 시작할 때였는데, 부모님께서 “몇 월 며칠 창경궁 문 앞으로 가면 어떤 색시가 나올 거다” 하시는 거에요. 와이셔츠에 등산모 쓰고 나가 기다리니까 혜화동 부촌 쪽에서 아가씨 하나가 오더군요."


이순재: "처음에는 인물이 썩 눈에 안 들어와 내키지 않았어요. 그런데 겨울이 되니까 크리스마스가 오잖아요? 심심한 마음에 전화했더니 마침 만나 주더군요. 그렇게 차 마시고 밥 먹고 하는 새 봄이 됐는데, 하루는 이 아가씨가 얼굴이 새파래져서 오더니 “직업이 배우냐”고 묻는 거에요.


이순재: "맞다”고 했더니 “집안에서 난리가 났다”고 그러더군요. “대체 왜 그러느냐”는 물음에 아가씨가 대답하는데, 내가 평생 기억하는 말이 됐어요. "배우는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고 생활이 무절제하다."라고요."


당시 배우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얼마나 나빴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순재: "그런데 이 아가씨가 1주일 후에 나를 만나더니 “결혼하자”고 그러더군요. 자기가 집을 나오겠다는 거죠. 사실 배우자는 평생 같이 가는 거잖아요? 요만한 의심이 없어도 힘든데, 처음부터 이렇게 시작하면 안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냥 “좋은 추억으로 남자”고 말했죠."


이런 배우에 대한 세간의 나쁜 인식은 그가 후일 정치에 뛰어든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어쨌든 그 후 이순재는 현재의 아내 최희정을 만나게 됩니다.


이순재 부인 사진


* 이순재 아내 최희정과의 러브스토리


이순재: "군대를 다녀온 뒤 명성여고 연극반 연기지도를 맡았는데, 내 처제가 당시 1학년 학생이었어. 어느날 연습을 하는데, 웬 이대생이 찾아와 “우리 동생 잘 좀 봐주세요” 그러더라고. 계란 두 개 삶아가지고 와서…"


뇌물(?)은 뇌물인데, 당시에는 삶은 달걀 역시 아주 귀했죠.


이순재: "결국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내가 각색해서 최우수단체상을 탔어. 게다가 처제(당시 여고생)가 연기상을 타자 장인 어른이 저녁을 산 거야."


이때 이순재는 처음으로 아내 가족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순재 장인이 식사 후에 자신의 딸에게 "저 분 모시고 영화 한편 봐라."라고 합니다.

어른이 먼저 권유해서 연애를 시작하게 된 거죠.

아마 당시 이순재의 가치관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 이순재 아내 최희정 나이와 프로필


최희정은 이순재보다 6살 연하이고,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합니다.

당시 세계일주를 두번이나 하면서 공연을 할 정도였고, 동아신인상을 수상할 정도로 엘리트였죠.


이순재: "제가 생활이 안정적이지 않으니 선뜻 프러포즈도 못하고 망설이던 중 아내가 해외 순방공연을 떠났어요. 그런데 다녀와서도 마음이 한결같아 3년 만에 결혼했죠."


이렇게 이순재는 최희정과 1966년 결혼식을 올립니다(이순재 배우자 최희정).

둘 사이에는 아들 1명과 딸 1명이 있죠(이순재 자녀 자식)(이순재 가족 관계).

(이순재 아들 이종현)


이순재 아들 사진(첫돌 기념)


* 아내 최희정의 사업 수완


결혼 초기에 이순재는 생활고를 겪습니다.

이순재: "데뷔 초 3~4개월 공백기가 있었다. 생활이 어려워 아이 돌 반지를 밑천으로 아내가 만두가게를 열었다. 아내 혼자 힘으로 열었던 만두가게가 장사는 무척 잘 됐다."(이순재 친아들 돌반지)


최희정: "배우란 직업이 일이 없으면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됩니다. 늘 불안하게 살림을 해야 하고 남편은 돈 때문에 자신의 뜻을 굽히며 활동을 해야하고요. 어느날 배우들의 모임에서 모두들 화려한데 옷 하나 제대로 입지 못하고 사는 우리가 너무 초라하게 생각되어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결심한 거죠."


이게 바로 서울 동부이촌동의 만두 가게 '코끼리 만두'입니다.

그리고 6년만에 210평짜리 빌딩을 사고, 또다른 고급중국 음식점을 열 정도로 사업은 번창합니다.


이순재: "모두가 제 아내 덕입니다. 출연료만 받아 사는 건 뻔하지 않습니까? 아내가 구두쇠 노릇을 하며 억척스럽게 살려고 노력한 보람입니다. 6년 전의 작은 코끼리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오늘의 큰 코끼리는 있을 수 없었을 겁니다."


즉, 코끼리 만두란 만두 가게가 거상(큰 코끼리)이라는 중국 음식점이 된 거죠.


이렇게 사업이 잘 되면 아예 이쪽으로 전업을 할 수도 있을 텐데, 이순재는 초심을 잃지 않습니다.



* 이순재 사업 포기


이순재: "사업이 저와는 맞지 않더군요. 그래서 결국 마누라한테 ‘이봐, 나는 평생 연기할 사람인데 장사에 모든 정신을 뺏기면 난 못해. 굶어 죽어도 좋으니까 당장 때려치워’ 하고 심한 소리를 하고 그만두게 했습니다. 정신적으로 풍족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아내는 알뜰함이 몸에 밴 사람입니다. 우리 집에서는 옷을 세일할 때만 사는데,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경제적인 문제로 이혼을 많이 하죠(이순재 이혼).

생활고가 문제되어도 이혼을 하고, 또한 사업이 잘 되어도 부부간에 뜻이 맞지 않아서 이혼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최희정의 경우는 남편의 뜻을 존중해서 사업을 아예 접어버렸네요.


아내 덕분에 오늘날의 이순재가 있는 것 같고, 이순재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이순재 진짜부인).




이순재: "(아내에게) 그동안 애썼소. 요즘 내가 열심이 일하게 돼서 다행이다. 늘 고맙게 생각하고 살고 있다오, 고마워."


이순재: "아내가 어려움을 참고 극복해줘서 오늘날 내가 있는 거다."


이순재: "자식들에게도 다정한 아버지는 아니었다. 지금껏 아이들 키우는 문제 역시 전적으로 아내에게 일임했다. 우리 아이들은 아버지 덕을 못 봤다. 1960~70년대 한창 성장기에는 내가 한 달에 집에서 자는 시간이 일주일도 안 됐다. 아이들과 목욕탕이나 운동회 한번 제대로 가본 적이 없다. 평생 불평 한마디 없이 아이들을 키워낸 아내가 고맙다."


사실 예전 시대에는 이순재처럼 가장은 바깥에서 돈만 벌어오는 존재였죠.

그런 시대적인 상황속에서 이순재나 최희정은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이순재 역시 연기자이긴 했지만, 외도나 불륜 등의 구설수에 오른 적이 한번도 없었기에 부인에게 믿음을 주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 이순재 정치 입문 계기와 열린우리당 이상수와의 인연


이순재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흥미롭습니다.

자신의 영화와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가 남을 위해서였죠.


이순재: "사실 정치도 내가 하고자 해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어. 당시 탤런트협회장이던 이낙훈에게 5공정권으로부터 비례대표 제의가 왔어. 획기적인 일이었지. 국회에 배우를 대표하는 인물이 들어간 것은 처음이었다 이 말이야. 그때는 대중문화예술에 대한 정치·사회적 인식이 형편없던 시절이어서 정말 반가운 소식이었지."


이순재: "이낙훈이가 가까운 사이인 나한테 도와달라며 같이 당으로 들어가자고 하더라고. 필요하다니 도와줘야지. 굳이 내가 국회에 나가지 않더라도 당에서 열심히 일하면 정치적으로 예술인들을 도울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어. 사람들이 연예인 출신이라고 낮춰 볼까봐 당에서 더 열심히 일한 것도 있었지."


이순재: "그런데 13대 국회에 가서 소선거구제가 실시되면서 선거구가 많아지니까 사람이 많이 필요해졌어. 당시 사무총장이던 심명보 씨가 넌지시 송파 쪽 선거구에 나가라는 거야. 나는 이북 사람이어서 서울에는 연고도 없고, 선거는 돈이 있어야 하는데 재산이라고는 아파트 한 채밖에 없었거든."



이순재: "고민하다 제주도에 촬영 때문에 내려가 9시 뉴스를 보는데 후보자 명단이 지나가. 송파에 내 이름이 없기에 ‘다행이다’ 생각했는데, 가나다라마바사 지나가고 지읒, 중랑갑에 내 이름이 딱 나오는 거야."


이순재: "깜짝 놀랐지만, 당에서는 “대통령이 도장 찍은 거니까 하자” 이거야. “나는 돈이 없다” 했더니 “얼마면 되느냐”고 그래. 체면이 있으니 “얼마 줄 거유?” 그럴 수는 없잖아?(웃음) 선거구인 면목동에 갔더니 그때는 완전 변두리 시골이야. 내가 선거에 열의를 안 보이니 남들이 지원 안 하는 지역에 갖다 박은 거지."


사실 서울 중랑갑은 당시까지 여당(1988년 민주정의당)이 한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던 선거구였습니다. 이순재는 그냥 머릿수를 채우기 위한 존재였던 것 같네요.


당시 유력 상대 후보는 이상수였고, 결국 이상수가 당선되죠.

그런데 이순재의 잠재성을 알아차렸는지, 4년 후에 여당(1992년에는 민주자유당)이 다시 이순재를 후보로 공천합니다.


결국 이순재는 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때 이상수 후보와 인연이 만들어졌는지, 2006년 이상수가 재보궐 선거에 열린우리당으로 출마했을때, 이순재가 선거후원회장을 하게 됩니다.



* 이순재 정계 은퇴


이순재는 국회의원을 단 한번만 하고 정치를 은퇴, 연예계에 복귀합니다.

그의 은퇴 이유가 의미심장하네요.


이순재: "정치는 인간사회에서 최고의 예술이라고 하잖아? 정치가 국가를 보호하고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는 가장 실질적인 주체야. 정치가 복리와 후생을 통해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혜택을 주면 이게 최고의 예술 아냐? 그런데 한국에서 정치를 하려면 본인과 가족의 행복은 포기해야 해."


이순재: "대권 운운하는 사람은 사돈의 팔촌의 행복까지 포기한다는 정신으로 해야 한다는 거지. 빌붙어서 뭐 하나 해먹으려고 하면 정치가 제대로 안 돼. 오늘날 한국정치가 자리를 못 잡는 것도 그것 때문이고. 나는 8년 동안 지역구에서 뛰었지만 한 번도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어. 스트레스가 이루 말할 수 없어. 그래서 그만뒀어. 하늘이 파래도 파란 것을 느끼지 못하고, 꽃이 아름다워도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고. 동네 어디에 불만 나도 내 책임인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지."


이순재: "정치는 내 직업이 아니거든. 국회의원은 자의든 타의든 국가가 불러서 봉사하는 직종이야. 그때 내가 60대였는데, 내 동창 중에서 대통령이 나오는 마당에 내가 한번 더 하면 뭐 할 거유? 정한용 같은 후배들이 들어오니 우리 직업군을 대표할 인물은 생긴 셈이었지. 그러고 나는 본업이 연기잖아? 60대면 중요한 전기이니 내 기력이 쇠하기 전에 돌아와 연기자로서 내 자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지. 드라마로 국민을 즐겁게 해주는 것도 정치 못지않게 기여하는 것이기도 하고…. 사실 정치를 하려고 해도 돈이 없어 못하겠더라고."


확실히 한국에서는 제대로 된 정치가라면 가족의 희생이 불가피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치가 너무 대립 위주고, 조정의 개념이 없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하네요.

이제는 대립보다는 화합 위주로 변화되어야, 좀 더 좋은 정치인들이 많아지고, 또 그것이 좋은 정치로 이어질 것 같습니다.



* 이순재 후배들에 대한 일침


마지막으로 이순재는 우리 사회와, 후배 연기자들, 그리고 정치적인 문제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숨기지 않습니다(이순재 별명 미스터 쓴소리).

보통 구설수를 두려워해서 민감한 문제에 대하여 언급을 회피하거나, 얼버무리기 쉬운데, 이순재는 그렇지 않죠.


(후배 연기자들에 대한 충고, 이순재 일침)

이순재: "가끔 보면 봉고차(연예인들이 주로 타는 밴)를 타고 와서 자기 분량만 연기하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친구들이 있어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거침없이 하이킥’ 할 때는 그 노련한 나문희씨하고도 수없이 대사와 동선을 맞췄어요. ‘욕망의 불꽃’ 하면서도 늘 촬영에 들어가기 전 신은경씨와 서너 번 정도 대사 맞추는 건 기본이었죠. 연기는 톱스타 혼자 하는 원맨쇼가 아닙니다. 집단의 조화가 반드시 이뤄져야만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거예요."


이순재: "나는 신인 시절 연극반 친구들과 발성·발음부터 연습했죠. 선천적 자질도 중요하지만 결국 연기도 훈련이에요. 빙판에서 수천 번 쓰러져야 김연아 선수가 되는 것처럼 연습하면 실력이 늘 수밖에요. ‘나’라는 소재로 여러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것, 내 세계를 구축한다는 것은 거저 얻을 수 없어요. 김태희씨는 최형인 교수에게 지도를 받는다는데, 부족하면 노력해야 연기자죠. 우리 때는 선배들 앞에서 책읽기를 두세 시간씩 했어요."



* 이순재 천안함 폭침과 이석기 사태에 대한 입장


(천안함 폭침에 대한 입장)

이순재: "(천안한 폭침에 대한 의혹을 다룬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 상영중지에 대해) 천안함 사건은 불과 엊그제 얘기 아닌가요. 영화를 안 봐서 평을 할 순 없지만, 역사를 다루려면 사실에 입각하는 건 기본입니다. 엄연히 증명된 사실을 지금 무슨 근거로 뒤집어엎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순재: "(이석기 사태를 매카시즘에 비유하는 주장에 대해)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매카시즘이 통할 나라인가요. ‘독재적 속성’이 남아 있다면 몰라도, 현역 대통령을 두고 ‘쥐새끼’라고 욕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민주주의를 유지하려면 법치가 강력해야 하는데, 지금은 법이 너무 물러진 것 같아요. 이번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몰라 후에 결론을 봐야 알겠지만, 관찰하는 제3의 시민 입장에선 우려되는 게 사실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세끼 밥 먹고 누릴 것 다 누리면서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건 안 되죠. ‘반(反)정부’는 할 수 있어도 ‘반대한민국’은 안 되는 겁니다."



사실 이순재의 정치적인 스탠스가 보수쪽이지만, 이런 그의 발언을 보면 온건 보수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진보쪽의 스탠스를 가진 장진 감독 역시 이렇게 평하죠.


장진: "나와 생각이 다른 부분이 있을 것 같아 걱정했지만, 대화를 나눠보니 이순재는 굉장히 건전한 보수였다."


다만 정치적인 부분에서는 여전히 혜안이 부족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본인 역시 자신의 그런 역량이 부족함을 깨닫고 국회의원을 더 이상 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요.



* 이순재 4대강 찬성과 가우디 찬양


흥미로운 사실은 이순재가 지난날 이명박의 4대강 사업에 대하여 적극 찬성했다는 점입니다(2011년).

이순재: "옛부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산에 나무가 무성하고 강에 물이 풍부하게 흐르면 우리 삶도 풍부해진다’고. 4대강 사업이 바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유유히 흐르는 강물 따라 곳곳에 새로운 문화가 생기고 새로운 행복한 삶의 터전이 만들어질 겁니다."


그런데 2013년 예능 꽃할배(꽃보다 할배)로 스페인으로 여행을 가서는 가우디의 건축물을 보고는 격찬을 합니다.




이순재: "(스페인에서) 좋은 걸 많이 봤습니다. 특히 가우디의 건축물들을 보면서 우리도 이제부터 건물을 짓거나 물건을 만들 때 1백 년 후까지 내다볼 필요가 있겠다 싶었어요. 20세기 초에 만든 건축물이 1백 년 동안 한 도시를 먹여 살리지 않았습니까. 긴 안목으로 미래를 내다보고 후손들을 위해 아름다운 부가가치를 창출해내는 것이 우리 세대가 해야 할 몫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여든이 가까운 사람이 불과 2년만에 삶의 철학이 바뀔 가능성은 별로 없고, 아마 이순재는 4대강 사업의 본질(인위적으로 물길을 막아서 물을 저장)과 가우디의 건축 철학(나무, 하늘, 구름, 바람, 식물, 곤충 등 자연을 관찰하여 건축에 응용함, 자연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그의 건출물은 자연과 조화를 이룸)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래서 사람은 아무리 유명해도 자신과 관련이 없는 분야, 그리고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 이순재의 인생에 대한 깨달음


어쨌든 이순재는 여든살동안 아내와 해로하면서, 삶에 대해서는 하나의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순재: "결혼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지만 조건도 중요해요. 아무리 사랑해도 열흘 굶으면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조건보다 중요한 건 됨됨이에요. 악하거나 독하거나 게으른 사람은 피하고 창의적이고 부지런하며 성격이 밝은 사람은 가까이 해야죠. 후자의 사람이라면 어려운 조건을 극복할 수 있거든요. 무엇보다 자녀에 대한 책임을 절감해야죠. 부부 사이는 책임과 신의로 유지해 나가는 것이니까요."


이순재의 말을 잘 살펴보면, 조건 역시 중요하다는 현실적인 인식을 밑바탕에 깔고, '사람의 됨됨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됨됨이가 좋은 사람이라면 어려운 조건 역시 극복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고요.

결혼을 앞둔 젊은 사람들이라면 눈여겨 볼 말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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