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용 윤혜영 러브스토리 및 인생이야기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이 정부와 언론에 대해서 실망하고 있습니다. 사실 거기에는 뿌리깊은 이유가 있는데, 대부분 그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표면적인 현상만 비판하고 있죠.
만약 뽀빠이 이상용 사건을 제대로 알면,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상용은 일개 연예인에 불과하지만, 우리 사회의 정치, 언론, 대중 의식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건의 중심 인물이기 때문이죠.
덧붙여, 이상용의 개인적인 노력과 아내 윤혜영과의 결혼 이야기도 한번 살펴볼만 합니다.
이상용 가족 사진(이상용 아들과 딸들)
방송연예인 이상용은 1944년 4월 2일 충청남도 서천군에서 태어납니다(이상용 고향). 올해 71살이죠(뽀빠이 이상용 나이).
(이상용 종교) 천주교
(뽀빠이 이상용 키는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대략 160cm가 안되는 것으로 알려졌죠.)
(이상용 학력 학벌) 대전 삼성국민학교, 한밭중학교, 대전고등학교, 고려대학교 임학과, 중앙대학교 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석사
(이상용 프로필 및 경력) 1973년 MBC '유쾌한 청백전' 게스트로 데뷔
이후 '모이자 노래하자'라는 어린이 프로그램으로 아이들의 우상이 되었고, '우정의 무대'로 군장병들과 전국민의 인기를 얻습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탄압으로 연예계 생명이 끝장나고 말았죠.
이상용 젊었을때 사진(리즈 시절)
이상용은 출생부터가 남달랐습니다. 태어난지 3개월만에 생매장될 뻔했죠.
이상용: "일제 말기(1944년) 일자리를 얻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내가 세상의 빛을 보기 전 일이다. 돈벌러 간 남편이 감감무소식이자 어머니는 이리저리 수소문을 했다. 북한 회령땅이라는 소식을 듣자 어머니는 뱃속에 있는 아이(이상용)의 아버지를 찾기 위해 충남 서천에서 백두산까지 무작정 걸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배가 고프면 나무뿌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허기를 채웠다. 뱃속의 아이가 영양공급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허약아를 낳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상용: "약 한달 보름을 걸어서 회령땅에 도착한 어머니는 임신 8개월에 접어든 상태였고, 아버지는 젊은 여자와 딴살림을 차린 상태였다."
이상용: "결국 어머니는 홀로 친정집 부여로 향했다. "뱃속에 있는 아이는 낳는대로 시댁에 갖다주고 재가를 해라."라는 집안 어르신들의 호통만이 어머니를 반겼을 뿐이다.
누구도 축복해주지 않는 가운데 내가 태어났다. 숨소리조차 고르지 못한 병약한 나를 돌봐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외가에서는 맑은 영혼을 하늘로 돌려보내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미숙아로 태어난 이상용은 누가 보기에도 곧 숨을 거둘 병자처럼 보였습니다.
결국 생매장 당하게 되었죠.
이상용: "구덩이속에 던져진채 모래흙에 반쯤 잠길무렵 16살 여중생이던 이모가 나를 구출했다. "갓난 아기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는 거여." 이모는 울부짖으며 나를 구덩이속에서 꺼내 안고 천보산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나를 살려주지 않으면 함께 목숨을 끊겠다며 산속에서 일종의 농성을 했다. 그렇게해서 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이상용: "10살이 될 때까지 20가지가 넘는 병을 치렀다. 밥보다 약을 더 많이 먹었다. 산모가 허약했으니 아이가 병약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니의 젖이 나오질 않자 밭에서 일하던 동네 아주머니들이 번갈아가며 젖을 물렸다. 왜 그랬는지 몰라도 아주머니들은 나를 친자식처럼 예뻐했다. 그들은 "용이는 꼭 살려야 해"라고 하면서 내게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아마 오늘날의 의학용어로는 영양실조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임산부가 영양 보충을 잘해야 하는데, 나무 뿌리만 씹어먹었으니, 태아에게 제대로 영양분이 공급되지 않았죠.
이상용: "(초등학교 다닐때) 걸어서 통학하는 것도 피곤하고 힘겨웠다. 난 친구도 없는 바보 외톨이와 같았다. 체육시간이면 아이들은 펄펄 날았다. 궁짓기(술래잡기)를 하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용기를 냈다. 마침내 아이들과 뒤섞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해질때까지 술래를 해야만 했다. 나보다 뜀박질이 느린 아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엘레꼴레 머시매가 지지배보다 느리데요~" 아이들의 비웃음에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러나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다. 난 그때 '사나이는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고 다짐했다."
이상용: "그날 이후 아이들은 어떤 놀이에도 껴주지를 않았다. 나와 놀면 재미가 없다고 했다. 친구들과 멀어지는 것은 죽기보다도 싫었다. 뙤약볕에 쪼그리고 앉아불러주기를 바라는 나를 그들은 친구로 맞아주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운동장 모래알을 친구삼아 수업시간에 배운 글자를 쓰고 지우며 그들 곁에 머물렀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땀을 뻘뻘 흘리며 축구를 하던 아이들이 집에 가자며 내게 다가왔다. 엉덩이의 먼지를 털고 일어서려는 순간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상용: "그날 이후 난 그들의 책보따리를 지켰다. 그래도 마냥 즐거웠다. 함께 어울리지는 못해도 난 그들의 친구가 됐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상용은 어릴 때부터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면서 자랍니다(왕따). 그나마 책보따리를 지켜주는 역할로 그들 근처에서 서성거릴 수는 있었죠.
이상용인 6살되던 때 아버지가 다시 돌아왔지만, 그리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아버지가 종종 딴 여자와 살림을 차렸기 때문이죠.
그나마 장남이고 종손이었기에, 집안 어른들로부터는 관심을 받습니다.
이상용: "초등학교 3학년때 삼촌이 아령을 사다줬다. "머시매는 몸이 건강해야 해. 그래야 넘들이 얕보지 않는 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운동을 했다."
이상용: "고1이던 60년 '미스터 대전고'에 출전해 인기상을 탔다. 이듬해에는 '미스터 충남'에 도전해 또 인기상을 받았다. 앞가슴 근육을 키우고 몸만들기에 열중했다. 고3이던 62년 드디어 '미스터 대전고'에 뽑혔다."
미숙아였고, 친구들 사이에 제대로 끼지도 못할 정도로 허약했던 이상용의 놀라운 변신이 아닐 수 없네요. 역시 사람의 노력으로 안되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상용은 고려대학교에 입학해서 응원단장까지 됩니다. 비록 키는 작지만, 보통 학생들이 서로 아는 척하려는 인기있는 자리이기도 하죠. 또한 고대 ROTC가 되어서 장교가 될 훈련까지 받습니다.
이상용은 원래 약하고 힘이 없었는데, 스스로 노력을 해서 이런 건강한 몸을 만들고, 또 남들이 먼저 다가오게 만들 정도로 매력적인 자리에 스스로의 노력으로 앉기도 하죠.
정말 대단한 의지와 노력입니다.
서울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이상용에게 어느날 사랑이 찾아옵니다.
고향의 이웃집 죽마고우 계집아이가 계기가 되었죠.
이상용: "대학축제의 단골손님으로 불려다닌 나는 키는 작아도 박력과 유머 넘치는 응원단장이었다. 60년대 여대생들이 나를 모르면 간첩이던 시절이었다.
수소문끝에 문자(어릴 적 친구)의 언니인 진숙누나의 서울 자취집을 알아냈다."
이상용: "(문자와 함께) 남산으로 올라가면서 어린시절 바닷가 얘기를 꺼냈지만, 문자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키작은 내가 부끄러웠는지 그녀는 꼭 한발 앞서 걸었다. 얼른 뒤따라가 웃음보따리를 풀어놓으면 딴전을 피웠다. 최고급요리인 자장면을 대접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1시간도 지나지 않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고리타분한 시골타령은 그만해." 앙칼진 목소리로 찬바람 날리며 쌩하니 사라지는 그녀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아마 이상용의 키가 너무 작아서 실망을 했나 봅니다.
이상용: "다음날 그녀 집으로 다시 찾아갔다. 20년 동안 간직해온 사랑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집에 없는데 어쩌지. 헛걸음을 했구나. 자주 놀러오렴." 문자가 아닌 낯선 여인이 애처로운 듯 나를 내려다봤다. 늘씬한 키에 보석처럼 빛나는 미소를 가진 그녀는 진숙누나의 친구인 혜영누나였다. 그날 이후론 문자가 아닌 혜영누나를 보러 그 집을 들락거렸다."
바로 현재의 아내 윤혜영이죠. 어릴 적 죽마고우 문자 언니의 친구였습니다. 현재 너무 쌀쌀맞게 변한 문자보다는 이렇게 다정하게 구는 여자에게 자연히 관심이 가게 되죠(나이는 이상용보다 1살 연상).
이상용: "맘씨좋고 인정많은 혜영누나는 나를 친동생처럼 귀여워했다. 연애편지 심부름을 시키기도 하고 귀찮게 하는 남자가 있으면 체격좋은 동생이 있다며 겁을 줬다."
이상용: "사랑은 갑자기 찾아오는 것일까, 오누이처럼 붙어다니던 어느날인가 내 눈빛은 변해 있었다. 수다를 떨며 생기발랄하게 웃는 그녀를 훔쳐보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그녀 속으로 빠져들다가 그녀와 눈빛이 마주치면 홍당무처럼 얼굴이 빨개졌다."
그렇게 이상용의 사랑은 시작되었고, 마침내 이상용은 결심을 합니다.
윤혜영을 자신의 집으로 유인한 다음에 거짓말을 한 것이죠.
이상용: "누나, 큰일났어. 간첩이 나타났는지 전국에 비상령이 내려졌대."
결국 윤혜영은 이상용의 거짓말때문에 이상용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됩니다. 이상용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밤새도록 설득을 했고, 마침내 연인관계가 됩니다.
하지만 둘의 결혼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이상용: "보잘 것 없는 나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그녀 집안이 발칵 뒤집힌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집안도 변변치 못하고 출세길도 보이지 않는 키작은 사위를 반길리 없었다. 아내는 나 하나만 믿고 보따리를 챙겼다."
이상용: "66년 2월 25일 졸업하고 3월 5일 대전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3월 9일 광주기갑학교에 입학하기 전 유성의 만년장호텔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3일동안 우리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예정된 헤어짐을 슬프게 맞이했다."
(이상용 부인 윤혜영, 이상용 배우자)
(ROTC 장교로 임관한 이상용은 군대에서 전차소대장을 역임했고, 문선대 활동도 함)
사실 윤혜영은 170cm의 늘씬한 키에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TBC 3기 탤런트 출신(여배우 윤여정의 동기)이기도 하고, 신문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정도의 재원이었죠.
하지만 군대간 남편을 끝까지 기다립니다.
이상용: "69년 제대하자마자 닥치는대로 일을 시작했다. 아내는 미혼으로 속이고 신문사 사업부에서 근무했다. 미처 기업체 입사니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할 겨를이 없었다. 대전 고향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상용: "낮에는 화장품 외판원을 하고 밤에는 봉투에 풀칠을 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다했다. "뼈빠지게 일해 자식공부 시켜봤자 소용없는 거여. 대학 나왔다고 다 출세하는 것은 아니구먼." 대전시내에 소문이 났다. 서울에서 공부하고 고향에 와서 하는 일이 겨우 행상노릇이냐는 것이었다. 내가 파는 물건은 잘 사주지도 않았다. 대전에 발 붙이고 살 수가 없었다."
딸을 낳은 윤혜영 역시 결혼 사실이 들통나서 신문사에서 나와야 했죠.
(이상용 윤혜영 부부에게는 딸 외에도 아들 이제륜이 있습니다. 이상용 자녀 자식)
이상용 아들과 며느리 등의 가족 사진
어쨌든 대전에서도 행상을 할 수 없게된 이상용은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어물전 날품팔이, 오징어 장사, 리어카 땅콩 장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합니다. 그러다가 답답한 마음에 점쟁이를 찾아가게 되죠.
이상용: "당신은 재주있는 사람이오. 밑천 안드는 장사를 하면 성공할 겁니다."
점쟁이 말을 꼭 믿은 것은 아니지만, 이상용은 이미 고대 시절 응원단 단장과 군대에서 문선대 활동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과 기쁨을 준 경험이 있었습니다. 결국 연예인을 한번 해보자는 생각에 방송국에서 일하는 선배들을 찾아갑니다.
이상용: "당시 MBC TV의 ‘유쾌한 청백전’을 담당하고 있는 PD가 마침 대전고 선배(유수열 PD)였다. 그 선배는 “명문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연예계로 들어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타일렀다. 그래도 끈질기게 찾아가서 조르자 ‘유쾌한 청백전’에 나와서 장기자랑을 해보라고 출연기회를 주었다. 그는 고려대 응원단장 시절 개발한 ‘타잔박수’를 선보였다."
이상용: "고향 선배인 변웅전 아나운서에게도 매달렸다. 73년 1월 19일 구봉서, 배삼룡, 서영춘 씨 등 일류스타들의 틈바구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장기란 장기는 모두 선보였다. 알통을 자랑하고 벽돌을 깨고 가슴근육을 움직였다. 5회정도 출연하고 나니 서서히 '뽀빠이'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상용은 시작했고, 곧 시금치와 뽀빠이 아저씨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어린아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었죠.
그리고 잘 알려진 것처럼 우정의 무대 등을 통해서 더 큰 사랑과 인기를 얻게 됩니다. 이상용의 재능은 방송과 MC 쪽에 있었던 것이죠.
이상용: "난 참 독한 사람이에요. 한 번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목숨 걸고 합니다. 지금까지 술과 커피는 한방울도 입에 대본 적이 없어요."
이상용: "어떤 모임에든 웃기는 일은 자신이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레퍼토리가 3만2천개쯤 되거든요. 대학 노트 40권에 꽉 차 있어 아무 거나 잡아도 소재가 나옵니다."
이상용: "언변과 아이디어는 주로 신문과 책에서 나와요. 신문을 보다가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은 따로 스크랩을 해놓죠. 책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보지만 비장의 무기는 사서삼경이에요. 이제까지 사서삼경을 스무번쯤 읽었죠. 그런 고전을 토대로 개그를 만들어야 말에 뿌리가 있고 진리가 담기기 때문이죠."
재능도 있지만, 노력 역시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상용은 키도 작고 얼굴도 미남이거나 아주 웃기게 생긴 것도 아니기에 방송에 적합한 외모는 아닙니다. 하지만 본인의 노력으로 그런 난관들을 모두 극복한 것이죠.
게다가 더 대단한 것은 성공한 이후에도 어려운 이웃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상용: "1970년대 중반, 심장병에 걸린 한 어린이가 부모와 함께 찾아왔다. 수술비가 없다기에 함께 서울대병원에 갔다. 수술비가 1800만원이라는 말에 기절할 뻔했다. 당시 열 평짜리 아파트 값이 1110만원이었고 나는 사당동 독채 전세 650만원에 살고 있었다. 내 나이 30대 초반 때다. 나는 “(심장병 수술) 기술이 없어 못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돈이 없어 죽는다면 안된다. 수술하쇼!”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자신의 전세금 3배에 달하는 수술비를 선뜻 지원하겠다고 나선 것이죠.
보통 사람들은 결코 할 수 없는 일 같습니다.
이상용: "그 길로 명동에 있는 야간업소 사장을 찾아가 사정했다. 결국 세 업소의 진행자로 출연하기로 하고 석 달치 봉급을 선불로 받아 수술비를 댔다. 나는 차 없이 야간에 이 술집 저 술집을 동분서주해야 했다. “집도 없는 주제에 남의 자식 수술해준다고 집세의 세 배나 되는 돈을? 미쳤어!” 무릎에 이상이 생겨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놨다가 많이 혼났다."
아마 평범한 집같았으면, 이혼 사유가 되었을 겁니다. 윤혜영은 화를 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상용을 용서해 주었네요.
하지만 일은 점점 더 커져갑니다.
이상용: "그런데 얼마 후 심장병 수술을 한 어린이의 아버지가 방송에서 뽀빠이가 무료로 수술을 해줬다고 밝히면서 우리 집에 전국의 심장병 어린이가 수술을 해달라며 모여들었다.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워 그들을 설득해 한국어린이보호회를 만들어 한 명씩 수술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상용: "그 약속을 지켜 1987년 국민훈장 동백상, 가톨릭봉사대상 등을 탔다. 사람들은 나를 두고 국회의원에 나올 거라고 했다. 난 하느님과 약속했다. 정치 근처에도 안 가겠다고. 그러나 MBC TV <우정의 무대>가 전국적인 사랑을 받으면서 내가 국회의원에 출마하면 무투표로 당선된다며 여기저기에서 꼬셨다. 그럴수록 정치가 싫어졌다."
(우정의 무대를 진행하는 이상용, "엄마가 보고 플때 엄마 사진 꺼내놓고~"라는 노래가 나올 때쯤엔, 온 시청자들이 같이 눈시울을 붉히곤 했죠.)
사실 이상용은 체질적으로 정치를 싫어하는 사람이고, 또한 그에게는 신성한 약속이 있었습니다.
이상용: "80년 4월1일 로마에 가서 교황을 알현했다. 그때 교황에게 우리나라에 평생 어린이를 위해 사셨던 방정환 선생님이라고 계셨는데, 그분처럼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교황은 저더러 그렇다면 절대로 정치는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약속을 한다면 3일동안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천주교인인 제게 교황과의 약속은 하느님과의 약속과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정치를 멀리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심장병 어린이를 돕던 이상용에게 검은 손길이 다가옵니다. 바로 1996년 당시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이었죠. 김현철은 당시 소통령이라고 불릴 정도로 위세가 막강했고, 사회 사업가로 명성이 높은 이상용을 내보내기만 하면 국회의원으로 당선될 수 있다고 계산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국회의원 공천 제의에 이상용은 단번에 거절을 하고, 그것이 권력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결국 근거도 없이 권력 기관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상용: "1996년 11월3일은 나에게 6·25전쟁과 같은 날이다. <우정의 무대> 화천 녹화가 끝나고 돌아오니 언론에 내가 아주 죽일 놈으로 보도되어 있었다. 심장병 어린이 수술 기금 횡령 혐의를 받고 있으며, 벤츠600을 타고 다니고, 40억원짜리 집에 살고, 심장병 어린이를 한 명도 수술하지 않았다는 기사였다."
(정말 소설 같은 기사죠.)
(당시의 소설같은 기사들의 일부. 한국의 거의 모든 신문사와 방송들이 이런 소설을 써댔음)
이상용: "너무나 억울했지만 나를 모함한 자가 언론을 쥐락펴락하고 있으니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죽고 싶었다. 난 20년간 지프차를 타고 다니고 지금 살고 있는 40평짜리 빌라의 융자금은 작년에야 상환이 끝났다. 그리고 1996년까지 25년간 수술받은 심장병 어린이는 567명이었고 그중 13명이 생명을 잃었다."
이상용: "하루아침에 방송에서 퇴출된 나는 집 밖을 못 나갔다. 3개월 만에 무죄판결이 났지만 판결 결과는 어느 신문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처음 오보를 낼 때는 단 한 명의 기자도 내게 확인조차 하지 않고 썼으면서 말이다. 사람들은 내가 감옥에 간 줄로 알 것 아닌가. 환장할 것 같았다. 좋은 일 한다고 수술해주고 욕 먹고 나쁜 놈 되고…."
이상용: "아버지는 내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돌아가셨다."
(이상용 공금횡령 누명 사건)
이때의 충격으로 이상용은 왼쪽 눈이 실명이 됩니다.
얼마나 원통하고 억울했으면 이렇게까지 되었을까요.
(후에 마음을 편히 먹으니 다시 시력이 돌아옴)
아무튼 당시의 권력 기관들이 총동원되어서 심장병 어린이 재단을 탈탈 털었지만, 이상용의 공금 횡령은 전혀 없었습니다. 애초부터 사실무근이었고, 대부분의 돈이 이상용의 개인 재산으로 운용되었던 재단이었기 때문이죠.
김영삼 정권의 민낯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권력자는 할 일을 하지 않고, 늘 선거에서 이길 생각만 했으며,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괘씸죄를 걸어서 사회적으로 매장을 시켜버리죠. 권력놀음에 빠져서 경제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으니, IMF 관리 체제가 필연적이지 않았나 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국민들이 당했고요.
어쨌든 한국에서의 방송 생명이 끝난 이상용은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서 관광버스 가이드를 하면서 먹고 삽니다.
모두들 이상용을 외면할 때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스님 등은 그래도 그를 믿고 지원합니다.
이상용: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추기경님이 오셔서 “눈이 덮였으니 쓸지 말고 떠나라. 봄이 오면 눈이 녹고 너는 나타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고 수중에 남은 돈 20만원을 가지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관광버스 안내원을 하는 등 갖은 고생을 하면서 1년 만에 귀국하여 딸을 시집보내면서 한참을 울었다. 남 돕는 일은 다시는 안 하겠다고 다짐했다."
오늘날 우리 한국에 대해서 실망하는 국민들이 많습니다.
특히 언론의 권력 지향적인 보도를 비판하지만, 왜 언론이 그렇게 권력 지향적인지, 그 이유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네요.
불과 17년 전에 이렇게 권력자에 의해서 우리 사회의 좋은 사람이 생매장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기자들은 신나게 '소설'을 써댔죠.
(위에서도 언급한 당시의 소설: 이상용이 벤츠600을 타고 다니고, 40억원짜리 집에 살고, 심장병 어린이를 한 명도 수술하지 않았다는 기사)
그런데 이런 소설을 쓴 기자들은 이후 승승장구해서 현재는 각 방송국과 신문사의 국장과 본부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 행동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당연히 '권력자의 비위를 맞춘 것이 백번 잘했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들의 후배들 역시 그렇게 출세한 선배들을 보면서 똑같은 생각을 할 것입니다.
언론이 그렇다면, 일반 대중이라도 이상용같은 사람을 보호했어야 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더 많아지고 서로 돕는 사회가 되려면, 그를 지켰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일반 대중 역시 이상용을 외면하고 말았죠.
만약 일반 대중이라도 이상용의 '이상용 공금횡령 누명 사건'의 진실을 알고, 당시 '소설'을 써댄 기자들을 퇴출시켰다면,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제대로 된 사회가 되지 않았을까요?
지금 한국 사회의 언론과 정치 수준은 그냥 우리 사회 현실의 반영일 뿐입니다. 언론과 정치를 욕하기전에, 그냥 우리 사회의 추한 일면을 제대로 직시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네요.
마지막으로 이상용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이상용: "솔직히 지금도 원수를 용서하라는 성경 구절을 이해할 수 없지만 나중에 알아보니 나 아프게 하고 자신은 호의호식하던 사람은 끝이 안 좋았다. 아프고 망한 뒤 세상을 떠났다. 대나무가 마디를 형성하려면 아픔이 겹쳐 바람소리에 운단다. 요즘 나는 보너스로 인생을 살고 있다."
욕심을 버린 이상용은 현재 행복한 것 같습니다.
보답을 바라고 남을 돕지 않기에, 오늘도 기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남편과 평생을 같이해온 윤혜영 역시 대단한 것 같습니다.
다만 그런 이상용을 지키지 못한 우리 사회는, 오늘도 불행한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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