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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 여가수 이야기

장은숙 결혼 남편 실패와 간통사건

이전 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가수 장은숙의 간통 불륜(?) 사건에 대하여 억울한 이유에 대하여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이가 많은 팬들은 종종 장은숙의 스캔들 사건을 기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은숙 불륜 댓글

이 부분을 짚기 전에, 장은숙이 결혼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한 본인의 해명부터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스폰서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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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숙: "결혼하고 싶은 남자가 있었지만, 시어머니 되실 분이 나의 직업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셨다. 비록 시아버지 되실 분은 나를 예뻐하셨지만, (시어머니 때문에) 반대가 심했다."

장은숙: "어느날 갑자기 그 남자와 연락이 끊겼다. 나중에 알고봤더니, 나 몰래 외국 유학을 떠난 것이다."

장은숙: "(그 남자가 외국에서 결혼까지 하고 돌아왔기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미친 아이처럼 방황을 하면서 술을 마셨다."

장은숙: "또한, 약을 있는대로 먹다보니, 자살 미수가 되기도 했다."

처음부터 장은숙이 독신주의자였던 것은 아니고, 이렇게 남자로부터 배신을 당한 다음에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게 된 것이죠.(가수 장은숙 이혼 재혼, 가수 장은숙 남편 전남편 등이 루머인 이유)



그리고 장은숙은 1995년에 일본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사실 그 전인 1988년 장은숙이 간통 혐의로 구속이 되기도 하는데, 당시 장은숙이 많이 억울해했죠.

장은숙: "이씨 (장은숙의 상대남)가 이혼 서류까지 보여줘서, 그가 이혼한 것으로 믿었었다."

장은숙: "(이씨가 이혼하지 않은 것을 알고) 지난 2개월 동안 이씨를 멀리하자, 앙심을 품은 이씨가 부인과 짜고 간통 혐의로 고소한 뒤, 고소 취하를 미끼로 1억원을 요구하고 있다."

사실 수많은 연예인들이 단지 그들이 유명하다는 이유로, 협박같은 것을 많이 받고 있죠.

아무튼 이런 일들을 겪은 다음에, 장은숙은 남자와 결혼할 생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닌가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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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들을 전후하여 장은숙의 한국에서의 인기도 많이 시들해졌기에, 장은숙은 일본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사실 당시 한국 가요계에서는 세대교체 바람이 불었는데, 아마 장은숙이 이때 일본으로 진출하지 않았다면, 가수라는 직업을 버렸거나, 혹은 미사리 라이브카페 가수로 변하지 않았을까 하네요.


아무튼 장은숙은 일본에서 신인가수로 출발합니다.
오전에는 일본어 공부를 위하여 학교에 다니고, 오후에는 노래 레슨을 받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게 되었죠.

장은숙: "한국인으로서 일본어 발음중에서 어려운 것은 'za, zi, zu, ze, zo'와 '쟈, 지, 쥬, 제, 죠'의 발음이었어요."

장은숙: "내 노래안에 'naze(왜)?' 'kaze ni yureru(바람에 흔들린다)' 'tada muchuude(단지 열중해서)'라고 하는 가사가 있는데, 이런 부분들때문에, 굉장히 고생했어요."

한국에서는 매니저가 모든 것을 케어해주는 생활이었지만,
일본에서의 신인가수 (혹은 그 이전의 연습생) 시절에는 장은숙 혼자 지하철을 타고 다녀야 했고,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해야 합니다.

장은숙의 나이가 37살에, 이렇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것은 정말 대단한 것 같네요.


장은숙: "1995년 (장은숙이 처음 일본 노래를 발표한 해)도에 <유메노가케라>를 발표했어요. 그 때 도로에서 사과 박스같은 상자위에 올라가서 제 신곡을 부르면서 캠페인을 했는데, 지나가던 한국인 모녀가 저를 알아봤어요."

장은숙: "(그 한국인 모녀가 저에게) "가수 장은숙씨 아니세요? 왜 여기서 이러고 있으세요? 한국으로 돌아가세요. 여기서 이렇게 고생하는거 보고싶지 않아요." 라면서 CD 한장을 사주셨는데, 전 그날 밤에 눈이 붓도록 울었어요."

이후 장은숙의 노래는 일본에서 꽤 큰 인기를 얻었는데, 갑자기 장은숙의 소속사였던 '토라스레코드'가 도산을 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장은숙은 '테이치쿠레코드'와 계약을 맺었고, 나중에는 본인의 회사를 차려서 일본에서 활동을 이어나갔죠.

이후 장은숙은 '장수(チャン?ス?)'란 예명을 사용하다가 나중에는 본명을 사용하게 되는데, 일본에서는 확실히 성공한 한국 가수중의 한명이 됩니다.


'운명의 주인공'이 25만장이 판매가 되었고, 일본 각지에서 열리는 노래자랑대회에 최다 초청가수로 참석할 정도로 인기가 높고, 또한 매해 연말이면 도쿄의 아카사바의 브릿츠홀에서 정기콘서트를 열기도 하니까요.

그럼에도 장은숙은 종종 한국으로 와서 활동을 합니다.

장은숙: "전 한국인이니까요.  제 음악인생의 마지막 무대는 한국이에요. 그리고 (언제나) 한국말로 된 제 노래를 부르고싶어요."

장은숙: "저는 일본에 있으나 한국에 있으나 제 피는 한국사람이니까요."

사실 일부 사람들은 장은숙이 일본에서 돈을 많이 벌고 있는데 굳이 왜 한국에서 활동을 하는지 의아해하기도 하는데, 이런 이유가 있었네요. (가수 장은숙 근황)

현재도 장은숙은 일본에서 적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고, 또한 2003년에 설립한 연예기획사 ‘오피스 장수’의 대표로서 후배 양성도 하고 있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가수 활동 시절이나, 일본 진출했을 때의 여러가지 사건과 고난이 많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 현재 성공의 밑거름이 된 것이 아닌가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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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장은숙에 대한 두번째 글입니다.

첫번째와 세번째글은 아래와 같습니다.


[미혼 여가수 이야기] - 가수 장은숙 나이와 성형- 눈과 눈 사이

[미혼 여가수 이야기] - 장은숙 노래듣기 - 과거 영상과 일본어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