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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신성일 엄앵란 결혼 년도와 더불어 당시 사회의 반응이 무척 흥미롭네요.

둘의 결혼 생활과 인생은, 각자의 어린 시절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신성일 엄앵란 이미자)

이미자에 대한 포스팅 (새창보기)

이미자 남편 김창수와 딸 정재은- 전략적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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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 신성일 어린 시절에

* 신성일이 배우가 된 계기는

* 한국 영화에서 신성일이 차지하는 비중

* 신성일의 화려한 여성 편력

* 신성일 엄앵란 결혼년도


유라준의 특별한 이야기


영화배우 겸 전 국회의원 신성일(본명 강신성일, 원래 이름이 강신영이고 예명이 신성일이었는데,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위하여 본명을 아예 강신성일로 개명함)은 1937년 5월 8일 대구에서 태어납니다(신성일 고향 대구). 올해 79살이죠(신성일 나이).

(신성일 종교) 불교

(신성일 키 혈액형) 174cm, A형

(신성일 학력 학벌) 대구 수창국민학교, 제일중학교, 경북고등학교 졸업,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사

(신성일 프로필 및 경력)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


이후 맨발의 청춘, 강화도령, 청춘은 목마르다, 밀회 등 수많은 히트작을 남깁니다.


2000년 제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공천(대구 동구)으로 당선되어서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합니다.


신성일 엄앵란 사진


* 신성일 어린 시절에


어린 시절에 신성일은 무척 가난하게 성장합니다.


신성일: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 그 이후에 어머니와 할머니로부터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 들으면 안 된다"는 말과 "잘생긴 만큼 인물값 해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랐다."


신성일: "원래 어렸을 때는 내가 공부를 못하지 않아서, 명문대에 들어가서 의사나 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홀로 우리를 키우셨는데, 고등학교 2학년때 어머니가 꾸려가던 산통계가 깨지는 바람에 집에 빚쟁이들이 몰려왔다. 결국 (빚쟁이들에게) 흡씬 두들겨 맞고 빈손으로 서울에 올라오게 되었다."


신성일: "어머니와 함께 청계천에서 호떡 장사를 했다. 당시 오물이 둥둥 떠내려가는 청계천의 한쪽 구석이었는데,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나중에 (배우로 성공한 뒤에) 판자촌이나 해방촌 등을 가면, (나처럼) 집안이 갑자기 망해서 그쪽으로 온 아이들이 눈에 띄더라. (내가 그런 경험을 했기에) 딱 보니 알겠더라."


신성일 젊은시절 사진(신성일 젊었을때 사진)


* 신성일이 배우가 된 계기는


신성일: "엄청 고생을 하다가 우연히 한국배우전문학원에 들어갔고, 그 다음에 신상옥 감독이 운영하던 '신필름'에서 배우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신상옥 감독이 '뉴스타 넘버 원'이란 뜻으로 예명을 '신성일'이라고 지어주셨다."


신성일: "사람들은 내가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벼락스타로 생각하는데, 사실 밑바닥 생활부터 다졌던 배우이다. 1960년 1월1일에 개봉한 영화 '로맨스 빠빠'가 히트했지만, 이후 4, 5년 동안 별다른 작품에 출연 못하기도 했다."


신성일: "그때는 사무실에 나가서 신상옥 감독 대신에 전화를 받기도 했다. 그 덕분에 영화계 인사들이나 영화 담당 기자들과도 많이 친해졌다. 전화를 받으면서 목소리를 기억했다가, 나중에 반갑게 인사하기도 했다. 그 당시에 영화계에서 필요한 인맥과 실무경험을 얻었다."


신성일 리즈시절 사진(신성일 젊었을때 사진)


이후 신성일은 1960년대의 한국 영화 부흥기때 톱스타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1년에 60편의 영화 주인공을 맡았고, 총 507편의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하게 되었죠.


신성일: "625가 끝난 후 1960년대부터 잘살기운동이 펼쳐졌는데,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만한 것은 영화밖에 없었다. 당시 극장은 냉난방도 안되고 화장실 악취도 심했는데, 그래도 사람들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울고 웃으며 위로를 받았다."



* 한국 영화에서 신성일이 차지하는 비중


신성일: "난 배우란 몸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시로 운동을 하면서 체력을 관리했다. 그래서 하루에 촬영장을 오가며 8편의 영화를 한꺼번에 찍는 상황에서도 촬영 펑크를 내거나 과로로 쓰러지지 않았다. 잠은 그냥 이동하는 차안이나 촬영 대기할 때 잠깐씩 잤을 뿐이다."


실제로 60년대, 70년대의 신성일은 정말 대단한 존재였습니다.

대중은 그에게 열광했고, 수많은 영화에 겹치기 출연을 하는 그에게 싫증을 내면서도 그가 출연하는 영화를 꾸준히 관람했던 것이죠.


박찬욱(영화감독): "일찍이 이토록 한 사람(신성일)에게 영화산업과 예술이 전적으로 의존했던 나라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무했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신성일을 이해하지 않고는 한국의 영화사는 물론이거니와 한국의 현대문화사 자체를 파악할 수 없다."



* 신성일의 화려한 여성 편력


그런데 신성일은 무명배우였을 때부터 여성편력이 화려했습니다.


신성일: "1960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내 첫사랑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나는 초짜 배우였는데, 동료가 광화문에 있던 한 다방의 마담을 소개시켜줬고, 그 마담이 다시 '혜화동 여인'을 소개시켜줬다. 데뷔 후에 '여자와 키스신도 제대로 못 하면서 무슨 영화배우냐'는 자책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혜화동 여인의 유혹을 거부하지 않고 사랑에 빠졌다."


신성일: "내 첫사랑은 8살 연상이었는데, 모 기업 회장의 젊은 후처였다. 그 여자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았다. 어느날 촬영장에 가니까 목에 진한 키스마크가 있었다. 그걸 본 촬영장의 여배우들이 심하게 놀리더라."(신성일 첫사랑 재벌 후처와의 연애)


신성일: "그 키스마크 사건 이후에 엄앵란이 나에게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기 시작했다."



엄앵란 과거 사진


* 신성일 엄앵란 결혼년도


결국 신성일은 엄앵란과 결혼하게 되는데, 당시 엄앵란 역시 굉장한 스타였습니다.(신성일 엄앵란 결혼)


둘은 1964년 11월 14일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신성일 엄앵란 결혼년도)


신성일: "당시 우리 결혼식을 보려고 전국에서 몰려든 팬들이 3천 4백명에 달했다. 당시 워커힐 호텔이 사람들로 붐벼 발 딛을 틈도 없었다."



그런데 사실은 신성일과 엄앵란의 결혼에는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당시 다른 여배우와 문제가 얽힌 삼각관계였죠.


또한 엄앵란 집안은 신성일과 달리 오래전부터 음악과 연기를 했던 집안이었습니다.


신성일 엄앵란에 대한 이야기가 2편으로 이어집니다. (2편 새창보기)

엄앵란 젊은시절,엄앵란 집안과 죽고 싶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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