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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 불륜 외도

현미 남편 이봉조 이혼사유와 간통죄-현미 며느리 원준희

현미 이봉조 러브스토리 및 인생이야기

현미 남편 이봉조와의 결혼 이야기는 일반인들의 상식에서 벗어난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사실 현미는 이봉조의 본부인이 아니었고, 이봉조에게는 조강지처와 자식들이 따로 있었죠.


다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도 대개 그들의 결혼 생활을 굉장히 평면적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 남녀의 입장과 더불어 제 3자의 증언 역시 같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미 남편 사진


가수 현미(본명 김명선)는 1938년 1월 21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납니다(가수 현미 고향). 올해 77살입니다(가수 현미 나이).

(가수 현미 종교) 개신교

(가수 현미 학력 학벌) 덕성여자대학교 가정학과 명예 졸업

(가수 현미 프로필 및 경력) 1957년 미8군 무용수로 데뷔해서 활동합니다.


그리고 1962년 밤안개로 정식 가수로 데뷔했고, 이후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없이, 무작정 좋았어요, 몽땅 내사랑 등의 대표곡을 남깁니다.


(가수 현미 가족관계) 노사연(조카딸), 이무송(조카사위), 한상진(조카), 박정은(조카며느리), 아일리(조카딸)

큰아들 이영곤(고니로 가수 활동), 둘째아들 이영준 (둘째 며느리 원준희(가수)) 등으로 연예인 집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현미 가족 사진


그동안 현미의 남편은 작곡가 이봉조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둘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고, 이봉조에게는 본부인인 노전숙(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현미는 방송에서 결혼과 이혼, 남편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현미: "결혼 전에 남편에게 아이가 두 명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결혼을 했다. 하지만 결혼 후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아이가 두 명이 더 있다는 것을 알게돼 충격을 받고 집을 나왔다."


현미: "하지만 (작곡가인) 남편 때문에 내가 노래를 부를 수 있었고, 여전히 존경한다."



사실 현미가 오늘날에도 이름을 남기는 유명한 가수이지만, 한때 이봉조는 그보다 더 유명한 스타 작곡가였습니다. 그의 손에 의해 키워진 가수가 현미를 비롯해서 최희준, 윤복희, 정훈희 등이 있었으며, 이봉조 TBS 악단 및 KBS 악단 단장을 역임하면서 가요계에 큰 영향력을 미쳤고, 1972년에는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받기도 합니다.

(이봉조 1931년 5월 1일생, 현미보다 7살 연상)


정훈희 사진


이봉조는 노전숙을 1951년에 만나 연애를 했고, 1956년 정식 결혼식을 올립니다(이봉조 아내, 이봉조 부인).

(원래 노전숙은 이화여고를 졸업했고, 이화여대를 진학하지만 6.25때문에 졸업하지는 못합니다.)

(이봉조와 노전숙이 이혼을 하지 않았기에, 이봉조 전처(전부인) 등의 말은 사실상 맞지 않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봉조 노전숙 부부는 1957년과 58년 연년생으로 딸을 낳습니다(이봉조 자녀 자식)(이봉조 딸 이름은 이영숙, 이영미).

(이봉조 노전숙 사이의 자녀는 아들과 딸이 한명 더 있는데, 이부분은 밑에서 언급)


이런 상황에서 노전숙은 청천벽력같은 사실을 알게 됩니다.

노전숙: "둘째딸을 낳았을때 사람들이 심상찮은 상황을 귀뜸해 주었어요. 남편에게 여자가 생겼다고... 물어물어 사무실로 찾아가서 현미씨를 만나서 사정을 했어요. 처자가 있는 분이니 제발 관계를 청산해 달라고요."


노전숙: "그랬더니 "딸만 둘 있으시대죠?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그러더니 현미씨가 휙 나가버려요."


그후로도 노전숙은 여러번 현미를 찾아가서 애원과 호소를 했지만 별무소용이었습니다.


이봉조 부인 노전숙 사진(네명의 아이들과 함께한 가족 사진)


현미는 이봉조와 더불어 사실혼 관계(실질적인 부부생활)를 유지하면서 아들을 낳습니다(현미 배우자, 현미 남편). 

바로 1962년에 고니(큰아들 이영곤의 가수 예명)와 둘째 아들 이영준을 낳죠(현미 자녀 자식)

그런데 현미의 말은 노전숙과 좀 다릅니다


현미: "21세에 처음 그분을 만나 3년 동안 진하게 연애를 했다. 당연히 총각이라 생각했고 이봉조가 아이 둘 딸린 유부남이란 사실을 전혀 몰랐다."


현미: "그러다 임신 7개월이 됐을 때 이봉조의 본처가 찾아와 자신의 남편이 유부남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 때 그분에게(이봉조의 본처) '저는 몰라요. 결혼하자고 해서 청혼을 받았고, 지금 임신 7개월째에요. 결혼하자고 하면 할꺼에요'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분을 너무 가슴 아프게 한거 같아 후회가 된다."



현미와 노전숙의 말이 서로 다릅니다.

사실 인간은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기억하기에, 이런 미묘한 차이점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진실은 하나죠.


현미 젊은 시절 과거 사진


현미 미 8군 무용수 시절(위 우측)

현재는 많이 늙었지만, 현미 리즈 시절 매우 뛰어난 외모와 몸매로 이름을 날립니다.

당시 미 8군 무용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죠.



현미가 큰아들 이영곤을 1962년에 낳을 때, 본처 노전숙도 아들 이영대를 1962년에 낳습니다(같은 해이지만, 이영대의 생일이 12월 15일이기에 거의 1년 정도 차이가 남).

그리고 현미가 둘째 아들 이영준을 낳고, 후에 노전숙이 막내딸 이지수를 낳게 되죠.


즉, 이봉조는 동시에 두집 살림을 했고, 본처인 노전숙은 남편에게 첩이 있다는 사실을, 현미 역시 (만약에 그녀의 말대로 첫째 임신 7개월까지 이봉조가 유부남이란 사실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이봉조에게 본부인과 자식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동거 생활을 했다는 뜻이죠.



그렇게 세남녀의 두집 살림이 계속되다가, 1974년 현미와 이봉조는 이혼(?)을 하게 됩니다. (사실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별거라고 해야겠죠).


그런데 그 원인이 좀 웃깁니다. 현미가 남편을 본부인에게 돌려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봉조가 바람이 났기 때문입니다.

(후에 현미가 남편을 본부인에게 돌려보내기 위해서라고 인터뷰를 하는데,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당시 이봉조는 가수 김추자와 함께 일본 여행을 떠났다가 현미로부터 결별 선언을 듣게 된 거죠. 이때 언론에 발표된 것으로, 두 사람은 완전한 이혼이 아니라 별거로 공식 발표를 합니다.



현미: "남편과 헤어지자고 했더니 ‘그럴 바엔 여기서 죽자’며 칼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러는데 어떻게 집문서를 가지고 나오겠냐. 어떡하면 도망갈 수 있을지만 고민했을 정도로 무서운 위협을 당했다. 아파트 정문에서 숨어있기도 했다."


현미: "부부사이를 청산하는데 따라 자식들에게 미칠 부작용을 생각해 냉각기를 갖는 것으로 결정을 지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언론에서는 이봉조의 본부인이 현미로 알고 있었습니다. 노전숙이 전혀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좀더 보충하면, 이봉조의 여자관계는 현미외에도 복잡했습니다.

현미: "질투도 많이 했다. 어린 나이에 싸움도 많이 하고 울었다. 그래도 엄앵란 씨하고 항상 우리가 잘난 사람하고 사니까 50%로만 차지하면서 감사할 줄 알자라는 말을 하곤 했다."


현미: "새벽에 전화가 오곤 했다. 호텔에 이봉조씨와 어떤 여자가 들어갔다고. 그러면 나는 내 남편은 내가 관리하니까 이런 전화 하지 말라고 했었다. 그는 내 남편이고 내 스승이니까 내가 보호했다. 그래서 기자들도 나를 열녀라고 했을 정도다."



그러다가 이봉조는 1987년 심장마비로 급사하게 됩니다(이봉조 사망원인, 이봉조 사망이유).


현미: "별거에 들어가면서 남편에게 본처에 들어가 살라고 했지만 들어가지 않고 13년간 홀로 살았다. 남편을 찾아갔을 때는 당뇨로 수척해져 이후 남편에게 반찬도 해주고 방문했다."


현미: "이후 다시 재결합(재혼)을 하기로 약속했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헤어지지 말고 더 이해하면서 살았으면 좋았을걸...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현미와 이봉조, 노전숙간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고, 당사자들의 증언에도 거짓말(혹은 모호한 기억)이 섞여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기란 매우 힘듭니다.

하지만 현미와 노전숙간에 일치하는 증언이 있죠.



노전숙: "아이들 아빠께서도 제가 뭐라 그러면(두집 살림이나 다른 여자 문제), 묵묵부답 고개를 떨구고 가만히 계셔요. 그땐 저도 젊었으니 누차 만류하면서 화도 냈지요. 소용이 없는 것 같더군요."


현미: "두 집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왜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냐고 따졌다. 당시 남편이 나를 놓칠까봐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또한 제3자 역시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신성일: "당시 상황은 이랬다. 60년대 이봉조가 유부남인지 모르고 사랑에 빠진 현미는 이봉조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둘이나 낳고 키웠다. 하지만 어느 날 이봉조의 본처가 늦둥이를 낳았다는 소식이 날아들었고 현미는 그길로 짐을 싸 초등학교 6학년·4학년인 두 아이와 함께 아내(엄앵란)의 집으로 찾아왔다. 남자에게 버림받고 빈털터리가 된 현미를 안쓰럽게 여긴 아내(엄앵란)가 은행에서 자신의 신용으로 대출을 받아 현미에게 같은 단지 내 아파트를 마련해줬다."


1974년, 75년 무렵의 일입니다. 현미가 아이들과 함께 가방 하나만 들고 나타났다니, 이봉조가 칼을 들 정도로 급박했다는 현미의 말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네요. 또한 신성일은 이봉조의 우유부단함을 탓합니다.


신성일: "나는 평소 이봉조가 진주 출신의 ‘사나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미와 자식들을 못 본 채 하는 그의 처신은 사나이답지 못했다. 자신의 말대로 본처와 헤어지던가, 아니면 현미와 아이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했다. 아무리 형이라고 불렀지만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어느 모임에서 이봉조와 마주쳤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이봉조를 노려봤다. “형, 왜 그렇게 책임을 못져? 동생한테 맞아봐야 정신차리겠어!” 그가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신성일 역시 이봉조로부터 '본처와 헤어진다는' 말을 들은 것 같네요.


신성일: "이봉조는 그 사건 후 나만 보면 피해 다녔다. 그리고 얼마 후인 87년 8월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나 역시 현미에게 애처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남자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얼마나 고생을 심했을까. 지금도 가방 하나와 두 아이를 데리고 온 그녀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후에 이렇게 신성일과 같은 연예계 동료나 기자들에게도 이런 내막이 퍼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봉조의 본처 노전숙과 아이들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이봉조가 죽은 이후에 노전숙이 전격적으로 언론과 인터뷰를 했고, 현미가 첩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죠.


노전숙 가족이 인터뷰를 하게 된 원인은 이렇습니다.

이영숙(이봉조의 큰딸): "영대(이봉조 노전숙의 아들, 서울대 법대 재학중 사법시험에 차석 합격함)가 고시에 합격한 후 연수원에서 연수를 받는데, 동료 한 사람이 그러더래요. 너희 엄마 가수지?"


워낙 이봉조와 현미 커플이 유명했기에, 사회 생활을 하는 이영대가 자칫하다가는 자신의 어머니가 바뀔 위기에 처해집니다. 결국 이들 가족이 어쩔 수 없이 나서서 내막을 밝힌 것이죠.

이봉조 아들 이영대 변호사 사진


이제 사건을 정리해 보면, 여기의 가장 큰 책임자는 이봉조였습니다.

본처와 자식들이 있는데도 거짓말로 속이면서 당시 처녀였던 현미와 동거 생활을 합니다. 본인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게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노전숙과 현미, 그리고 자식들)이 상처를 받았습니다.


한 사람의 잘못된 행동이 얼마나 큰 피해를 초래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봉조, 현미, 노전숙에게는 잘못이 있을지 몰라도 아이들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봉조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책임을 회피했죠.


노전숙: "남편의 부고장에 현미에게서 낳아진 두 아들의 이름도 다 넣었다. 그러나 호적에는 네 자녀뿐이다. 이봉조가 그쪽 두 아들의 입적 문제를 거론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현미의 두 아들은 호적때문에 상당 기간 고통을 받게 됩니다.

남녀간에 실수를 해서도 안되지만, 실수를 한 뒤에는 뒷수습을 책임져야 하는데, 이봉조는 완전히 못본 척을 해버렸네요. 



두번째는 현미의 잘못 역시 큽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현미는 중요한 말을 합니다.

현미: "(이봉조가 바람을 피워서) 부부사이를 청산하는데 따라 자식들에게 미칠 부작용을 생각해 냉각기를 갖는 것으로 결정을 지었다."


자기 자식이 중요하면, 남의 자식 역시 중요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현미는 왜 몰랐을까요?

또한 자신이 이봉조의 바람기때문에 시달리면서, 왜 노전숙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했을까요?


단순히 다른 사람의 입장으로만 생각하면 되는 '간단한 사실'을, 대부분의 인간들은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노전숙 역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혹자는 남편이 불륜(외도)를 저지르는 와중에도 4명의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웠다고 칭송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노전숙은 굳이 남편과 현미를 간통죄 등으로 고소하지 않습니다. 아마 간통죄를 처벌을 하면, 실질적으로 이혼을 해야 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노전숙 역시 배운 여성인데, 좀 더 과감하게 행동하지 못했던 것은 많이 아쉬운 것 같네요. (물론 아이들의 정서를 위해서 그랬다고 하면, 본인은 어머니란 이름으로 너무 큰 희생을 치룬 것이 아닌가 합니다.)


또한, 이봉조와 현미가 헤어진 후에 이봉조가 혼자 살다가 심장마비로 급사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 이봉조의 마음은 노전숙으로부터 훨씬 전에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 부부의 자세한 내막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정도였다면 아무리 아이들의 아버지라고 하더라도, 과감하게 보내줄 필요가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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