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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윤제균 감독 부인(아내)유영이와 윤제균 일베 아버지 이야기들

윤제균 유영이 러브스토리 및 인생 이야기

윤제균 감독이 한국 최초로 쌍천만 감독(뜻- 천만 영화 2번)이 되면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윤제균의 개인적인 생각, 그리고 그의 인생의 굴곡사 등이 흥미롭네요.


특히 윤제균은 자신만의 성공법칙 5가지를 공개했는데, 꼭 영화인이 아니더라도 사회 생활을 할때 좋은 길잡이가 될 것 같습니다.



영화감독 윤제균은 1969년 5월 14일 부산에서 태어납니다(윤제균 고향). 올해 47살이죠(윤제균 나이).

(윤제균 출신 학교 학력) 사직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학사

(윤제균 프로필 및 경력) 2001년 영화 '두사부일체'로 영화감독에 데뷔


이후 영화 색즉시공, 1번가의 기적, 해운대, 국제시장 등에서 메가폰을 잡았고, 7광구, 댄싱퀸 등에서는 제작을 담당하게 됩니다.


특히 해운대와 국제시장이 나란히 천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윤제균은 쌍천만 감독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됩니다.


# 목차

* 어린 시절

* 윤제균 감독 부인 유영이 직업 학생(윤제균 아내 유영이)

* 윤제균 감독 이혼 위기

* 시나리오 작가 데뷔 계기

* 영화 감독 데뷔 계기

* 윤제균 성격

* 결국 자만심에...

* 윤제균 감독 일베 의혹

* 5가지 성공 법칙



* 어린 시절


먼저 국제시장을 통하여 윤제균의 가정 환경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윤제균: "국제시장은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바치는 영화이다. 내가 대학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런데 아버지가 퇴직 후 주식 투자 실패로 가세가 기울었다. 돌아가실 때 유언이 ‘미안하다’였다."


원래 윤제균 아버지는 상고를 졸업한 다음 입사한 외국계 가전업체 한국지사의 임원까지 지내게 됩니다. 이런 사회적인 성공이 말년의 주식 투자 실패로 빛이 바라게 되었죠.



윤제균: "임종 때는 그 의미(아버지의 유언, 미안하다)를 잘 몰랐는데 돌이켜볼수록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때 ‘아버지 그래도 고맙습니다’는 말을 못한 게 응어리가 됐다. 이후에 사회생활에서 첫 실패를 겪을 때 가장 사랑하는 존재(아들)를 얻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윤제균 감독 아버지)


윤제균은 부유한 가정 환경속에서 살다가 아버지의 주식 투자 실패 이후로 무척 가난속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사랑과 존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평범한 아들, 딸들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윤제균 감독 사진


* 윤제균 감독 부인 유영이 직업 학생(윤제균 아내 유영이)


윤제균은 대단히 어렵게 대학에 들어갑니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를 잘했던 윤제균은 서울대 법대를 지망했지만, 연거푸 2년 낙방하게 됩니다.

결국 삼수 끝에 고려대 경제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죠.



윤제균: "대학을 삼수 끝에 들어갔어요. 나이 많이 먹고 대학에 갔으니 가자마자 바로 군대에 갔죠. 다행히 제가 ‘육방’이어서 별 티는 안 났지만..."



그리고 현재의 부인 유영이(이름)를 만나게 됩니다.

당시 유영이는 신문방송학과 학생이었는데, 단과대(정경대)의 유명한 ‘퀸카’였죠.


윤제균: "복학 직후 짝사랑에 빠졌는데 그 대상이 신방과에 다니던 동기 여학생이었습니다. 지금 제 와이프죠(웃음). 게다가 저는 그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한참 어려웠던 시기였어요."


윤제균: "나도 아내도 첫사랑이었고 순진했던 시절이라 인연이 이루어질 수 있었지, 지금 같으면 구질구질한 삼수생 선배와 신입생 퀸카의 만남은 불가능했을 거에요."


이후 둘은 7년 동안 연애를 하다가 1998년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윤제균 감독 배우자 와이프 유영이)


둘은 아들 2명을 두게 됩니다.

(윤제균 감독 자녀 자식)(윤제균 가족관계)



참고로 한때 윤제균 이혼, 윤제균 재혼 등의 루머가 떠돌기도 했는데, 이것은 이들 가정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의 뜬소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밑에서 언급하지만, 윤제균은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운 시기를 겪었고, 그때 그의 아내 유영이가 네일아트까지 하면서 내조를 했던 관계였죠.


* 윤제균 감독 이혼 위기


아무튼 당시 한국에 외환위기가 닥쳤고, 곧바로 둘은 경제적인 위기에 처해지게 됩니다.


윤제균: "당시 아내는 결혼 직전까지 가전제품 제조업체에 다녔는데, 그만 구조조정 대상이 되어서 실직을 했어요. 당시 제 연봉은 1800만원 하던 때였죠."


1998년이면 윤제균이 서른한 살때이고, 이제 직장 생활 2년차일 때네요(광고회사 LG애드의 전략기획실에서 근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윤제균은 삼수로 대학 생활을 늦게 시작함)


윤제균: "당시 회사가 어려워서 전 직원이 돌아가면서 한달간 무급휴가를 가지게 되었어요. 집에서 실직한 아내와 붙어 있어야 했는데, 그러다 보니 다툼의 횟수가 잦아졌어요. 이러다간 헤어지겠구나 싶었죠."


부부싸움끝에 윤제균은 이혼의 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결국 그는 골방으로 들어갑니다.



윤제균: "돈 없이 할 수 있는 게 글 쓰는 일밖에 없더군요. 시도 쓰고 소설도 쓰다가 안 돼서 포기하고 영화는 원래 좋아했으니까 시나리오를 써보려 했죠. 나만의 영화 한 편을 만들어보자 했던 게 시작이었습니다."


광고회사도 영상 제작은 영화와 비슷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윤제균은 전략기획실에서 근무를 했기에 영화는 전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윤제균: "제가 '신 하나당 1분, 120신이면 2시간짜리 영화 한 편이 된다', '하루에 10신씩 일기쓰듯, 12일이면 한 편 완성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매일 열심히 시나리오 작업을 했어요."


윤제균의 첫번째 작품 내용은 본인이 겪었던 신혼여행에서의 에피소드입니다.

IMF 직전 회사에서 경비 반액을 지언해주는 단체 신혼여행으로 홍콩을 다녀왔는데, 그때의 경험이 주가 되었고, 또한 당시 읽고 있었던 법의학 관련 서적의 아이디어 '부부가 신혼여행을 갔는데 신랑이 살해되고 범인은 신혼여행객 중에 있다'가 주요 모티브가 됩니다.



* 시나리오 작가 데뷔 계기


한달뒤 윤제균은 다시 회사로 복귀했고, 자신이 완성한 시나리오는 금새 잊고 맙니다. 그러다가 약 1년 뒤 우연히 영화잡지에서 공모전을 봤고, 윤제균이 제출한 시나리오가 대상에 당선됩니다.


윤제균: "당시 태창흥업시나리오 공모전, 당선작이 3000만원이었어요. 처음 든 생각은 3000만원이면 아내 모르게 결혼 전 대출한 1500만원을 갚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죠."


윤제균: "(당선된 다음에) 삼수해서 대학에 입학했을 때보다 기뻤습니다. 저의 영화에 대한 재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 체한 것처럼 마음에 얹혀 있던 대출문제를 한 방에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이 시나리오는 2000년 3월 나홍균 감독에 의해 '신혼일기'로 개봉됩니다.



윤제균의 시나리오 당선 소식이 알려지고 회사내에서도 윤제균은 전략기획실에서 카피라이터로 발령이 납니다. 윤제균의 재능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죠.


* 영화 감독 데뷔 계기


이후 벤처 열풍과 맞물려 윤제균은 퇴사를 하고 영화계에 본격 투신합니다.

그리고 벤처기업 심마니에서 팀장을 맡아 엔터펀드 사업을 진행합니다.


그런데 윤제균의 경력을 잘 아는 영화 제작사 사람들이 윤제균에게 인사치레삼아 '좋은 시나리오가 있는지' 물었고, 윤제균은 평소 자신의 생각을 말합니다.


윤제균: "써놓은 것은 없는데, 쓰려고 하는 것은 있습니다. 조폭이 공부하러 학교에 가는 거에요. 대학교수인 매제인 아이디어를 줬는데,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 중에 ‘(폭력)조직’ 출신인데 손을 씻고 공부하러 온 친구가 있다는 거에요."


이것이 바로 윤제균의 두번째 시나리오인 두사부일체입니다(윤제균 감독 영화 첫번째).

그런데 영화 제작 계획은 세워졌지만, 감독과 출연 배우를 구하는데 난항을 겪게 됩니다.


윤제균: "눈앞의 3000만원(원고료)도 날아가는 듯 싶었어요. 결국 영화사 대표에게 “제가 감독하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제안했어요. 어차피 “서른셋, 한번 실패한다 해도 내 인생의 기회는 한 번은 더 돌아올 거야.”라는 믿음이 있었죠."


당시까지 윤제균은 전략기획쪽으로 주로 일을 했었기 때문에 영화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죠.

하지만 윤제균은 단순히 무대포 정신만 가지고 도전하지는 않았습니다.


윤제균: 제 전공(전략기획팀 출신)을 살려서 ‘빵빵한’ 기획서를 만들었고,  ‘데모 테이프’도 첨부했어요. 2주 동안 ‘대부’ 같은 갱영화 50편을 끊고 붙이고 15분짜리로 만들어 “이렇게 찍겠다”고 했죠. 그러니까 영화사 대표도 “좋다. 믿어보겠다. 너를 위해 투자하겠다”고 했어요."


보통 영화 입봉을 하기 위해서는 외국 유학을 갔다오고, 조감독으로 몇년 고생을 한 다음에 겨우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윤제균은 자신에게 온 기회를 최대한 잘 살렸네요.


윤제균: "일단 배우 섭외가 가장 힘들었어요. 저를 믿고 출연해줄 배우가 없었기 때문이죠. 결국 정준호를 찾아가 설득에 설득을 거듭했어요. ‘나는 영화에 대해 잘 모르지만 같이 공부하면서 해보자’라고 말했고, 결국 정준호가 승낙을 했어요."(윤제균 정준호)


당시 윤제균은 조감독 경력도 없는 생짜 신인 감독이었습니다.

아마 윤제균이 인간적인 면으로 본인의 진정성을 드러냈기에, 정준호를 비롯한 배우들이 출연 결심을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 윤제균 성격


그런데 이런 성향은 훗날 윤제균의 매우 독특한 경향으로 나타납니다.


윤제균: "보통 신인 감독들은 더러 배우나 스태프와 갈등을 겪는데, 나는 그런 적이 없다. 갈등이 생기면 도와달라며 무릎 꿇고 운다(웃음). 나처럼 ‘비굴한 감독’은 처음 봤다고들 한다. 그러면 어떤가. 영화만 잘되면 된다."


윤제균이 농담삼아 하는 말이긴 한데, 그에게는 권위 의식은 전혀 없는 것 같네요.


윤제균이 진짜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이렇습니다.

"제가 처음 메가폰을 잡았을 때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대신 한 번도 ‘아는 척’한 적은 없습니다. 막내 스태프가 있든, 주연 배우가 있든 모르는 건 각 분야를 맡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물었어요. 어차피 감독은 사람들을 아우르면서 방향을 잡아가는 디렉터예요."


확실히 윤제균은 처음부터 이런 태도를 취했죠.



"그래서 저는 세상 사람들 누구나 영화감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잘살았던 적도 있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친구 집에 얹혀 살아본 적도 있어요. 영화를 시작한 뒤에도 밑바닥에도 떨어져봤고 해운대의 성공 이후 구름 위에 떠 있을 때도 있었고요. 잘됐다고 우쭐댈 필요도, 안 된다고 힘들어할 필요도 없어요. 처해진 상황으로 상대를 판단하기보다는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진심으로 대하면 뭐든 된다고 봐요."


이것이 바로 윤제균이 굴곡 많은 영화판에서 버텼던 원동력이었던 것 같네요.



물론 윤제균에게도 불만은 있습니다.


윤제균: "사실 제 영화도 메시지가 있는데 사람들이 그런 것엔 너무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요. 그래서 마음 아플 때가 많죠.  <두사부일체>는 상문고 사태를 다룬 영화거든요. 전 93년부터 상문고 사태에 관심을 갖고 지켜봤습니다."


보통 윤제균 감독의 영화에 대하여 평론가들이 작품성이 없다고 비난을 하는데, 윤제균은 자신의 첫 작품부터 섭섭함을 토로하네요.



윤제균: "당시 머리 희끗희끗한 선생님이 울면서 인터뷰하는 장면을 TV로 보면서 저건 안될 일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물론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면 <닫힌 교문을 열며>라는 형태가 될 테지만, 그 주제를 전 제 스타일로 만들어낸 거죠."


어쨌든 조직 폭력과 사학 재단의 문제점을 다룬 두사부일체는 블록버스터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 사이에서 350만명을 동원하면서 흥행에 성공합니다(2001년).


2002년에 윤제균은 '색즉시공'을 연출했고, 이 영화는 다시 해리포터2와 반지의 제왕2와 맞붙어서 400만명을 돌파하면서 흥행에 성공합니다.


윤제균: "연애시절 아내의 낙태 체험을 넣었다. 남자들은 낙태를 할 때 여자가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를 모른다. 그게 너무 싫었다. 실수를 했을때 따뜻한 말한마디가 아닌 여자친구의 낙태를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것이 싫었다."


이렇게 윤제균은 알게 모르게 사회적인 메세지를 던집니다.


* 결국 자만심에...


아무튼 외국의 대작들과 맞붙어서 연이어 흥행에 성공했기에 윤제균의 자만심은 하늘을 찌르게 됩니다.


윤제균: "흥행에선 내가 최고다!"



그리고 윤제균은 세번째 영화 낭만자객을 찍는데, 겨우 94만명으로 처참하게 실패하고 맙니다.


윤제균: "당시“운 좋게 잘 나가던 놈이 보기 좋게 나가떨어졌다”는 주위의 시선이 싫었다. 돌아보면 웃던 투자자들도 발길을 딱 끊었다. 이제 더 보여줄 것도, 내 재능도 다한 것이 아닌가라는 좌절감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했다."



결국 윤제균은 3년이 지나서야 겨우 재기를 하게 됩니다.


윤제균: "이번엔 흥행보다 “실패해도 후회스럽지 않은 영화를 만들자”고 마음먹었다. 모두 다 외면할 때 손을 잡아준 배우가 ‘색즉시공’에서 만난 하지원이었다."


1번가의 기적(2007년)은 관객수 260만명을 기록하며, 윤제균이 재기했음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리고 윤제균은 선택의 순간을 맞게 됩니다.


윤제균: "사실 영화 ‘1번가의 기적’을 끝내고 나니 제 앞에 두 갈래 길이 있었어요. 그나마 감사하게도 한국 영화계에서는 제가 투자를 받을 수 있는 ‘몇 명’의 감독에는 속하는 사람이니까 쉽게 투자 받아서 무난히 코미디를 할지, 아니면 해보고 싶었던 것을 할지 갈등을 했어요."



확실히 윤제균은 2번의 성공 후에 한번의 처참한 실패를 했고, 다시 겨우 재기에 성공한 상태였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안정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하네요.


윤제균: "하지만 저는 크리에이터고, 크리에이터에게는 ‘유지’라는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전진 아니면 도태죠. 그런데 도전하지 않는 크리에이터는 도태된다고 봐요. 그래서 힘들겠지만 계속 도전하기로 했던 거예요."



* 윤제균 감독 일베 의혹


이때 윤제균이 만든 영화가 바로 그의 첫번째 천만 관객 영화 해운대였습니다.

그런데 이 해운대 역시 우여곡적끝에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윤제균: "본격 촬영에 들어가기 몇 달 전부터 제작부가 먼저 일을 시작해요. 10년 영화 일 하면서 처음으로 제작부를 해산시켰어요. 도저히 진행이 힘들겠더라고요. 나만 믿고 6개월 동안 돈 한 푼 못 받고 일했던 30여 명을 자른 그날 밤에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몰라요."


즉, 투자를 못받아서 해운대는 크랭크인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좌초하게 되었죠.


윤제균: "그런데 그로부터 꼭 일주일 뒤에 기적처럼 투자 결정이 난 거예요. 다시 그 친구들을 불러서 같이 저녁을 먹는데 눈물이 나서 울고…, 다 같이 울었어요."


이후 해운대가 성공하고, 윤제균이 제작을 맡았던 7광구는 폭삭 망하기도 하는 등의 굴곡을 겪기도 합니다.



그리고 윤제균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바치는 헌정 영화 국제시장이 다시 천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쌍천만 감독이 됩니다.


국제영화를 둘러싸고 한국 사회는 정치적인 논쟁을 벌이지만, 윤제균은 이에 대해 한발 비껴서 자리합니다.


윤제균: "나는 진보도 보수도 아니다. ‘국제시장’은 ‘12세 이상 관람가’ 가족 영화다. 아버지를 기리며 만든 영화라 어설픈 정치 메시지를 넣고 싶지도 않았다. 도식적으로 섞을 순 있지만 그건 더 비겁하다고 봤다."(윤제균 정치 성향 고백)


확실히 국제영화는 정치색을 완전히 뺀 영화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둘러싼 논쟁은 무의미해 보이네요.


또한 유제균 일베 루머 역시 똑같은 이유로 쓸모없는 의혹같습니다.



* 5가지 성공 법칙


마지막으로 윤제균이 말하는 성공법칙은 무엇일까요?



윤제균: "첫번째, 성공의 가장 첫걸음은 주제파악입니다. 가수 싸이가 한 얘기죠. 내가 뭘 잘하고 뭘 하고 싶어 하는지, 내 성격과 재능은 어떤지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확실히 맞는 얘기인 것 같네요.

자신을 제대로 알아야지 무언가를 해도 할 수 있죠.


윤제균: "두 번째는, 제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만 가능하면 35세 전까지는 자신의 재능을 찾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사람들이 100을 기대할 때 200을 보여줘야 한다는 겁니다."


윤제균의 두번째 법칙은 첫번째 법칙과 중복되는 부분이 있네요.

즉, 자신의 성격과 재능을 '35살 이전까지' 찾아야 한다는 얘기가 되는데, 아마도 너무 늦은 나이까지 자신의 재능을 찾지 못한다면, 그 이후가 힘들기 때문에 이런 조언을 하는 것 같습니다.


윤제균: "네 번째 그렇게 찾은 일에 자신이 적어도 10년 동안 ‘올인’할 수 있는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다섯 번째, 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인간관계의 원칙은 경제학의 개념입니다만 ‘황금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라는 겁니다."


이렇게 윤제균은 사회 후배들에게 5가지 성공 법칙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꼭 영화인이 아니더라도, 사회 생활할 때 좋은 조언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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