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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가수(50대 이상) 결혼 생활

가수 박인수 아내(부인)곽복화 재혼- 사랑이란 여러 빛깔의

박인수 곽복화 러브스토리 및 인생이야기

남녀간의 사랑에는 여러 빛깔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화끈하면서도 강렬한 사랑, 중년 부부의 정때문에 사는 사랑, 그리고 노인들의 애잔한 사랑까지 나이에 따라서 사랑의 빛깔도 여러가지가 될 수 있죠.


한국 소울 가수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가수 박인수와 아내 곽복화의 결혼 이야기에는, 젊은이들의 사랑과는 다른 형태의 그것이 있습니다.


또한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한번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가수 박인수 아내 사진


가수 박인수는 1947년 9월 3일 함북 길주에서 태어납니다(박인수 고향). 올해 68살이죠(박인수 나이).

(박인수 학력 학벌) 미국 켄터키 중학교, 뉴욕 베어모어 고등학교 졸업

(박인수 프로필 및 경력) 히트곡으로 봄비, 나팔바지 등이 있는데, 봄비는 후에 여러번 리메이크 될 정도로 명곡이었습니다.


박인수는 사실 전쟁 고아 출신입니다.

그의 집안 전체가 함북 길주에 살다가 1.4 후퇴때 국군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죠. 그때 박인수는 부모와 헤어지고, 열차에서 껌팔이 소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박인수 직업).


기차에서 신라의 달밤 등의 유행가를 부르는 박인수의 가창력이 워낙 좋았기에 박인수는 한 미군의 도움으로 미군 군부대에서 일했고, 14살때 미국으로 입양되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오게 됩니다.


박인수 젊은 시절 과거 사진


하지만 박인수는 향수병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고, 곽복화를 만나서 결혼하게 됩니다(박인수 아내(부인) 곽복화, 박인수 배우자 와이프).



곽복화: "가수 활동을 하면서 남편과 자연스럽게 친해졌어요. 남편을 만나서 첫눈에 반해 20세에 결혼을 한 거죠."


당시 박인수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제작자였던 신중현의 눈에 띄어 봄비로 일약 스타가 된 상태였습니다.


신중현: "박인수가 미국 슬럼가에서 살았던 경험이 마음에 들었다."


(참고로 소울 음악이란 재즈 본래의 정신을 "Soul(솔, 소울, 영혼)"이라는 말로 표현한 데서 비롯된 말인데, 보다 협소하게는 흑인의 교회 음악, 가스펠 등으로부터 영향받은 음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인수가 어린 시절 미국 슬럼가에서 살았고, 또 한국에 있을 때에도 미국 흑인 병사들과 잘 어울렸기에, 이런 소울 음악을 할 수 있었던 것이죠.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만, 신효범, 박상민 등의 가수나 가요계 관계자들은 박인수를 한국 소울의 시초라고 보고 있습니다.)


가수 박인수 부인 사진


그후 박인수와 곽복화는 아들과 딸 남매를 낳지만, 결혼 생활은 불과 5년만에 깨집니다(박인수 자녀 자식).

곽복화: "당시 남편이 분유값을 갖다 주는 것조차 어려웠다. 얼굴도 보기 힘든데 생활비를 챙겨오지 않았다. 게다가 남편이 다른 여자와 외도를 한 적도 여러 차례 있었다. 이혼하기 위해 어린 아들과 야반도주를 감행해 친정으로 갔다."(박인수 이혼사유, 이혼이유)


결국 곽복화는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서 살게 됩니다.


박인수: "(가족을 찾기 위해) 신문광고를 낼 정도로 노력했다. 몸이 아프고 힘들 때마다 가족생각 많이 했다."



사실 이때 박인수는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1972년 히트를 치긴 했는데, 1976년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면서 방송 출연 금지를 받은 이후에 수입이 끊긴 상태였죠.

그렇다면 그 괴로움을 가족과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하는데, 박인수는 곽복화의 말처럼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고 밖으로만 나돕니다. 분유값도 없었던 곽복화로서는 생활하기가 막막했을 것 같네요.



그후 박인수는 방송 출연 금지에서 해제가 되지만 다시 전성기를 찾기는 못합니다. 주로 밤무대에서 활동을 하다가 1990년대 노래가사를 잊거나 저혈당 등으로 무대에서 쓰러지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박인수는 가요계에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박인수는 서울 화곡동의 지하 단칸방에서 혼자 어렵게 지냅니다. 저혈당으로 인한 단기 기억상실증과 췌장암에 종양이 자라고 있었죠. 게다가 주민등록이 말소되어서 병원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을 때에 정봉인 목사 등의 봉사 단체의 도움으로 겨우 치료를 받습니다.


이런 박인수에 대한 소식이 전처 곽복화에게 전해집니다.

이혼 후 37년동안 소식을 끊고 살았던 곽복화였지만, 한달음에 전남편에게 달려갑니다.


곽복화: "하나라도 잘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곽복화의 말에 이미 전남편에 대한 증오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네요.

이후 곽복화는 박인수의 재활을 돕게 됩니다.



곽복화: "요즘 들어 남편의 폭언이 굉장히 심해졌다. 원래 말수가 적었던 남자였는데 혼자서 말을 참 많이 한다. 아마 전쟁고아라서 어린시절 상처가 마음에 쌓여 있기 때문인것 같더라."


곽복화: "남편이 폭언을 할 때면 갑자기 돌변하는 남편이 무서워서 얼른 방문 닫고 도망갈 때도 있다. 그런데 2~3분 후에 방에 다시 들어가면 자신이 조금 전까지 어떻게 했는지 기억조차 못 한다. 현실에 대한 인지능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지금이 2014년 인지 계절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모른다."


박인수는 원래 단기 기억상실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증상이 점차 악화되고 있습니다. 그의 옆에서 헌신을 다하는 곽복화 역시 점차 지치게 되죠.


곽복화: "남편에게 화가 난다. 그런데 화 내놓고도 남편이 잠든 모습을 보면 안쓰럽다. 마치 어린 아이가 자는 것과 같더라. 화를 낸 것 때문에 가슴이 미어진다. 잘할게 하다가도 나도 인간인지라 결국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그럴 때는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난다."


그렇게 남편의 사정을 다 알면서, 곽복화는 남편과 재혼을 결심니다.


곽복화: "지금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하면서 산 적이 없다. 박인수와의 재혼 역시 내가 선택한 것이다. 후회한들 늦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이 사람을 다시 만나라고 하늘이 주신 기회같다."


곽복화: "남편 간호로 몸이 좋지 않았지만 병원에 가지 못한다. 박인수 씨는 나보다 먼저 가야한다(나보다 먼저 죽어야 한다). 그래야 저 사람이 먹고 싶은거 다 먹고 편안하게 살다 갈 수 있다."



곽복화는 37년 동안 헤어져 살던 전남편과 왜 재혼을 했을까요? 부부가 같이 오래 살면 정이라도 생기는데, 이들 부부는 불과 5년을 같이 살다가 헤어졌기 때문에 그런 정도 없었죠.

아마 이십대들은 이런 사랑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네요.


예전에 생활고와 남편의 외도로 이혼을 했다는 곽복화가 오늘날의 시각으로 다시 자신의 이혼을 평가합니다.


곽복화: "예전의 이혼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단지 우리들이 철이 없어서였기 때문이다."



노년만이 깨닫고 할 수 있는 말이 아닌가 합니다.

아마 곽복화와 박인수가 지금의 경험과 깨달음을 갖고 다시 젊었을 때로 돌아간다면, 이혼을 하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살았을 것 같네요.


만약 현재의 젊은 사람들이 이십년 후의 경험과 지혜를 가지게 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이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택할 수가 없죠.


그런데 이것이 전혀 불가능하지만은 않습니다.

젊은 사람들중에도 동년배보다 훨씬 지혜로운 결정으로,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가꾸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삶에서, 행복해지기 보다는 먼저 본인이 지혜로워지기는 것이 첫걸음 같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혜로워질 수 있는 방법을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지 않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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