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환 정윤선 러브스토리와 인생이야기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그런데 실수를 한 후에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죠.
탤런트 정동환 역시 젊은 시절에 큰 실수를 합니다. 유부남의 몸으로 다른 연예인과 스캔들을 일으켜, 방송사로부터 무기한 출연정지를 당했으니까요. 물론 대중들의 비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정동환 정윤선 부부 사진
탤런트 겸 영화배우 정동환은 1949년 8월 5일 전북 김제에서 태어납니다(정동환 고향). 올해 66살이죠(정동환 나이).
(정동환 종교 개신교)
(정동환 학력 학벌) 중동고등학교, 서울연극학교, 리 스트라스버그 시어터 인스티튜트(미국)
(정동환 프로필 및 경력) 1969년 연극 '낯선 사나이'로 데뷔
(실질적으로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연극배우로 활동했으며, 1965년 전국남녀 연극 경연대회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함)
극단 동랑레파토리에서 활동합니다.
연극 햄릿, 고곤의 선물, 맥베스 등 수많은 연극 무대에서 활동했으며, 1982년 영화 만추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이후 영화 블루 하트, 두 여자 이야기, 박수칠때 떠나라와 드라마 초원에 뜨는 별, 찬란한 여명, 제국의 아침, 연개소문, 대왕 세종, 대왕의 꿈, 나인, 상속자들, 너희들은 포위됐다(너포위) 등에서 좋은 연기력을 보여줍니다.
정동환 젊은 시절 과거 사진
정동환: "제 삶은 가난을 이고 태어나 가난이 두렵지 않았던 삶이었어요. 고교 입시에 실패해서 재수를 해야 했는데, 집안이 가난해서 할 말이 없었죠."
정동환: "당시에 공부할 곳이나 있나요? 가방을 들고 하릴없이 시립도서관에 가던 길에 드라마센터 앞을 지나가다가 그냥 홀린 듯이 연극을 보러 들어간 거에요. 당시 중동고등학교 연극부 학생들이 연극을 하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 연극이란 세계를 처음 발견했어요. 그게 그만 내 인생을 결정해버린 거죠."
결국 정동환은 중동고에 지원하고, 어머니는 아들의 뜻을 말리지 않습니다. 결국 정동환은 고교 1학년때인 65년 연극 '일출'로 전국남녀연극경연대회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합니다. 아마 연기에 대한 재능이 있었던 것 같네요.
정동환: "연극도 열심히 했지만 대학 갈 욕심도 있었어요. 그런데 대학도 떨어진 거예요. 한 대학 철학과에 지원했는데 보기 좋게 낙방을 하고 말았죠. 그래서 서울연극학교(서울예대의 전신)에 계신 유치진 선생님을 찾아갔어요."
정동환: "나 학비가 없는데 학교는 다니고 싶다. 집안 형편상 재수도 할 수 없고, 이름 있는 대학이 아닌 이상 학비를 대달라고 말할 명분도 없다, 그렇게 간절히 사정을 털어놓았죠."
정동환: "유치진 선생님은 저에게 무대감독 일을 하는 조건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게 해주었어요. 저는 나무토막 하나까지 내 손으로 다듬어 세우게 되면서 무대는 나에게 더욱 특별한 공간이 되었어요."
아마 유치진 역시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두각을 나타낸 정동환의 재능을 일찌감치 간파했거나, 아니면 자신을 찾아와서 사정을 이야기하는 정동환의 간절함에 이끌렸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정동환은 학교를 다니던 중 군대에 입대합니다. 월남으로 자원을 한 것이죠.
정동환: "군대에서 돈이나 벌어오자, 싶어서 월남행을 자원한 거죠. 보통 월남은 12개월밖에 있을 수 없는데 마침 내가 갔을 때가 패망 직전이어서 18개월이나 있어야 했어요. 그래서 제대를 넘겨서까지 있다가 73년에 돌아왔죠."
정동환: "월남에서 나는 땅 파고 지뢰 제거하고 다리 놨어요. 야전 공병이었죠."
이렇게 정동환은 월남에서 돈을 벌어오지만, '가난'은 그가 연극계로 돌아가도록 허용하지 않습니다.
정동환: "베트남에서 돌아와서도 밥벌이가 급했으니까요. 1973년에 동아방송 성우 6기생으로 입사했죠. 처음엔 합격할 거라고 별로 기대도 안 했어요. 딱 한 명 뽑는데 1000명쯤 지원자가 몰렸으니까요."
정동환: "그런데 그 어렵게 들어간 직장을 겨우 1년쯤 다니고 그만뒀어요. 조직생활이 생리에 안 맞았으니까. 직장에 몸 담은 상태에서 연극을 계속하는 것도 어려웠죠. 사실 회사 통틀어서 청바지 입고 다니는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었어요. 내가 튀려고 그런 게 아니고 당시 나는 양복 한 벌 살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죠. 게다가 내가 한 대학 연극부 연출을 도와줬는데 회사 다니면서 바깥 일 한다고 주의도 받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냥 그만둬버렸죠."
결국 직장을 관둔 정동환은 일본에서 막노동을 하게 됩니다.
정동환: "일본에 가서 계절노동 같은 걸 했어요. 파인애플 따는 일도 하고, 공장 가서 잡부로 일하기도 하고, 오키나와에 가서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일하기도 했죠. 밀항은 아니고 시험 보고 정식비자 받아 갔어요. 지금 동남아 노동자들이 우리나라 와서 한 달 일하면 일년치 월급 벌어간다고 하지 않아요? 그것하고 마찬가지였어요. 일본 가서 한철 일하고 돌아오면 수입이 괜찮았거든요."
정동환: "그렇게 몇 달 일해서 돈을 좀 만지면 귀국해서 또 연극하고…. 1975년에 공연했던 연극 <마의태자>는 흥행도 괜찮았고 배우로서의 제 존재감도 어느 정도 확인시켜준 작품인데, 그래도 먹고사는 문제가 여전히 안 풀려요. 오키나와에 또 갔죠. 사탕수수 농업이 당시 일본의 국책사업 가운데 하나였을 겁니다. 그런데 일이 하도 거칠고 힘드니까, 일본인들은 그 일을 안 하려 했죠. 덕분에 저같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거기서 일할 수 있었어요."
연극배우로 인지도를 쌓은 뒤에도 여전히 생활이 되지 않는 연극배우들의 가난한 삶이 정말 고달프네요. 그래도 정동환은 거기에 굴하지 않고 막노동으로 생활비를 법니다.
그러다가 정동환은 1981년 드라마 약속의 땅, 1982년 영화 만추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브라운관에 데뷔합니다. 가난했던 그에게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는데, 그는 여기서 치명적인 실수를 합니다.
당시 정동환은 결혼한 유부남이었는데, 동료 연예인이었던 김윤미와 바람이 난 것이죠(김유미가 아님)(정동환 불륜 외도).
당시 김윤미는 1977년부터 연기생활을 시작했고, 여자의 얼굴, 약속의 땅에 출연했던 여배우입니다.
정동환 아내의 간통죄 고소로 사회적인 이슈가 되자, 방송국에서는 정동환과 김윤미에 대해서 무기한 출연정지를 내립니다.
(정동환과 김윤미는 약 1년 7개월 뒤에 방송출연 정지가 해제되고, 김윤미는 드라마 '아버지'로 재기하는데, 얼마 활동하지 못하고 은퇴하게 됩니다.)
사실 정동환과 전처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가 않았습니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보기보다는 가난이 원인이었죠. 결국 전동환과 전부인은 1982년 이혼을 하고, 간통죄 재판이 실질적으로 진행되지는 않습니다(정동환 이혼 사유, 이혼 이유).
결국 앞길이 막힌 정동환은 미국 유학을 떠납니다.
당시 그에게는 전처와의 사이에 딸이 2명이 있었는데, 모두 어머니에게 맡기고 길을 떠났죠(정동환 자녀 자식, 둘째딸 이름이 정하늬인데, 1980년생이고 직업은 연극배우임).
정동환 딸 정하늬 사진
정동환 딸 정하늬와 사위 사진(정동환 딸 결혼식)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 정동환은 주로 연극배우로 활동했고, 스크린에 데뷔한지 얼마되지 않았기에 돈이 없었습니다. 거의 무일푼으로 떠난거죠.
정동환: "LA 공항에서 저를 픽업한 친구가 청소용역업을 했어요. 자연스럽게 저도 그 일을 하게 됐죠. 아무 기술 없어도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당시 제가 다녔던 학교가 ‘리 스트라스버그 시어터 인스티튜트’였는데,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빌딩 청소를 했지요. 그런데 그 일이 나한테 참 잘 맞더라고. 밤에 빌딩 한 층을 맡아서 혼자 청소하면 되니까, 사람들하고 번잡하게 엮이지 않아서 좋더라고요."
어쨌든 자신의 잘못으로 시작한 반강제적인 미국 유학생활이지만, 정동환은 충실하게 보냅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빌딩청소로 학비를 마련하고, 헐리우드 YMCA에서 보디트레이닝으로 심신을 단련합니다.
정동환: "그곳은 배우지망생들만 모이는 곳이기에 교습료가 굉장히 쌌어요."
또한 귀국전 맨해턴에서 440여일간 50여편의 연극을 관람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후일 그의 연기 인생의 밑거름이 되었죠.
그리고 1985년 귀국해서 다시 연기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귀국하기 전인 85년 9월 미국에서 친구 소개로 가수 정윤선을 만나게 됩니다.
정동환: "정윤선이 그때 미국에 공연이 있었어요. LA에서 후배가 있었는데 만나게 되었죠."
정윤선은 1958년생으로 정동환보다 9살 연하입니다(정동환 나이차이)(정윤선 나이 및 프로필).
1976년 MBC탤런트 9기로 데뷔했다가 1978년 잊지는 못할거야로 가요계로 진로를 변경했고, 아들, 엽서, 오해 등의 히트곡을 남깁니다.
(사실 13살때 박혜령이 부른 '검은 고양이 네로'에서 코러스로 활동하기도 함)
둘은 1986년 2월 약혼을 했고, 같은 해 9월 결혼식을 올립니다(정동환 재혼)(정동환 배우자).
후에 정동환 정윤선 부부는 늦둥이 아들 정우철을 낳습니다. 작년에 겨우 고3의 어린 나이였죠.
정동환 아내 사진(정윤선)
정윤선이 대단한 것 같네요.
전처의 자식들을 잘 키운 다음에 아들을 낳아서, 딸들과 아들 사이에 나이 차이가 상당하죠(정동환 자녀 자식)(정동환 가족 관계 2남 1녀).
정동환 가족 사진
정동환 아내와 아들
그것은 나중에 집을 이사할때도 잘 나타납니다.
정동환: "저는 서울이 내 몸에 맞지 않았어요. 그래 어찌어찌하여 길조차 없는 이곳(경기도 광주 전원주택)까지 흘러들어왔죠. 서울내기 아내는 반대했고요."
정동환: "한데 이사 후에 여자들은 놀라운 힘을 발휘해요. 일단 마음을 (시골로) 두더니 시골아낙으로 ‘모드전환’이더라구요. 동네 할머니들 따라다니며 채취한 들판의 자연재료로 새로운 무침을 만들어 저를 먹였으니까요. 산을 헤매고 다녀 제가 걱정을 많이 했어요.”
막노동을 하면서 연극과 공부를 한 정동환이나, 남편과 가족의 먹거리를 위하여 시골 아낙으로 변신한 정윤선 둘 다 대단한 것 같네요.
그렇게 전원주택에 살면서 연기 생활을 계속하던 정동환이지만, 뜻밖에도 공황장애에 걸리게 됩니다.
정동환: "갑자기 숨이 막히고 죽을 것 같았어요. 심장이 가빠지고. 가만있으면 넘어질 것 같아서 의자에 앉을 때 발을 의자다리에 걸고 앉아 있었죠. 그래도 내 몸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 누가 나한테 배역을 주려고 하겠어요. 내가 하고픈 작품이 막 무대에 올려지는 판인데, 그걸 하고픈데 그렇게 쓰러지면 어떻게 하겠어요? 숨기고 버텼지."
정동환: "터널을 지나는데 가슴이 꽉 막히고, 룸 미러를 보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어요. 터널이기에 차를 대고 쉴 수도 없었죠. 이러다 사고가 나는구나,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공포를 느꼈어요."
아마 정동환의 지난 날, 가열차게 앞만 바라보고 달려왔던 지난 날이 그에게 공황 장애를 일으킨 것이 아닐까 합니다. 환갑은 훌쩍 넘긴 나이이지만, 늦둥이 아들은 이제 겨우 20살 학생이니까요.
정동환은 "제 삶은 가난을 이고 태어나 가난이 두렵지 않았던 삶이었어요."라고 외쳤지만, 그의 잠재의식속에는 돈을 벌지 못할 두려움, 가난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거기에 지지않고 꿋꿋하게 이겨 나가는 모습이 대단한 것 같네요.
(후에 정동환은 어떤 정신과 병원의 진료와 치료로 공황장애를 극복하게 됨)
정동환은 늘그막에 자신의 인생을 회고합니다.
정동환: "감히 나같은 속인이 김수환 추기경님을 빗대 내 삶을 이야기했다는 게 불손하게 받아들여질 수는 있어요. 며칠 전에 정채봉씨가 쓴 ‘바보 별님’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이걸 읽다 보니 정말 기가 막힌 거야. 이분의 삶도 나하고 다를 바 없었구나. 다른 것이 있었다면 추기경님은 고비 때마다 그 관문을 다 넘었고, 나는 내 인생의 고비 때마다 실패를 거듭했다는 것. 그 실패가 쌓이고 쌓여서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지금의 나로 이어져왔다는 것을 깨닫고 전율이 오더라고요.
정동환: "난 연극에서 길을 찾은 거예요. 김수환 추기경과는 태어난 가정환경은 비슷했지만 살아온 내력을 보면 서로가 정 반대의 길을 걸었어요. 그분은 끊임없는 성공을 거쳐 종교 속에서 길을 찾았고 나는 실패가 쌓이고 쌓여 이 길로 왔어. 연극무대를 볼 때마다 짝사랑하던 그녀를 볼 때처럼 가슴이 설레고 떨렸지만, 그것이 뭔지 몰라 두렵고 안타까울 뿐이었지. 수많은 실패와 좌절 속에서 번민했을 뿐이고, 무대를 떠나지 못했을 뿐이야. 돌아보면 단 한 번만 그 길이 어긋났어도 나는 여기에 있지 않았을 거야. 내 인생의 모든 것이 날 이곳으로 흘러오게 한 거야. 그런데! 그런데 그 모든 우연과 운명적인 상황들이 맞물려 한 세상이 지났을 때, 그 끝에서 만난 세계는 김수환 추기경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운명이고 신념이고, 그게 바로 연극이지. 연극은 바로 종교야!"
사실 위의 말에 자기 겸양이 상당히 있어, 본뜻을 파악하기가 힘듭니다.
사실 정동환이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나는 가난에 결국 굴복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감히' 김수환 추기경의 인생과 자신의 인생을 비교하고, 또 '연극은 바로 종교야!'라고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것이죠.
이제까지 정동환의 인생과 노력을 알면, 정동환은 이 부분에 대해서 큰소리를 칠 자격이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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