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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배우(50대 이상) 결혼 생활

윤문식 아내(부인)신난희 재혼/윤문식 전처 이영순 사별 이유

윤문식 이영순 러브스토리와 인생이야기(윤문식 신난희 러브스토리)

윤문식이 재혼 아내 신난희와의 러브스토리와 사별한 전처 이영순과에 대해서 15년간 간병을 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이전의 이야기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네요.


윤문식의 어린 시절과 전부인 이영순과의 러브스토리 역시 아주 흥미롭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전혀 생각지도 못할 인연이었죠.

그리고 윤문식을 보면 늙은 사람의 지혜가 떠오릅니다.

그의 지혜 2가지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윤문식 아내 사진


탤런트 겸 연극배우 윤문식은 1943년 1월 18일 충청남도 서산에서 태어납니다(윤문식 고향). 올해 72살이죠(윤문식 나이).

(윤문식 학력 학벌) 서산농림고등학교,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윤문식 프로필 및 경력) 1961년부터 연극배우로 활동합니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둥둥 낙랑둥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연극에 출연했고, 놀부전, 봉이 김선달, 변강쇠전 등의 마당놀이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합니다. 우리나라의 80년대 마당놀이 중흥기를 이끈 대표적인 배우중의 한명이죠.


그외에 울고 넘는 박달재, 철부지들 등의 뮤지컬, 투캅스 시리즈, 귀신이 산다 등의 영화, 여명의 눈동자, 다모, 포도밭 그 사나이 등의 드라마까지 전천후로 활동한 배우입니다.



어린 시절 윤문식은 충남 서산의 유명한 개구쟁이였습니다.

윤문식: "나는 서산의 소문난 악동이었다. "쉿, 조용히 혀, 다들 모였는강" 아이들이 누런 콧물을 소매자락으로 훔쳐내며 올망졸망 전봇대 밑에 모여 앉았다. 깜깜한 밤담장 넝쿨에 옷자락이 찢기고 논바닥에 무릎이 긁혀도 수박과 참외를 서리하는 것만큼 흥이 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얼마간 하다보니 그것도 시들해졌다. 뭔가 색다른 놀이를 하고 싶었다."


결국 윤문식은 닭서리까지 하다가 어른들에게 혼이 납니다. 동네에서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윤문식부터 찾는 것이 일이었을 정도였죠.


윤문식: "아버지는 술과 풍류를 즐기던 한량이었다. 핏줄은 속이지 못하는 것일까, 그 모습을 닮아 내가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 광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원래 할아버지대에 서산 대천면의 땅 절반이 우리 집안 소유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재산을 탕진하고 읍내 공무원을 지내다가 결국 내가 9살 되던 해 돌아가셨다. 젊은 아내와 7형제를 덩그렁 남겨놓은 채 그렇게 떠나버린 것이다."


윤문식: "어머니가 생선장사를 했다. 난 아침밥을 먹어본 적이 없다. 새벽장에 나가야 했던 어머니는 밥을 지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나는 아침밥을 거른다. 하루종일 속이 거북하기 때문이다."


윤문식: "아이들은 나를 '문둥이'라고 놀렸다. 얼굴에 허옇게 부스럼이 생기고 검버섯이 피어도 어머니는 나를 보살펴주지 못했다. 제대로 씻지도 않고 먹지도 못했으니 꼬락서니가 엉망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시장 바닥을 휘젓고 다니던 꼬마 장돌뱅이였다."



그러다가 윤문식은 동네를 돌아다니던 악극단을 보고 혼을 빼앗길 정도로 충격을 받습니다.

이영순: "간혹 천막앞에 쭈그리고 앉아 나혼자 대사를 외웠다. 내가 견우도 맡고 직녀 연기도 했다. 1인극을 한 것이다. 그러다가 농고 1학년 학예회때 처음 연극 무대에 섰다. 내 오랜 연기 경력의 시발점이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윤문식은 돈을 벌기 위하여 무작정 가출을 하기도 합니다.

윤문식: "막상 집을 나오기는 했지만 갈데가 없었다. 결국 동두천으로 갔다. 매형(둘째 누나 남편)이 다니는 미군부대에 가면 먹고 잘 수는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미군 심부름을 하는 하우스 보이, 이발소 면도사 등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다. 새우잠을 자면서도 배우가 되겠다는 소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윤문식: "나는 미군들에게 꽤 인기있는 한국 소년이었다. 부대에서 사용되던 군표는 현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처럼 군표를 많이 모은 코리언 보이는 없었다. 그러나 하늘은 나에게 쉽게 행운을 주지는 않았다. 1년동안 고생해서 모은 군표가 바뀌어 하루 아침에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것이다. 술을 먹고 신세를 한탄해도 소용없었다."



윤문식은 1964년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하게 됩니다.

윤문식: "꿈에 그리던 대학 강의실에 들어서는 순간 아찔했다. 칼날같이 주름을 세운 양복바지에 번쩍번쩍 윤이나는 백구두를 신은 신사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멋쟁이란 멋쟁이는 모두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다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윤문식: "식은땀을 흘리며 맨 뒷자리로 가려는데, 나와 처지가 비슷해 보이는 반가운 얼굴이 눈에 띄었다. 지금도 연극무대를 지키고 있는 최주봉과 박인환이다. 박인환은 그나마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나와서인지 허름한 양복으로 신입생의 구색을 갖추고 있었지만, 최주봉과 나는 곰팡내 팍팍 풍기는 말 그대로 시골촌닭이었다. 밑단이 너덜너덜하게 해진 군복 바지에 검정운동화를 끌고 올라온 가난한 유학생이었다. 따돌림을 당한건지, 우리끼리 어울려 다닌건지 잘은 몰라도 우리는 못난이 3형제로 불렸다."


이때부터 윤문식, 최주봉, 박인환의 오랜 인연이 시작됩니다. 윤문식과 함께 마당극을 이끌었던 연극배우 김성녀는 후에 만나게 되죠.


(과거 봄날은 간다의 윤문식, 최주봉, 김자옥 사진)


윤문식: "무대는 따로 없었다. 제방이나 학교 운동장이 무대였다. 낡은 조명기구를 둘러메고 북과 꽹과리를 치면 한꺼번에 500여명의 관객들이 몰려들었다."


윤문식은 외모때문에 처음부터 '곱상한 역할'이나 주인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윤문식: "언젠가 팔자에도 없는 '천사' 배역을 맡은 적이 있었다. '천사'를 맡았던 친구가 갑자기 감기몸살로 대역이 필요했던 것이다. 왕관을 쓰고 천사 꼬리표를 달고 무대위로 올라갔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예수의 잉태사실을 전하는 장면이었다. 아뿔사, 나도 모르게 대사를 틀리고 말았다. "아줌미, 아들을 낳을 거구먼유." 사투리에다가 그것도 성녀 마리아에게 아줌니라... 한바탕 웃음보따리가 터졌는데도, 나는 왜 관객들이 배꼽을 잡는지 알지 못했다. 그만큼 긴장했기 때문이었다."


이십대 청년 윤문식의 긴장감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네요.

윤문식이 지금은 아주 노련하고 관록이 엿보이는 배우이지만, 당시에는 그 역시 긴장을 많이 했죠.

누구나 하는 긴장이지만 이것을 헤쳐나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윤문식: "우리의 뒤풀이는 언제나 시끌벅적했다. 무대에서보다 더 크게 떠들고 웃었다. 안주없이 막걸리를 마시다 오랜만에 삼겹살에 소주 한잔을 기울이게 되면 모두가 초긴장이었다. 누구도 노릇노릇한 삼겹살을 먹어보지 못했다. 구워지기가 무섭게 입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카뮈와 니체를 얘기하면서도 우리의 진지한 눈빛은 삼겹살에 가 있었다."


윤문식: "상추밑에 고기 한점을 몰래 숨겨 놓거나 젓가락으로 익지도 않은 삼겹살을 누르고 있으면 그래도 양반이었다. 한꺼번에 몇점을 입에 넣었다고 상대방의 입을 벌리고 꺼내 먹은 적도 있었다."


이런 시절을 겪었기에, 윤문식은 소주와 삼겹살에도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돈이 너무 없었기에, 윤문식은 결혼을 포기하고 살게 됩니다.


윤문식의 30대는 배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연극을 계속 하면서 '한국의 정서'를 찾기 위하여 노력했죠.

결국 윤문식은 판소리, 민요, 고전무용과 탈춤을 배우면서 한국적인 정서를 함양했고, 이것은 나중에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런 생활을 하던 윤문식에게 어느날, 요즘 말로 헌팅(?)같은 미팅 제안이 들어오게 됩니다.



윤문식: "78년 극단 '민예'시절, 갑자기 연극계 선배인 이승규가 느닷없이 사람을 소개해 주겠다며 나를 찾아왔다. "내 여동생 친구라는데 공연 팜플렛을 보고 너를 찍었단다. 한번 만나보지 않을래?" 난 결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떠돌이 연극쟁이를 이해해줄 여자도 흔치 않으려니와 행복한 가정이란 단어가 내게 어울리지 않은 것 같았다. 맘 편히 술이나 한잔 걸치자는 생각에 선뜻 자주가던 허름한 선술집으로 약속 장소를 정했다."


이때 윤문식은 첫번째 부인이었던 이영순(이름)을 만나게 됩니다(당시 윤문식의 나이는 36살, 이영순은 33살). 그런데 이영순이 좀 특이하네요. 공연을 본 것도 아니고, 단순히 팜플렛을 보고 윤문식을 찍었으니까요.



어쨌든 윤문식에게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평소 단골집이었던 선술집으로 약속 장소를 정한 것이죠.


윤문식: "그녀가 빨간 외투를 걸치고 나왔다. 예쁘지도 않았고 썩 못생긴 것도 아니었다. "아줌니, 여기 막걸리하구... 안주는 필요없고 그냥 양배추쌈이나 좀 주쇼." 인사를 하는둥 마는둥하며 주문부터 했다. 사람보다는 술 욕심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위에서 막걸리 다음의 '...'이 중요합니다.


이영순: "잠깐만요. 제가 살테니 드시고 싶은 안주를 고르세요."


윤문식: "결국 돼지 족발을 큰 접시로 시켰다. 씻지도 않은 더러운 손으로 족발을 뜯으며 간만에 아주 맛있게 술을 들이켰다.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돼지 족발을 마주한 두 젊은 남녀의 상황이 흥미롭네요. 특히 윤문식의 속마음은 그의 마당극만큼이나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윤문식: "술을 마시면서 난 내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놨다. 노총각의 생활, 풍류를 즐겼지만 집안 재산을 다 날린 아버지, 생선 장수였던 어머니 등...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윤문식: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데 방해꾼들이 입장했다. "어이, 문식이. 좀 천천히 마시지. 오늘 장가가는 거야?" 연극판 친구들이 패거리로 몰려왔다. 여기저기 자리를 옮겨다니며 한두잔 얻어마시다보니 어느새 자정이 가까워졌다. 그녀가 그만 집에 가겠노라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을 때에야 비로서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반려자를 소개받는 자리인지, 코가 비뚫어지도록 술을 마시는 자리인지 분간이 안 갔던 것이다."


윤문식: "나는 "그럼 조심해서 살펴 가셔유." 더벅머리를 긁적이며 엉거주춤하고 서 있는데, 한 선배가 내 호주머니에 50원을 푹 찔러넣었다. 택시로 집앞까지 바래다 주라는 것이다. 엉겹결에 그녀를 따라 대폿집 문을 나섰다."


가난한 연극배우들이었지만, 그래도 사람의 도리를 다하라고 선배가 큰돈(?)을 찔러주는 인정이 있었을 때네요.

결국 이것 때문인지 윤문식과 이영순의 인연은 잘 이어집니다.



윤문식: "다음날 다시 그녀를 만났다. 그제서야 그녀가 초등학교 교사이고, 장인 어른 될 사람이 교장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날 이후 우리는 90일 동안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얼굴을 마주했다. 보면 볼수록 참한 여자였다. 그녀 앞에만 서면 정말 광대가 된 것 같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세상에 대고 심하게 욕설을 퍼붓다가 그녀가 자지러지게 웃을만큼 재롱을 떨기도 했다. 알 수 없는 야릇한 감정이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윤문식 아내 이영순 집안)(윤문식 아내 직업)


윤문식: "난 언제나 빈털털이였다. 술값이며 담뱃값을 그녀 혼자서 모두 계산했다. 공짜로 술을 마시는 것은 신났지만, 내 속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 기뻤다. 행복하다는 말을 실감했다."



윤문식: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두 눈이 퉁퉁 부어 무대 앞에 나타났다. 집안의 반대가 보통 심한 것이 아니었다. 광대에게 시집을 가려면 차라리 목숨을 끊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내 자신이 초라하고 부끄러웠다."


윤문식: "결국 장인 어른의 승낙이 떨어지기도 전에 도봉산장을 빌려 결혼식을 치뤘다. 아내는 우리가 살 집을 미리 마련해 놓았다. 서른살이 넘도록 교직 생활을 하며 알뜰살뜰 저축해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윤문식은 1977년 이영순과 결혼식을 올립니다. 당시 교장 선생이었던 장인 어른의 허가는 끝내 없었고, 둘이 그냥 강행한 것이죠(나중에 결국 딸과 사위를 용서하게 됨)(윤문식 부인 이영순, 윤문식 배우자 와이프)(윤문식 전아내, 윤문식 전부인)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윤문식은 배우자로서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영순은 무엇을 보고 윤문식을 자신의 배우자로 선택한 것일까요?

아마 직접 만나보고 대화를 한 결과, 윤문식의 진정성을 느꼈기 때문이 아닌가 하네요.

게다가 이영순은 매우 지혜로운 여자이기도 했습니다.



윤문식: "결혼한지 3년 정도가 지났다. 처음에는 여우같이 사랑스럽던 아내가 살쾡이로 변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못 살겠어요. 당신 용돈은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아내가 더 이상 담뱃값을 쥐어주지 못하겠다는 항전의 나팔소리였다."


집을 마련하고 생활비까지 버는 이영순이 드디어 폭발한 것 같네요.


윤문식: "40살 되던 해 난생 처음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80년 국립극단에서 받은 첫월급을 고스란히 아내에게 바쳤다. 26만 4천원이었다. "어머 당신이 어쩐 일이에요. 정말 고마워요." 아내가 어린아이처럼 내 볼에다 뽀뽀를 하며 애교를 떨었다. 그제서야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윤문식: "아내는 무척 알뜰했다. 허튼 일에는 10원도 쓰지 않는 소문난 구두쇠였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부산공연을 했을 때다. 중학생 2명이 꽃을 사들고 분장실로 나를 찾아왔다. 장학금을 줘서 정말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내게는 짠지보다 더 짜게 굴었던 아내가 몰래 행한 일이었다. 아내가 정말 사랑스러웠다."


윤문식 아내 이영순은 그릇이 큰 사람같네요. 윤문식이 사랑하고 또 존경할 만한 여자같습니다.



이렇게 안정된 생활을 기반으로 윤문식은 80년대 한국 마당놀이의 중흥기를 이끕니다. 당시 정월 초하루면 TV에서는 어김없이 마당놀이 시리즈가 펼쳐졌습니다. 이춘풍전, 춘향전, 배비장전 등. 특히 윤문식의 인기가 워낙 좋다보니 방자전이라는 공연물이 따로 올라갔을 정도였죠.


이것은 윤문식이 어렸을 때부터 연극을 했고,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그가 한국적인 정서를 찾기 위하여 노력을 했던 결과였죠.

그 덕분에 그는 마당놀이 중흥에 큰 공을 세웁니다.


윤문식과 이영순 부부 사이에는 아들과 딸 한명이 있습니다(윤문식 딸 아들, 윤문식 자녀 자식)(윤문식 가족 관계).


윤문식 사위 사진


그런데 90년대 초반 이영순이 당뇨를 앓기 시작하고, 거의 15년을 앓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2007년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윤문식 사별 사유)(윤문식 전아내).


윤문식: "병이 악화되면서 온몸에서 농이 나오니까 하루에 기저귀 4백 장을 썼어요. 간병인도 버티지 못하고 나가는 상황이니 제가 돌볼 수밖에 없었죠."


결국 윤문식과 윤문식 딸이 번갈아 이영순의 병간호를 하게 됩니다.


윤문식: "15년 동안 이별 연습을 한 거요. 그런데 그게 충분하지 않았나 봐요. 지방 공연을 하느라 임종을 지키지 못했는데, 막상 저세상으로 떠났다는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더군요. 연기나 삶이나, 완벽함은 없는 거죠. 그러니 그렇게 뭔가에 달려드는 것 아니겠어요."


윤문식 아내 이영순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존엄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윤문식: "사위(이름 김종영)가 결혼을 일 년 미루겠다고 했는데, 내가 그 사람도 바랄 거라는 말로 강행했어요. 이미 아내가 결혼 날짜를 알고 있었어요. 사위 될 사람이 병원에 왔는데, 아내가 들어오지 말고 병실 문을 반만 열어 놓고 얘기하자고 해요. 아픈 장모의 모습을 사위에게 보여 주고 싶었겠어요? 그래도 사위가 들어오겠다니 병실 불을 끄고 만났어요. 곁에 온 사위 손을 잡고는 미안하다는 말만 계속 하고…."


윤문식: "처음에는 하나뿐인 딸을 빼앗아간다는 생각에 도둑놈 같고 싫더니 이제는 사위라기보다 내 아들이에요. 장모의 병간호를 위해 병원 근처에 신접살림을 마련하겠다고 하더군요. 아들이나 다름없죠."


윤문식의 사위가 정말 효자네요.

이런 정성이라면, 어떤 어른의 마음이든 다 녹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15년동안 아내를 병간호하다가 떠나보낸 윤문식이 딸 부부에게 충고를 합니다.


윤문식: "내가 셈을 해보니 아내와 14만 날 정도 살았는데, 그중에서 오롯이 둘만의 시간을 보낸 게 1000일이 안 돼요. 무대에 나가랴, 자식 챙기랴, 돈 걱정하랴, 부부간의 시간은 없습디다. 이게 얼마나 끔찍한 얘기냔 말예요. 우리는 그렇게 바보처럼 살아가고 있어요."


윤문식: "(딸에게) 아빠 생각 너무 많이 하지 마라. 효도할 생각하지 마라. 대신 10일에 하루는 부부 둘만의 시간을 보내라."


일찍 사별하게 된 윤문식의 아픔이 그대로 드러난 충고네요.

윤문식의 딸뿐만 아니라 현재의 부부들에게 의미있는 말 같습니다.



그렇게 2007년 아내를 떠나보낸 윤문식이 2011년 재혼을 하게 됩니다.

(윤문식 이혼이 아니라 사별로 전부인을 떠나보냄)

바로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던 신난희(이름)였죠.

신난희는 윤문식보다 18살 연하이고, 전직 국가대표 유도 선수의 딸입니다(신난희 집안).


신난희: "윤문식과 아파트 주민이었는데 전처와 사별 후 힘들어 하더라. 그래서 내가 ‘밥 좀 사달라’고 했는데 드라마 촬영 얘기하다 내가 지방까지 운전 해드리겠다고 하면서 매니저 역할을 했다."


신난희: "남편의 존재가 내겐 태산같다. 18살 연상임에도 결혼을 결심한 이유는 그의 머리를 열어보고 싶을 정도의 박학다식함에 반했기 때문이다."


윤문식: "술을 먹고 비틀거리던 나를 챙겨줬던 예쁜 여인이 지금의 아내다. 아내가 먼저 나에게 같이 사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내가 프러포즈하려 했지만 아내가 먼저 눈치를 챘다."


윤문식: "정말 감동 받았다. 남한산성 근처에서 밥을 먹고 공동묘지 쪽으로 가게 됐는데 거기서 나도 모르게 아내에게 뽀뽀했다. 죽은 사람들이라 소문 안 날 거 같아서 공동묘지서 했다."


윤문식 신난희 결혼 사진



확실히 윤문식은 마당놀이를 하면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그런 박식함이 어린 아내의 마음을 사로잡은 모양이네요. 그리고 윤문식 역시 힘들어하는 자신에게 힘이 되어 주고자 하는 신난희의 다정함에 마음이 이끌린 것이고요.


결국 윤문식과 신난희는 먼저 동거부터 합니다.

신난희: "동거부터 시작했다. 당시 윤문식이 공연하는 장소랑 내가 살던 집이랑 굉장히 가까웠다. 2회 공연을 할 경우 굉장히 늦게 끝나지 않나. 윤문식은 운전도 안 해서 지하철 타고 다녀야 하는데 너무 늦으면 출퇴근이 번거롭기 때문에 한 두 번 우리 집에서 자고 공연장에 갔다. 그것이 계속돼서 결국 눌러앉았다."


신난희: "하지만 동거를 하니 안 좋은 점이 있었다. 윤문식의 아들이 직장 때문에 다른 곳에서 자취를 하는데 아버지가 우리집에 와 있으니까 주말에 집에를 못 오더라. 아들이 불편하지 않을까 싶어서 방 세칸짜리로 옮기자고 말했다. 그렇게 아들 방 하나를 만들어놨더니 주말마다 오더라."


신난희가 윤문식의 아들까지 신경을 쓰는 세심함을 보이네요.

둘은 2011년 결혼식을 올리는데, 윤문식의 두번째 결혼 역시 쉽지는 않습니다.


(윤문식 재혼 아내)


윤문식: "아내와 재혼하기 전에 장인 어른이 유도 국가대표 선수 출신이라 '결혼 전에 죽는거 아닌가' 그랬다. 처음 만나기 전 굉장히 떨었다."


참고로 윤문식의 장인은 윤문식보다 12살, 장모는 4살 연상입니다. 이 정도면 윤문식에 두려움에 떨었던 이유가 일리가 있네요.


윤문식: "장모님은 30년 간 마당극을 본 팬이라 그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장인 어른은 무서웠다. 반대를 굉장히 많이 했는데 결혼 할 때 장모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결국 장인 어른이 '앞으로 자네를 윤서방이라고 부르겠네' 하시더라. 그렇게 허락을 받았다."


윤문식: "결혼한 후에는 장모님이 나보다 더 불편해 하신다. 전화 통화할 때는 윤서방이라고 부르시는데 직접 마주하면 나를 윤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신난희: "남편이 과거에 돌아가신 형님(윤문식 전처에 대한 신난희의 지칭)에 대한 애틋함을 담고 계신다. 물론 간직하고 있는 것은 좋지만 나랑 사니까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신난희의 말처럼, 윤문식은 여전히 전처를 잊지 못합니다.

윤문식으로서는 잊을 수 없고, 또 그렇다고 신난희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닙니다.

자칫 불화의 원인이 될 수 있죠.

하지만 여기서 윤문식은 자신의 지혜를 발휘합니다.


윤문식: "전처가 살아있을 때 '더 좋은 말을 할 걸, 짜증 덜 낼 걸' 그런 여한이 많다. 지금 아내에게는 미안하지만 아직도 가끔 생각난다. 전처 기일이 재혼한 아내 생일이다. 그래서 전처의 환생이 지금의 아내라는 생각에 더 잘 해주고 있다."


윤문식의 말은 전처를 완전히 잊지 않으면서, 그것을 빌미로 현재의 아내에게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말이라면, 신난희 역시 수긍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윤문식의 첫번째 지혜입니다.



그 다음 윤문식은 자신의 재혼에 대한 자식들의 반대를 미연에 제거합니다.


윤문식: "나는 (윤난희와) 혼인신고 전 아들과 딸을 불러서 내 재산을 보여주며 내 재산이 이 정도니 우리 3등분 하자고 했다. 아이들도 쾌히 승낙했다. 그래서 부부 노후자금엔 손을 안 대기로 하고, 나도 자녀의 돈에 손을 안 대기로 했다."


요즘 황혼 재혼의 문제중의 하나가 바로 자식들의 반대입니다. 자식들은 주로 부모의 재산이 배우자에게 넘어갈까 두려워하고 있죠.


사실 윤문식의 재산은 윤문식과 사별한 아내 이영순이 공동으로 만든 것입니다. 자식들이 손을 벌릴 대상이 아니죠.


다만 한국적인 정서(또한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정서)에서 그것은 당연히 아들과 딸에게 상속되는 재산으로 여겨집니다.

이에 윤문식은 3등분을 해서 자신과 아들, 딸에게 공평하게 재산을 분배했고, 자식들의 불만을 조기에 잠재웠네요.

윤문식의 두번째 지혜입니다.


역시 늙은 생강이 맵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윤문식의 적절한 행동으로 신난희와 새로운 인생을 출발했고, 또 자식들과 의가 상할 상황을 미연에 잘 방지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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