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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가수(50대 이상) 결혼 생활

이수만 보아 hot 비하인드 스토리

(2/4) 총 4개의 글중 두번째 글


이수만 보아, 이수만 hot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입니다.


# 목차

* 이수만의 수많은 실패들

* 이수만 HOT 제작 당시의 암울했던 상황

* 이수만 유영진의 관계

* 이수만 보아 발탁 이유


유라준의 특별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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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 가수(50대 이상) 결혼 생활] - 이수만 서울대 경복고,이수만 종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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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만의 수많은 실패들


어쩌보면 이수만에게 현진영은 철천지 원수라고 할 수 있는데,

어쨌든 현진영이 감옥에 있는 동안에 그의 부모님을 돌봐주기도 했네요.


현진영: "지금까지 SM엔터테인먼트에 있었다면, (내가) 더 잘 됐을 것이다. 이수만 선생님 덕분에 내 인생이 바뀌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전부 이수만 선생님 덕분이다."


현진영: "(SM과 결별할 때) 자식 된 마음으로 더 이상 선생님의 속을 썩이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SM을) 스스로 떠났다."


현진영이 두번이나 큰 사고를 쳤지만, 그래도 이수만이 현진영에게 박하게 대하지는 않았는 모양이네요.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이수만의 SM기획은 부도 위기를 겨우 넘겼지만,

당시 소속 연예인이었던 신동엽, 김승현, 이홍렬, 김광진, 한동준 등이 모두 회사를 떠나고 맙니다.


그런 다음에 이수만은 1993년 3인조 락밴드 '메이저'를 기획합니다.

(당시 멤버는 서연수와 임범준 유한진)


하지만 방송국에서는 '메이저'의 파격적인 헤어스타일과 도발적인 의상에 제재를 가했고, 결국 방송 불가 통보를 받게 되면서, 팀은 공중 분해가 됩니다.

(이수만이 멤버들에게 의상과 헤어스타일을 방송에 맞게 개선하자고 했지만, 멤버들은 음악에 대한 자존심때문에 이에 반대함)


그리고 이수만은 1994년에 그룹 J&J를 기획하는데, 이 그룹은 시장의 반응을 얻지 못하고 실패하게 됩니다.

이수만 사진

* 이수만 HOT 제작 당시의 암울했던 상황


이후 이수만은 회사의 모든 역량을 모아서 HOT를 만들었고(1996년 활동),

이것이 큰 성공을 하게 됩니다(이수만 hot 당시).

(참고로 hot는 뉴 키즈 온 더 블락을 많이 참조하여 프로듀싱을 함)


뒤이어 데뷔한 SES 역시 성공을 거두었고,

1998년에는 신화, 1999년에는 플라이 투 더 스카이, 2000년에는 보아가 연속으로 히트하면서, 오늘날 이수만 성공 신화의 발판이 됩니다(이수만 보아 연속적으로).


결국 이수만이 성공하기까지는 무수히 많은 실패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본인의 능력이 모자란 실패가 아니라 성공을 눈앞에 두고도 소속 가수의 대마초나 필로폰 문제로 실패를 했던 것이죠.


하지만 이수만은 여기에 굴하지 않았고, 끈질기게 도전한 끝에, 결국 성공하게 됩니다.

* 이수만 유영진의 관계


두번째, 이수만의 능력과 사람보는 눈이 탁월합니다.

먼저, 오늘날 유명한 작곡가 유영진이 제발로 이수만을 찾아갑니다.


원래 유영진은 당시 여러 기획사에 오디션을 봤지만 모조리 탈락을 했고, 마지막으로 SM기획에 본인이 작곡한 CD를 보냅니다.

이를 들은 이수만이 유영진의 능력을 알아차렸고, 곧바로 그와 계약을 했죠.


그리고 원래 이수만에게는 수석 프로듀서인 홍종화가 있었는데, J&J가 실패하면서 홍종화가 SM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유영진이 자연스럽게 수석 프로듀서의 자리를 차지했고, HOT, SES의 명곡들을 연달아 작곡하게 됩니다.


이수만의 성공에는, 이렇게 사람을 알아보는 눈, 무명이었던 유영진의 곡이 좋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의 능력 덕분이 아닐까 하네요.

.. ..

* 이수만 보아 발탁 이유


세번째, 이수만은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 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이수만은 미국 유학 시절과 일본의 쟈니즈를 보고, 곧 아이돌들의 시대가 도래할 거라고 예견하고, 이에 맞는 시스템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HOT, SES, 신화, 보아 등을 연달아 내놓으면서, '이수만 신화'을 만들었죠.

특히, 본격적인 해외 시장 개척 모델이었던 보아와 슈퍼주니어를 보면, 이것은 더 잘 나타납니다.


이수만: "HOT를 데리고 해외 진출을 처음 시도할 때는 병역문제가 큰 문제였다. 5명의 HOT 멤버들이 해외에 체류할 수 있는 절차를 밟다 보면, 거의 한 달이란 시간이 그냥 지나갔다."


이수만: "때문에 군대 문제가 없고, 일본의 로우틴(low teen) 팬들을 공략할 수 있는 보아를 선택했다."


이수만: "사실 중국은 시장이 크기는 하지만, 불법 복제 문제때문에 수익을 남길 수가 없다. 그래서 일본인들 역시 중국 진출을 꺼려한다."


이수만: "하지만 고이즈미 총리가 일본의 ‘글래이’(GLAY)라는 그룹을 이끌고 공연 한번에 70억 원씩 지원하는 걸 보면, 앞으로 3~4년 내에 일본의 본격적인 중국 진출이 시작될 것이다."


이수만: "(일본에게) 시장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는, 바로 지금 투자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2003년 이수만의 인터뷰였습니다.

당시 불법복제문제때문에 중국 시장에서는 돈을 벌 수가 없었지만, 그때부터의 적극적인 투자 덕분에 오늘날 한류 시장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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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2016년 8월 9일)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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