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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인 이야기/정주영

정주영 회장 아내 변중석 여사의 신혼생활 변중석: "(중략) 솔직히 생활이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고는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어요." 이후 변중석은 남편과 평생을 함께 합니다.정주영이 자동차 정비사를 할 때는 이미 온 가족을 서울로 불러서 함께 살았는데, 당시 20여명의 대가족이 되었죠.(정주영의 동생들이 7명이고, 정주영과 변중석 사이에 아이들도 줄줄이 태어남) (스폰서 링크) . . 그런 대가족속에서 변중석은 시어머니와 함께 집안일을 했고, 또한 직접 밥과 반찬을 해서 자동차 정비소로 나르기도 합니다. 남편과 직원들의 밥을 직접 한 것이죠. 그리고 정주영이 모든 것을 잃었던 부산 피난 시절에는 직접 거리에서 포도 장사를 하기도 합니다. 변중석: "제가 마음이 약해서 물건 값도 잘 못 깎았어요. 포도장사를 할 때는 손님이 달라는 대로 다 주는 바람.. 더보기
정주영 부인 변중석 집안과 첫날밤 정주영 부인은 변중석 여사인데, 정주영 고향의 옆마을 출신이죠. 당시 정주영은 경성에서 쌀가게 점원으로 일을 하던 때였고, 둘의 중매는 정주영의 삼촌이 주도합니다. (정주영 회장 넷째 숙부가 당시 이웃마을이었던 변중석 여사와 같은 마을에 살았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정주영 집안은 무척 가난했고, 정주영 아내 변중석 집안은 그나마 좀 사는 편이었죠. (스폰서 링크) . . 1939년 결혼 당시 정주영 나이는 25살, 변중석 나이는 19살이었습니다. 변중석: "아버지께서 윗마을 총각이 서울서 선을 보러 내려왔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방에서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떨고 있었죠." 변중석: "숨을 죽인 채 바깥의 동태를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총각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확 열렸어요." 이때 변중.. 더보기
푸른 잔디를 깔고 난 뒤 정주영의 행동 를 한달만에 건설했고, 또한 부산 유엔군 묘지 보수 작업에 참가하게 됩니다. 당시 6.25때 전사한 미군과 유엔군을 안장한 묘지는 한겨울이었기에 무척 황량했습니다.그런 묘지를 당시 미국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와 유엔사절단이 방문하기로 했고, 미군측은 만리타국의 전쟁으로 전사한 병사들의 묘지가 '초라하게 보이는 것'이 싫었습니다. (스폰서 링크) . . 그래서 '유엔군 묘지 언덕을 푸른 잔디로 깔아달라'라는 황당한 주문을 하게 된 것이죠.(미군 역시 한겨울에 이것이 '불가능한 주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당시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하면서 미국내에서 반전 여론이 일어날까 경계하는 상황이었고, 또한 당시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었음) 결국 정주영은 미군측으로부터 '푸르스름하게만.. 더보기
정주영 가계도와 동생 정인영 정세영 정신영 하지만 이 사업 역시 오래가지를 못합니다. 1942년 일제는 '기업정리령'을 발동했고, 결국 정주영은 공장을 빼앗기게 된 거죠. 이후 정주영은 홀동광산에서 광석을 운반하는 사업을 하면서 3년동안 근근히 버티게 됩니다. 그러다가 광복 후에는 건설사업까지 진출을 했는데, 한동안 잘 나가던 정주영도 다시 6.25로 모든 것을 잃고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스폰서 링크) . . 당시 정주영은 모든 것이 막막한 상황이었는데, 마침 정주영의 동생 정인영이 미군사령부의 통역장교로 일을 하고 있었기에, 미8군의 발주 공사를 맡게 됩니다. 여기서 정주영 동생들의 학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네요.이전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난한 집안 형편상 정주영은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고 '초등학교 졸업'이 최종 학력이 되었습니다... 더보기
사업 초창기때 정주영 회장의 비밀 확실히 십대의 젊은 남자를 움직이는 것은 '사랑'이 아닌가 하네요. 아무튼 마지막 4번째 가출때 정주영은 인천에서 부두노동과 막노동을 하다가 경성 (현재의 서울)으로 가서 쌀가게에 취직하게 됩니다.(스폰서 링크) . . 이때쯤에는 정주영이 변호사가 되는 것을 포기한 것처럼, 정주영 아버지도 아들에 대해서는 거의 반포기를 한 상태같네요.(정주영의 첫사랑은 나중에 정주영이 대북 사업을 하는 중요한 원동력중의 하나가 됩니다.) 이후 정주영은 여러가지 일을 하게 되지만, 성공만을 맛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선 정주영의 성실성을 눈여겨본 쌀가게 주인은 아들이 아닌 점원이었던 정주영에게 쌀가게를 넘기게 됩니다. 쌀가게 주인집 아들은 여자에 빠져서 가산을 탕진했던 반면에, 정주영은 '성실한 배달원', '장부를 쓸 줄.. 더보기
정주영 아버지와 집안 사정 반면에 정주영 회장은 그의 고백처럼 '막노동자' 출신이었죠. 정주영은 농사꾼의 맏아들로 태어나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 종일 고된 농사일을 하게 됩니다.그런 가난이 싫어서 가출을 감행했는데, 무려 4번의 시도를 했지만, 대부분 정주영의 아버지가 집나간 아들을 잡아서 집으로 데려오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스폰서 링크) . . 정주영: "가난이 싫어요. 전 외지에서 돈을 벌거에요." 정주영 아버지: "넌 우리 집안의 장남이다. 농사꾼이 농사를 지어야지, 외지에서 무엇을 한단 말이냐?" 사실 정주영 아버지에게도 나름 사정이 있었습니다.본인이 7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농사일을 해서 여섯명의 동생들을 분가시킨, 나름의 '성공 철학'을 갖고 있었죠. 그래서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정주영 역시 자신을 도와서.. 더보기
정주영과 이병철의 사이가 나빴던 이유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은 1915년 11월 25일 태어나 2001년 3월 21일 사망하게 됩니다. 향년 85세 정주영 고향은 강원도 통천군(현재는 북한 지역임) 정주영 학력 학교 - 강원도 통천송전소학교 졸업(정주영 최종 학력은 오늘날의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임) (스폰서 링크) . . 우리나라 1세대 기업인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들은 바로 정주영과 이병철입니다. '이기는 정주영, 지지 않는 이병철' 책처럼, 두 사람의 라이벌 관계를 다루는 책들도 세간의 관심을 엄청 받을 정도였죠. 그렇다면 정주영과 이병철의 실제 관계는 어땠을까요?원래 두 사람 관계는 좀 서먹서먹한 관계였다고 합니다. 현대와 삼성의 사업 분야가 겹치지 않았기에, 두 사람이 서로 직접적인 경쟁을 한 적은 없지만, 우리나라 재벌을 대표하는 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