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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인 이야기/구인회

구광모 부인 정효정 결혼 비하인드 스토리 LG그룹의 제4세대 지도자 수업을 받고 있는 구광모 상무는 좀 특이한 사람입니다.이전 글에서 구광모가 구본무의 양자가 된 이유를 설명했는데, 그만큼 LG그룹은 유교적인 가풍이 확고부동한 집안입니다. 장자 상속의 원칙을 지키기 위하여 구본무가 동생의 아들 (즉, 자신의 친조카)을 양자로 들이고, 후계자 수업을 할 정도니까요. (스폰서 링크) . . 그런데 그런 유교적인 집안에서 구광모는 좀 독특한 사람입니다. (LG황태자 구광모)원래 LG의 구씨 집안 사람들은 대대로 어른들이 정해준 상대와 결혼을 합니다. 구자경이 부인 하정임과 결혼한 것이나, 구본무가 부인 김영식과 결혼한 것이나, 그외 구씨 집안의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어른들의 결정에 따라서 결혼을 했죠. LG그룹 구광모 상무 사진 그런데 구광모는 좀 .. 더보기
구인회 구자경 어록과 LG그룹의 기업정신 마지막으로 LG그룹 창업주 구인회의 어록입니다. "한번 사귄 사람과는 헤어지지 말고, 부득이 헤어진다면 적이 되지 말라." 그리고 구인회의 동업자라고 할 수 있는 허만정의 유훈입니다. "(사업의) 경영은 구씨 집안이 알아서 잘한다. (내 자손들인 허씨들은) 처신을 잘해서 돕는 일에만 충실하라." (스폰서 링크) . . 둘 다 하나같이 인화를 강조했고, 자손들이 그런 선조의 뜻을 잘 따랐기에, 오늘날의 LG가와 GS가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구인회가 바라본 '부'란 순환원리에 의하여 흘러가는 것이었습니다.단순히 부에 대하여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귀하게 여길 대상이고, 부를 일궈내고 지키는 정신이 실제로 얼마를 쓰느냐의 문제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 . 즉, 작은 돈도 중요하게 여기고 땀의 소중.. 더보기
구본무 딸 아들과 양자 이유 그리고 구인회의 아들 구자경이 1995년 물러나고 그룹 경영권은 구자경의 아들 구본무에게 넘어갑니다. 이때에도 LG그룹은 다른 재벌들과는 다르게, 별다른 불협화음없이 매끄럽게 경영권 승계가 마무리됩니다. 특히, LG그룹은 오너 일가가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잘 하고 있고, 지주회사 체제 전환도 매끄럽게 진행했기에, 재벌치고는 욕을 덜 먹는 편입니다. (스폰서 링크) . . 물론 LG그룹에게도 비정규직 대우 문제나 하청업체 착취 논란 문제, 그리고 비자금 조성 문제 등의 비판할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재벌 대기업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죠. 참고로 제 3대 회장 구본무에게는 딸만 2명이 있습니다.(원래 구본무에게 친아들 구광모가 있었는데, 19살이 되던 해에 요절하게 됨) . . LG는 유.. 더보기
허씨 집안과 구씨 집안의 관계 또한, 허씨 집안 사람들 역시 유교적인 가풍이 강한 집안이었습니다.(이전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허만정 등은 구인회와 동업을 하기 전부터 백산상회라는 위장 회사를 만들어서 독립자금을 조달하는 등, 양 가문이 굉장히 비슷한 면이 많았음) 아무튼 LG그룹내에서 함께 일할 때도 허씨 집안 사람들은 몸가짐에 각별하게 신경을 씁니다. (스폰서 링크) . .우선 허씨 일가의 대표격인 허준구는 구인회의 장남 구자경보다 2살 연상이고, 또한 LG그룹에 4년 먼저 몸을 담게 됩니다.창업공신중의 창업공신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럼에도 허준구는 항상 구자경 앞에 나서는 법이 없었고, 회사내에서는 더없이 깍듯하게 대합니다. 또한, 구씨 집안 사람들 역시 허씨 집안 사람들을 대우함에 소홀함이 없도록 신경을 씁니다. 생전에 연암 구.. 더보기
GS회장 허창수 집안 가풍 이야기 이번에는 구인회의 사돈 겸 동업자였던 허만정에 대하여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전 글에서 소개한 것처럼, 허만정은 일본 유학을 막 마치고 돌아온 셋째 아들 허준구를 사돈 관계인 구인회에게 맡기고, 본격적으로 자금을 투자합니다. (참고로 허만정은 구인회의 장인 허만식의 6촌이었고, 그 아들 허준구 역시 구인회 동생 구철회의 맏사위임) (스폰서 링크) . . 이 때 허준구는 구인회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허준구는) 금전을 관리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 GS 회장 허창수 사진 결국 구인회는 회사의 모든 장부를 허준구에게 일임하고 지출과 관련된 일은 모두 허준구에게 맡길 정도로 그를 신임할 정도가 되었죠. (이후 허씨 집안에서 둘째 아들인 허학구를 비롯하여 동생과 조카들인 신구, 완구 등도 뒤.. 더보기
구인회 회장이 딸을 호되게 꾸짖은 이유 그리고 이 덕분에 구자경은 재벌 2세대 총수중에서 현장일을 가장 자세하게 아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참고로 부자간의 나이차이가 불과 18살이었고 아버지의 사업을 초창기부터 도왔기에, 구자경을 우리나라 창업 1.5세대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음) 또한, 구인회가 딸에게 호통을 친 일 역시 그의 평소 인품을 잘 알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스폰서 링크) . . 원래 구순자는 구인회의 4녀인데, 어느날 구인회가 대학생이 된 구순자와 함께 외출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구순자가 갑자기 아버지의 와이셔츠가 운전 기사의 그것과 똑같은 것을 발견하고는 아버지를 놀렸습니다. 이에 구인회는 크게 화를 내면서"대학교까지 다니면서 경우도 모르고 그런 말을 하느냐!"라고 딸을 엄하게 꾸짖었죠. 그리고 민망해하는 .. 더보기
구자경 회장이 초년에 고생을 많이 한 이유 이후에도 LG는 구인회가 처음 만든 화학과 전자를 양대축으로 계속 성장, 발전해 나갑니다. 우선 2015년 기준으로 삼성그룹의 매출액은 271조 9천억원, 현대차그룹은 171조 4천억원, 그리고 LG그룹의 경우는 114조 3천억원 등을 마크했습니다. 만약 LG그룹이 1997년 반도체를 빼앗기지 않고 금융 부문을 포기하지 않았으며,그리고 2003년 이후 GS, LS, LIG 등의 방계 그룹등이 분리되지 않았다면, 그룹의 외형적인 면에서는 삼성과 현대와 여전히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네요. (스폰서 링크) . . 참고로, 구인회는 자녀 교육을 어떻게 시켰을까요?먼저, 구인회의 장남 구자경은 해방 전에 소학교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구인회가 크림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낮에는 학교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일손이.. 더보기
구인회 사망 이유 하지만 구인회는 한창 때인 1969년 12월 31일 63살의 나이로 사망하고 맙니다. 당시만해도 불치병이었던 뇌종양으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죠. 불과 48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SK 창업주 최종건 회장과 더불어 재벌 1세대중에서는 가장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기업가 중의 한명이 아닌가 합니다. (스폰서 링크) . . 구인회의 급작스러운 별세로 사람들은 모두 LG의 승계 과정을 주목하게 됩니다. 당시 LG그룹에는 (당시의 이름은 럭키금성그룹이었음) 구인회의 쟁쟁한 동생들 6명이 버티고 있었고, 구인회의 아들 딸들도 6남 4녀가 되었으며, 게다가 공동 창업자였던 허씨 집안 사람들 역시 많았기 때문에, 분명히 '경영권 다툼'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죠. . . 하지만 구씨 일가는.. 더보기
LG그룹 승진 인사의 비밀 이에 모두를 물리친 구인회 회장은 장남 구자경을 호되게 꾸짖습니다."이게 싸운다고 해결될 문제냐? 자고로 덕이 있는 지도자는 싸울 때도 인화를 생각한다. 이렇게 하면서, 어떻게 앞으로 우리 그룹 전체를 이끌어 가겠느냐!" 이에 구자경 역시 아버지에게 잘못을 빌게 됩니다. (스폰서 링크) . . 구인회가 아들을 꾸짖기는 했지만, 여전히 라디오 캐비닛 사건의 해결책은 찾지 못했습니다.중남미 수출품이었기 때문에, 하루 빨리 해결책을 찾아야 했던 사건이었죠. 그런데 당시 구인회는 '희한한 인사 발령'을 발표합니다. . . 바로 락희화학의 구자경 전무는 금성사 부사장 자리로,그리고 금성사의 박승찬 전무는 락희화학의 부사장 자리로 발령을 낸 것이죠. 결국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한단계 승진한 두 사람의 기분이 나쁠 까.. 더보기
국내 최초로 기업공개를 한 구인회 당시만해도 회사가 남에게 넘어갈 수도 있다고 걱정이 많았죠. 하지만 구인회는 1년동안 회사내부의 인사들을 모두 설득했고(참고로 여러 차례 언급한 것처럼, LG그룹은 구인회의 동생들을 비롯하여 허씨 가문의 여러 인사들이 참여한 회사이기 때문에 구인회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경우에는 리더쉽의 훼손이 일어날 수 있음) (스폰서 링크) . . 결국 1969년 우리나라 최초로 기업공개에 성공하게 됩니다. 사실 구인회는 인화를 무척 강조한 경영자였습니다.구인회의 용인술을 잘 나타낸 사건이 바로 1968년 '라디오 캐비닛 사건'이었습니다. . . 당시 구인회 회장의 장남 구자경은 락희화학 전무를 맡고 있었고, 박승찬은 금성사 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남미로 수출한 라디오의 캐비닛 1000여개가 망가지는 사건이 .. 더보기
정유사업까지 완성한 구인회 사실 석유사업은 섬유와 플라스틱 제품, 합성세제 등의 기초가 되는 사업입니다. 이런 사업들의 원료들이 결국 석유에서 출발하고, 폴리에틸렌과 나프타 분해 등등의 정유 사업이 모든 것을 망라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당시 정유 사업은 국가기간사업이었습니다.당시 한국에서는 유공이라는 국영회사 단 하나만 존재하던 시절이었죠. (스폰서 링크) . . 이에 구인회는 국가의 허락을 얻어서 정유사업에 진출합니다.사실 당시 구인회는 박정희 정권의 '제2정유공장 공모전'에 공식 입찰을 해서 사업권을 따냈는데, 당시만해도 군사정권의 특혜에 가까웠죠. 아무튼 이때 구인회의 호남정유가 사업권을 따게 되었고(참고로 LG그룹의 사업 초창기에는 개별 기업의 이름들이 달랐음. 화학과 플라스틱 등은 락희화학, 전자는 금성사, 그리고 에너지.. 더보기
구인회 정주영 - 후대의 반도체 다툼 실제로, 반도체는 LG그룹에게 통한의 역사입니다. 당시까지 LG에서는 반도체 투자를 공격적으로 하고 있었고, 구본무 당시 회장 역시 결사적으로 반도체를 지키려고 했지만, 결국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의 압력과 김대중과의 독대 이후 LG는 전격적으로 반도체를 포기하게 되었죠. (스폰서 링크) . . 구자경 LG 명예회장: "반도체를 잘하고 있는데 누가 욕심을 부려서 빼앗아갔어요. 자기 욕심 때문에 우리 반도체를 한번 먹어보겠다고 나선 겁니다." 구자경 회장: "소떼를 몰고 북으로 가고 돈을 쓰더니... 우린 안 된다고 버티다가 결국 포기했어요. 그래서 정치적으로 얻어맞지는 않았지요." 이처럼 당시 정주영의 현대가 김대중 정권의 입맛에 맞는 북한 사업을 했고, 이 덕분에 김대중 정권에서는 현대에게 반도.. 더보기
삼성이 LG를 이긴 이유 원래 이병철과 박정희의 관계가 그리 부드럽지 않았기 때문이죠. 이맹희 (이병철의 장남): "박정희 대통령은 아버지를 “설탕과 밀가루 같은 소비재 장사나 하는 사람”이라 폄하했고, 아버지 역시 박정희 대통령을 “만주사관학교를 나온 천박한 군인으로 여겨 서로 껄끄러운 사이였다." (스폰서 링크) . . 아무튼 삼성전자가 세워지고 본격적으로 LG전자 (당시에는 금성사)와 경쟁을 시작하지만, 삼성전자는 매년 2등을 면치 못합니다. 라디오뿐만 아니라 세탁기, TV 등 생활 가전 전분야에서 삼성은 LG의 아성을 넘을 수가 없었죠.그러다가 1975년 삼성이 '이코노TV'를 출시하면서 TV부문에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 (당시 보통 TV는 전원을 넣은 다음에 20초가 지난 다음에 화면이 나왔는데, 삼성TV의 .. 더보기
이병철은 구인회를 버리고 방송을 얻었지만 그 외에도 구인회는 1960년대 초반에 이병철의 제안으로 방송 사업을 동업하게 됩니다.1964년 두 사람의 지분 50대 50으로 ‘라디오서울’과 ‘동양TV’를 설립했죠. 하지만, 두 그룹 사이의 알력이 심해서 결국 라디오는 삼성이, TV는 럭키가 하기로 합의를 봅니다.그런데 당시 전망이 밝은 쪽은 방송 사업이었고, 결국 이병철은 언론 사업 재편을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죠. (스폰서 링크) . . 결국 구인회는 이병철을 찾아가서 "자네가 다 (라디오와 TV) 하게. 자네 생각대로 다 하게."라고 하면서, 방송 사업에서 손을 털고 나가게 됩니다. 아마 구인회는 이병철의 전자산업 진출이 단순히 사돈의 사업 영역을 침입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이병철의 평소 여러 행동들이 못마땅했기 때문에 화를 낸 것이 아닌가.. 더보기
구인회와 이병철이 대판 싸운 이유 일단은 세간에 알려진 일화들입니다. 이맹희 (이병철 회장 큰아들): "(1968년 봄 안양 골프장) 야외 테이블에서 아버지(이병철 회장)와 구(인회) 회장님, 내가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다가, 아버지가 전자산업에 이야기를 꺼냈다." (스폰서 링크) . . 이맹희: "‘구 사장, 앞으로 우리도 전자산업을 하려고 하네.’ (중략) 당시 구 회장님은 화를 벌컥 내면서 ‘(이익이) 남으니까 하려고 하지’라고 느닷없이 쏘아붙였다. 즉, 이익이 보이니까 사돈이 하는 사업에 끼어들려고 하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이맹희: "(중략) 아버지는 구 회장이 화를 내자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저 민망해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일로 두 분 사이는 아주 멀어졌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하여 훗날 구인회가 남긴 술회.. 더보기
구인회와 이병철이 사돈을 맺은 이유 이렇게 구인회는 화학과 전자를 양 날개로 승승장구하게 됩니다.하지만 이 시기에 실패도 있었는데, 바로 이병철과의 합작 사업이었던 '방송 사업'이었습니다. 원래 이전 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구인회와 이병철은 지수보통학교에서 같이 공부한 사이입니다. (구인회가 이병철보다 3살 연상임) 그리고 나중에 구인회의 셋째 아들인 구자학이 이병철의 둘째 딸 이숙희와 결혼하면서 서로 사돈지간이 되기도 했죠. (스폰서 링크) . . 참고로 구자학은 LG의 구씨 집안 중에서도 좀 특이한 인물입니다. 원래 구자학은 해군사관학교를 나와서 미국으로 유학을 갈 생긱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어른들의 혼사 결정에 순순히 따랐고, 이때부터 주로 삼성에서 근무를 하게 됩니다. 당시 구자학은 제일제당과 동양TV, 중앙개발 등에서 근무를 하.. 더보기
박정희 정권이 LG를 도운 이유 구인회는 여기에 굴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구인회는 1962년 박정희 정권의 공보부 장관 이원우와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참고로 이원우 장관은 구인회의 동생인 구평회와 LG임원 박승찬과 동기동창임. 그래서 평소에도 구인회를 친형처럼 대우함) 이때 이원우는 구인회에게 '국정 홍보'의 어려움을 토로합니다. (스폰서 링크) . . "정부에서 하는 일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고 싶은데, 방법이 없습니다." 이 때 구인회는 '절묘한 수'를 제시합니다."정부의 일에 대한 홍보는 라디오 방송으로 하면 되지요." 이원우 공보부 장관: "하지만 우리나라에 라디오가 있는 집이 많이 없잖아요." 이에 구인회는 정부에 금성사가 만든 라디오 5천대를 기증하기로 제안했고, 이것이 박정희 정권에서 벌인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 더보기
꺾이지 않는 구인회의 신념 이후 3년동안 판매부진으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미제와 일제 밀수 라디오들과 미군 PX 유출 상품들이 시장을 석권하고 있었고, 주요 소비층들 (대부분의 부자들)이 국산 제품에 눈길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죠. 게다가 1961년에는 5.16 군사정변이 일어납니다. (스폰서 링크) . . 구인회 역시 5.16 직후 부정축재자 명단에 끼여 있었고, 어쩔 수 없이 약 3주 동안 사직동의 어느 집 행랑방에 몸을 숨기게 됩니다.그런 구인회를 대신하여 아우 구평회가 교도소에 잡혀 들어간 상황이었죠. 하지만, 5.16 군사 쿠데타 세력은 하루빨리 민심을 잡기 위하여 '경제 건설'을 내걸었고, 사업가들을 풀어주면서 구인회도 예전처럼 다시 활동을 할 수 있게 됩니다. . . 하지만 신규 진출한 라디오 사.. 더보기
LG전자의 태동 1959년 당시 구인회는 신규 사업 아이템을 찾고 있었습니다. 당시 럭키화학의 여러 제품들이 국내에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후발 주자들이 시장에 진입하면서 플라스틱 사업의 마진이 점차 떨어지고 있을 때였죠. 그때 구인회 회장은 우연히 반도호텔의 사무실로 들어서다가 윤욱현 기획실장이 음악을 감상하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스폰서 링크) . . 구인회 회장: "아, (음악 듣는 것이) 그리 좋습니까?"윤욱현 실장: "하하, 이게 정말 좋습니다. 하이파이 전축이라는 건데, 마치 오케스트라가 제 눈앞에서 연주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 순간 구인회 회장은 무릎을 탁 칩니다. "그래요, 이걸(전축) 우리가 만들어 봅시다."그러자 윤육현 실장은 "이건 전자산업 분야인데, (전축을) 하고 싶으시다.. 더보기
럭키금성이 LG그룹 이름이 변하고 "그래서 알아보니, 바로 미군부대로부터 흘러나왔는 합성세제라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락희화학에서는 세탁비누를 판매하고 있었기 때문에 '합성 세제' 사업은 '제 살 깎아먹기 생산'이라는 사내에서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하지만 허신구 상무는 자기 주장을 1년동안이나 굽히지 않았고, 결국 구인회도 허신구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스폰서 링크) . . "그래, 확신이 없지 않으면, 이렇게 1년동안이나 주장을 할 수가 없지." 이렇게 우여곡절끝에 나온 하이타이였지만 초창기 판매는 신통치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새 제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죠. (1966년 4월 발매) 하지만 구인회는 하이타이를 꾸준하게 판매했고, 1966년 연말부터 폭발적인 판매가 시작됩니다.사람들의 입에서 '하이타이'라는 말이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