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남자배우(50대 이상) 결혼 생활

문성근 아버지(부친)문익환 목사와 윤동주 장준하 사연

(1/3) 총 3개의 글중 첫번째 글


영화배우 문성근 아버지 문익환 목사와 윤동주 장준하 선생에 대한 사연입니다.

문성근 집안을 알면 알수록 흥미가 있죠(문성근 부친 문익환 목사와 할아버지 이야기).


(문성근 신해철)

신해철에 대한 포스팅 (새창보기)

신해철 아내 윤원희 암을 이긴 영화같은 사랑


(스폰서 링크)


# 목차

* 문성근 할아버지 문재린 목사

* 문성근 부친 문익환 목사

* 윤동주 장준하 문익환 세 친구의 엇갈린 운명

* 문익환 목사 고문 후유증으로



유라준의 특별한 이야기


영화배우 겸 탤런트 문성근은 1953년 5월 28일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습니다(문성근 고향 일본 도쿄). 올해 64살이죠(문성근 나이).

(문성근 학력 학벌) 보성고등학교 졸업, 서강대학교 무영학과 학사

(문성근 프로필 및 경력) 1985년 연극 '한씨연대기'에서 연극배우로 데뷔


이후 영화 그들도 우리처럼, 비상구가 없다, 101번째 프로포즈,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꽃잎, 오 수정, 한반도, 강철중 공공의 적, 부러진 화살, 남영동 1985, 해무, 협녀 칼의 기억 등과 드라마 매혹, 까레이스키, 신의 저울, 자명고 등에 출연합니다.


특히 문성근은 그것이 알고 싶다의 진행자로 아주 유명했습니다.

(1992년 3월 ~ 1993년 12월, 1997년 10월 ~ 2002년 5월)


영화배우 문성근 사진


* 문성근 할아버지 문재린 목사


문성근 아버지가 그 유명한 문익환 목사인데, 사실 문성근 할아버지 문재린 목사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문성근 집안 종교 기독교(개신교).


문재린 목사는 1896년 함경북도 종성에서 태어난 문재린 목사는 명동중학교, 캐나다 임마누엘 신학교 등을 나와서 목사가 됩니다.

(목화씨로 유명한 문익점의 25대손)(문성근 집안 가족)


목사가 된 문재린은 북간도 명동을 근거로 독립운동과 선교, 교육 활동에 종사합니다. 이런 문재린의 활동에 아들 문익환 목사 역시 큰 영향을 받았죠.

(문재린 목사는 한국 기독교계의 원로로 활동했고, 1970년대에는 민주화 운동에 전념하다가 1985년에 타계함)



* 문성근 부친 문익환 목사


문성근 아버지 문익환 목사 역시 유명한 목사 겸 시인, 민주화 운동가, 평화통일 운동가였습니다.


1918년 6월 1일 만주에서 태어났고,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해방 후에는 성서학자로 '공동 번역 성서' 운동에 개신교측 번역자로 참여합니다.

(문성근 부친 문익환 목사)


그러다가 박정희 정권에서 장준하가 의문사를 당하자 '늦봄'이라는 호를 만든 다음에 박독재, 반박정희 투쟁에 참여하게 됩니다.


참고로 (문성근 아버지) 문익환, 장준하, 윤동주 시인은 어릴 때부터 친구였습니다.

(윤동주 문익환은 명동소학교때부터 친구였고, 장준하는 숭실중학교때부터 다른 2명과 함께하게 됩니다. 숭실중학교는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가 되는데, 윤동주, 장준하, 문익환은 모두 자퇴를 결심하고 학교를 떠나게 됨.)


(두번째 줄 오른쪽부터 윤동주, 문익환, 장준하)


* 윤동주 장준하 문익환 세 친구의 엇갈린 운명


이후 저항시인 윤동주는 불과 29살의 젊은 나이에, 해방을 6개월 남겨두고 일제의 생체실험 의혹 속에서 옥사하고 맙니다(윤동주 1945년 사망).


그리고 장준하는 일제 시대때 학병으로 학병에 끌려갔다가 탈출해서 독립군이 됩니다. 이후에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박정희 정권하인 1975년 8월 약사봉 등산로에서 의문사로 죽게 됩니다.


문성근: "1975년에 장준하 선생이 의문사를 당하셨는데, 함께 동행한 김모씨의 녹음 테잎이 앞뒤가 안맞아 계훈제 선생과 문목(문성근이 친아버지 문익환을 부르는 호칭)이 대화하면서 박정희가 (장준하를) 죽였다고 확신했어요."


(참고로 문성근이 친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문목' 혹은 '문목사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아버지는) 한 가정의 아버지라기보다 민족 지도자로써의 기억이 더 많아 다른 사람들의 호칭대로 쓴다"입니다.

문익환에게 개인적인 가정사는 거의 없었던 것 같네요.)



* 문익환 목사 고문 후유증으로


문성근: "그래서 (아버지는) 장준하 선생 사진을 책상에 놓고 일하셨는데, 1976년 2월에 "(장)준하여, 이번 3.1절에 네가 있으면 뭔가 했을텐데"라고 말을 건네자, "네가 하면 안되냐?"라는 목소리가 들렸대요. 그래서 바로 그 자리에서 (1976년) 3.1 구국선언 초안을 문목이 썼어요."



그렇게 문익환 목사는 장준하의 의문사 이후에 본격적인 반독재, 민주화 평화 통일 운동을 하면서, 전두환 정권에서만 7번의 옥고를 치루게 됩니다. 이때 조사 과정과 감옥에서의 고문때문에, 심각한 후유증을 앓게 되었죠.



1992년 AFSC(미국 친우 봉사회)가 문익환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하지만, 아쉽게 수상하지는 못합니다.


문익환이 1994년 사망함으로써, 세 친구는 모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세 사람이 각각 다른 시기에 세상을 등졌지만, 그들이 남긴 발자취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영원히 남을 것 같습니다.


문성근에 대한 이야기가 2편으로 이어집니다. (2편 새창보기, 2/3)

문성근 부인 강모,문성근 이혼사유와 스캔들


(스폰서 링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