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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이야기들/핫이슈

항왜 사야카 김충선 장군 후손 및 일본교과서의 평가

사실 임진왜란은 명분없는 전쟁이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 정벌'을 기치로 전쟁을 벌였지만, 사실 그 실상은 일본의 전국시대 이후에 팽창된 군사력을 소비하기 위한 전쟁이었죠.


따라서 병사들은 물론이고 다이묘와 사무라이중에서도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임진왜란때의 항왜는 대략 1만명에 다다를 정도로 숫자가 많았음)


사야카 김충선 장군에 대한 글이 1편에서 이어집니다.

김충선 장군의 업적과 이순신과의 서신


(스폰서 링크)



결국 도요토미는 전쟁전부터 나고야성에 전국 다이묘의 아내들을 인질로 잡아놓습니다.

그러자 상당수의 다이묘와 사무라이들이 어쩔 수 없이 조선으로 침략하게 되었죠.


그리고 일본측 기록에는 없는데, 당시 프로이스라는 선교사가 로마에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남아 있습니다.


- 반란자의 처가 나고야성에 인질로 있었는데 그들은 못박혀서 불태웠다.



이때의 반란자가 일본내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인지, 아니면 조선군에게 항복한 무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도요토미에게 반대했다는 이유만으로, 아내(여자)가 못박혀서 불태워졌다니, 너무나 슬픈 역사의 한자락입니다.



참고로 사야카 역시 일본에 가족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선에 항복한 이후, 먼 훗날 그가 남긴 시에는 이런 것들이 있었죠.




남풍이 건듯 불어

행여 고향소식 가져온가

급히 일어나니 그 어인 광풍인가

홀연히 바람 소리만 날 뿐 볼 수가 없네

허탈이 탄식하고 앉았으니

이내 생전에 골육지친骨肉之親 소식을 알 길이 없어

글로 서러워 하노라


-- 김충선의 남풍유감南風有感


사야카 김충선 장군 초상화 사진


가족을 그리워한 또 다른 시도 있습니다.


의중에 결단하고 선산에 하직하고

친척과 이별하며 일곱형제와 두 아내 일시에 다 떠나니

슬픈 마음 서러운 뜻이 없다하면 빈말이라

-- 김충선의 술회가



아마 김충선 역시 조선에 항복한 이후 그의 처자식들이 일본에서 몰살을 당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죠.

다만, 그 당시의 기록은 제대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당대의 일본측이 일부러 기록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후세대가 그런 기록들을 말살한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실제로 일본 역사가들은 이후 사야카(김충선)을 실존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가와미 히로타미(1915년)

"(조선왕조실록 등에) 적혀 있는 글은 위서이며, 사야가 같은 매국노가 우리 동포라는 것이 유감의 극치라고 아니할 수 없다."


역사학자 세데하라 탄(1924년)

"사야가에 관한 확실한 자료는 없다. 이는 실증주의의 폐해며 허구의 인물이다."


일본 위키(2009년)

- 사야카의 존재 자체가 의심스럽다.



(참고로 나카무라 에이코가 1933년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 일기 등을 통하여 사야가가 실존인물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제대로 된 일본 역사학자들은 일찍부터 사야가가 실존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죠.)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혹은 슬픈) 사실이 숨어 있습니다.


사야카(김충선 장군)은 훗날 대구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서 살았고, 여기에 그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집성촌이 존재했습니다(사야가 김충선장군마을).


일제 강점기때 일본 순사들이 여기를 들락거리면서 '일본의 배신자(?)'인 사야카 후손에 대한 탄압을 많이 합니다.


아마 당시에 평범한 조선인들보다 더 많은 탄압을 받지 않았을까 합니다.


대구에 있는 김충선 장군의 서원과 박물관


조선군 갑옷과 왜군 갑옷을 둘 다 입었던 것이, 역사의 비애를 말해주는 것 같네요.



사야가(김충선 장군)의 후손들입니다.


사야가가 항복한 이후 선조로부터 김씨 성을 하사받으면서 본관이 김해인 '김해 김씨'의 시조가 됩니다.


그런데 가야의 '김해 김씨'가 본래 있기 때문에, 이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성 김해 김씨'라고 불리게 되죠.

(사성 뜻-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성)


사야카(김충선)... 자는 선지, 호는 모하당이라고 지음

(모하당 김충선 장군)


이후 사야가는 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하여 5남 1녀를 둡니다.

그리고 대구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서 말년을 보냈고, 여기에 그의 집성촌이 이루어지게 됩니다(사야가 김충선장군마을).


사야가(김충선 장군) 후손으로는 박정희 정부때의 법무무와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김치열, 대학교수 김윤희, 전 AOS 부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김형국 등이 있습니다.

또한, 사성 김해 김씨는 현재 전국적으로 7천여명 정도에 이릅니다.



사야카는 한때 일본으로부터 '가상의 인물', '허구의 인물'이라고 치부되었지만, 근대 이후에는 제대로 평가받게 됩니다.


일본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 사야카를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로 묘사하기도 하죠.


-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에 선 사야카는 1592년 4월, 조선 침입 직후에 일본군을 배반하고 조선군에 투항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사야카는 조선의 예의와 중화 문물이 발달한 모습을 흠모하여 부하를 이끌고 조선에 투항했다고 한다. 또한, 사야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행동에 비판적이었다.


(여기에서의 기록은 조선측의 기록을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 침입 직후가 아니라 1년 후에 투항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  그 뒤 사야카는 조선군에 합류, 일본군과 싸우며 공을 세우고, 김충선이라는 성과 이름을 조선 정부로부터 하사받았다. 당시 항왜는 사야카 뿐만 아니라 상당수에 이르는데 이것은 조선 출병이 오랫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임진왜란이 7년동안 지속되기는 했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쟁 발발 초기부터 항왜가 많았고, 그 수가 1만여명에 이르렀다는 점, 그리고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진정한 목적은 '반대파의 군사력 소모'에 있었다는 점 등으로 당시 일본 내에서도 '명분없는 전쟁'이라고 보는 경향이 강했죠.)



- 항왜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뜻하지 않게 휘말려든 전쟁으로 인생의 기로에 서게 되었고, 그런 이유로 (조선에 대한) 항복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들의 자손은 조선 땅에서 번영했지만, 근대에 이르러 (일본제국에 의한) 한국병합 무렵 일본의 역사가 가운데에는 황국신민으로 그와(사야카) 같은 배신자가 있을리가 없다고 하여 항왜(란 존재)를 역사에서 말살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즉, 일본 교과서에서도 항왜의 존재를 역사에서 말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죠.


아무튼 '명분없는 전쟁'로 큰 피해를 입은 조선 백성들과 그 소용돌이에 휘말려 고향과 가족을 떠나게 된 사야카와 항왜들이 참 안타까운 것 같습니다.


이런 전쟁이 두번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함은 물론이고, 사야카를 비롯한 항왜들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참고로 일본에서의 이순신 장군에 대한 평가는 시대의 변화와 맞물려 극과 극으로 변하게 됩니다.

왜 일본에서 이순신에 대하여 한때는 군신으로, 또 다른 때는 '일개 장수'로 취급을 하였을까요?

오타니 료헤이/명량과 일본의 이순신 장군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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