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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이야기들/핫이슈

송강 정철 생애가 이중적인 이유, 임진왜란의 혼란


송강 정철의 대한 평가는 매우 일반적입니다.

권력욕의 화신, 암군 선조의 개,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 가사문학의 일인자 등


송강 정철은 과격파이면서 매우 잔인했습니다.

반면에 문학 작품속에서는 임금의 사랑을 애걸(?)하는 모습도 나타납니다.

정철은 과연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요?



정철은 1536년 12월 6일(음력) 한성에서 태어나 1593년 12월 18일(음력) 사망하게 됩니다(정철 고향 한양(오늘날 서울))


# 목차

* 어린 시절

* 송강 정철 생애(정철 일대기) 

* 굴곡이 많았던 일생

* 후세의 평가


* 어린 시절


송강 정철의 아버지는 돈령부판관을 역임한 정유침과 죽산 안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송강 정철 외가)


송강 정철 집안은 핵심 권력가에 무척 가까운 권력가였습니다.

정철의 큰누나가 당시 세자(훗날 인종)의 후궁(귀인 정씨)이었고, 셋째 누나가 왕족인 계림군의 부인이었습니다. 또한 정철은 수시로 궁궐을 드나들면서 왕자들의 소꿉친구로 지내게 되었죠.


그러다가 인종이 갑작스럽게 죽고, 어린 명종이 왕위에 오릅니다.

(명종 역시 정철과 소꿉친구로 지낸 사이였음)


그런데 을사사화가 일어나면서, 정철의 집안은 폭삭 망하게 됩니다.

(1545년, 당시 정철 나이 10살)


사건 내용-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과 사림 세력이 어린 명종을 폐하고 새로이 계림군을 임금으로 세우려 한다는 모함으로 정치적 반대파를 숙청함



결국 계림군은 능지처참형을 받게 되었고(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정철의 셋째 누나의 남편입니다), 정철의 아버지 정유침은 함경도 정평으로, 당시 이조정랑이었던 정철의 큰 형은 전라도 광양으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큰형은 2년뒤에 함경도 경원으로 다른 유배지를 가는 도중에, 매 맞는 상처가 도져 사망하게 됨)


어린 정철은 아버지를 따라 유배를 같이 다니게 됩니다.

2년 뒤(정철 12살때) '양재역 벽서사건(내용- 문정왕후가 어린 임금 위에 앉아 권력을 농단하고 있다는 내용이 적힌 벽서)이 터지자, 정철 아버지는 경상도 영일로 다시 유배를 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1551년(정철 16살때)때에서야 비로서 정철 아버지는 유배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결국 정철의 아버지는 가족들을 이끌고 부모의 묘소가 있는 전남 담양군 창평면으로 이사를 했고, 정철은 우연히 사촌(沙村) 김윤제를 만나서 그의 제자가 됩니다.

훗날 중세 가사문학의 일인자라고 평가받는 정철이, 김윤제를 만나서 비로서 제대로된 학문의 기초를 닦은 것이죠.



이상과 같이 정철은 어린 시절 궁궐과 매우 가까운 생활을 했고, 이후 어린 나이에 처참한 유배생활도 하게 됩니다.

이런 경험이 정철로 하여금, 반대파들에 대하여 '털끝만큼도 용서하지 않는 잔인함'과 '임금에 대한 무조건적인 구애'라는 이중적인 모습을 낳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 송강 정철 생애(정철 일대기) 


정철은 1562년(당시 30살)에 문과에 급제한 다음에 사헌부지평을 거쳐 성균관 전적 등을 역임합니다.

(이 당시 임금이 명종이었는데, 어린 시절 소꿉동무가 장원 급제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뻐했다고 합니다.)


이후 정철은 여러 관직을 전전했는데, 직설적인 성격과 화법으로 원수를 많이 만들게 됩니다.


율곡 이이: "제발 술을 끊도록 하고 말을 함부로 하는 버릇을 없애라."

라고 충고를 했을 정도로 정철은 알콜 중독에 '가시돋친 말'을 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참고로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은 한글로 지어진 중세 가사문학의 봉우리로 평가받는 작품이지만, 작품 내용은 관동의 여러 곳을 거닐고 풍류를 즐기며 임금의 은애한다는 내용이었죠.

(송강 정철 시, 시조... 강원도 관찰사 당시에 지음)



그러다가 1589년 정여립의 난이 발생합니다.

당시 정철은 동인들로부터 조정 내부에 파당을 만들고 나라 일을 그르친다는 비판을 받고 벼슬에서 물러난 상태였습니다(1585년).


그런데 정여립의 난이 발생하자, "정언신이 정여립의 일가이니 재판관으로 적당하지 않으므로 교체해야 한다."라고 주장했고, 결국 선조는 정언신 대신에 정철을 우의정으로 삼아서 재판을 맡깁니다.


이 정여립의 사건(기축옥사)을 정철은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원래 조선의 법에는 '아이와 노인은 고문하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지만, 정철은 이를 무시하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도륙하고 개인적인 원한까지도 풀어버립니다.


(일각에서는 강대해진 동인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선조가 정철의 손을 빌어서 숙청을 했다는 시각도 있음. 어쨌든 정철은 본인의 잔인한 성격 및 임금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을 나타내며, 선조의 뜻을 제대로 이행함)


기축옥사 결과- 천여명의 사람들이 처형되거나 옥사함



이때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불과 3년 전이었죠.

(임진왜란 발발 1592년)


일본은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조선을 노리고 있었음에 반하여, 조선에서는 당쟁이나 하면서 내부적으로 힘을 소모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정철은 선조의 '날카로운 칼' 역할을 했고요.



이중환 주장: "정철은 동인 중에 평소에 과격한 자들을 모두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다. 이 때문에 조정이 텅 비게 되었다."


송강 정철, 드라마 징비록의 한 장면


* 굴곡이 많았던 일생


기축옥사 직후, 선조는 자신의 뜻대로 동인 세력을 정리한 정철을 쫓아냅니다.

(강계로 귀양을 보냄)


이후 다시 복귀되었다가 1591년에는 왕세자 책봉 문제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다시 명천으로 유배됩니다.


정철은 광해군을 세자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선조는 내심 신성군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선조: "짐이 아직 마흔도 안되었는데 경이 세자 세우기를 청하니 어쩌자는 것이냐?"



이후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다시 정철을 불렀고, 정철은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합니다. 그리고 충청 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내기도 했지만, 다시 탄핵을 받아 강화도에 칩거하게 됩니다.

결국 이듬해(1593년) 12월 강화도에서 병사하게 됩니다.

(향년 58세)


그리고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에 묻히게 됩니다(송강 정철 묘소).

(조선 현종 6년에 후손 정양이 이장을 함)

(1996년 1월 5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 106로 지정됨)


송강 정철 무덤

* 후세의 평가


말년이 그리 행복해 보이지는 않네요.

어린 시절의 경험때문인지 권력에 대단히 민감하였고, 정치적 라이벌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했습니다.

그가 일찍 죽어서 임진왜란의 혼란을 더 부채질하지 못한 것은 다행이었고, 그가 늦게 죽어서 조선 선조때의 당쟁이 격화된 것은 불행이엇습니다.


비록 중세 가사문학의 일인자이며, 현재까지도 관동별곡, (송강 정철)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의 여러 작품들이 전해지고 있지만, 문학 작품외에 인간적인 평가는 별로 좋지 않은 사람중의 하나이죠.



정철을 보면서 정치가들이 경계해야 하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권력만을 쫓는 행동(당시에는 왕의 은총을 받기 위한 행동)'은 백성들과 국가에 피해만 준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정치가들에게도 정철은 훌륭한 반면교사의 역할을 할 것 같네요.


다만 국민들이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인지, 오늘날에도 정철처럼 자기 이익만을 위하여 일하는 정치가가 있음에도, 국민들은 별 관심이 없네요.


또다시 정철 생애의 혼란, 기축사옥을 비롯한 혼란과 임진왜란과 같은 큰 고난이 다시 발발할까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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