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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 이순신을 모함했나? 서애 유성룡 징비록의 진실과 거짓

역사적인 인물 류성룡

서애 류성룡에 대한 의견이 분분합니다.

일각에서는 그를 뛰어난 명재상으로, 또 일각에서는 류성룡이 이순신을 모함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과연 류성룡에 대한 진실은 무엇일까요?



류성룡(두음법칙으로 서애 유성룡이 되기도 함)은 1542년 10월 1일(음력) 경상도 의성에서 태어납니다.

류성룡 본관은 풍산, 호는 서애이고 자는 이현이며, 조선의 5대 명재상 중의 한명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 목차

* 류성룡 십만양병설 반대?

* 류성룡은 인재 천거의 달인이다?

* 류성룡 이순신 모함했다?

* 비운의 이순신- 마지막 날의 심경

* 류성룡 류시원

* 류성룡 징비록 뜻



* 류성룡 십만양병설 반대?


잘 알려진 것처럼 십만양병설은 율곡 이이가 주장한 것입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전에 이이가 십만명의 정병을 양성하여, 외적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류성룡이 이에 대해 반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요?



역사적인 기록을 살펴보면, 이이가 '십만양병'을 주장했다는 증거는 찾기가 힘듭니다. 이이가 올렸던 각종 상소문과 그가 쓴 문집에도 십만양병설은 나오지 않았죠.


다만 상소문에 가끔 '양병', 즉, 군사를 길러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는데, 이것은 당시 대부분의 대신들이 주장했던 일반적인 군사력 강화책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선조실록의 기록을 살펴봐도, 이이는 1583년 시무 6조에서 양병해야 한다는 주장은 했지만, 10만명이라는 구체적인 숫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또한 내용 역시 양민부터 양병해야 한다는 당시 보편적인 의견중의 하나일 뿐이었음.)


그런데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이 1597년 편찬한 율곡행장에서 '십만양병설'이 처음 나왔고, 이후 서인들의 문집에 많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아마 이이의 사후, 이이를 신격화하기 위하여, 그리고 너무나 큰 피해를 입은 임진왜란에 대한 아쉬움으로 '이이의 십만양병설'이 나오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따라서 류성룡이 십만양병설을 반대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성룡의 임진왜란에 대한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에 조선은 일본으로 통신사를 보냅니다.

이때 류성룡과 같은 당파(동인, 후에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짐)였던 김성일은 '왜군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고, 류성룡 역시 김성일의 의견을 지지합니다.


결국 조선은 거의 무방비상태에서 외적의 침입을 받게 된 것이죠.



후에 류성룡은 자신의 책 징비록에서 당시 김성일에 대한 변호(?)를 합니다.

- 괜히 일 벌려서 쓸데없이 백성들 불안해 할까봐 그랬다.


하지만 이것은 변명일 뿐이죠.

백성들이 불안해 하면, 쳐들어올 적들이 쳐들어오지 않습니까?


결국 백성들과 조선 전체가 막대한 피해를 입고 말았네요.




* 류성룡은 인재 천거의 달인이다?


그런데 류성룡은 대외적으로는 왜군이 쳐들어오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했지만, 그나마 몇가지 방비책을 세웁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좋은 인재를 천거했는데, 충무공 이순신이나 권율이 그러한 예입니다.


잘 알려졌다시피 이순신이 바다를 막지 못했으면, 일본군은 남해와 서해를 통하여 한양을 공격할 수도, 또 일본의 지상군에게 보급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순신을 천거했던 류성룡의 공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는 부분이죠.



참고로 이순신과 류성룡은 어린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류성룡이 이순신의 친형인 이요신의 친구였고, 류성룡이 이순신보다 3살 연장자였음)


따라서 평소에 이순신의 재능을 잘 알고 있었던 류성룡이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순신을 '파격적으로 승진'시키는 것이 가능했죠.



그런데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류성룡이 '인재를 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임진왜란 발발전에 류성룡은 이순신뿐만 아니라 원균 역시 천거합니다.

즉, 전라도는 이순신이, 경상도는 원균이 막는다는 기본적인 전략을 가지고 있었죠(류성룡 전략).


하지만 잘 알려진 것처럼, 원균은 전쟁 발발 초기부터 별다른 공을 세우지 못하고, 나중에 이순신이 백의종군하게 될 때, 조선 수군을 말아먹고 맙니다.


류성룡이 인재 천거의 달인이기는 하지만, 완벽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보기 힘든 것 같네요.



* 류성룡 이순신 모함했다?


종종 류성룡이 이순신 장군을 모함했다, 혹은 이순신이 역적으로 몰렸을 때 류성룡이 유일하게 이순신을 변호했다... 등의 매우 이질적인 주장이 인터넷에 난무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둘다 틀린 의견들입니다.



이순신이 남해와 서해의 제해권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주위의 모함을 받아서 삭탈관직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류성룡 역시 이순신을 공격(?)합니다.



류성룡: "성품이 굽히기를 좋아하지 않아 제법 취할 만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느 곳 수령으로 있을 때 신이 수사로 천거했습니다(이순신이 원래 정읍현감으로 있다가 류성룡의 천거로 전라좌수사가 됨). (중략) 무장은 지기가 교만해지면 쓸 수가 없게 됩니다."


류성룡: "거제에 들어가 지켰다면 영등·김해의 적이 반드시 두려워하였을 것인데 오랫동안 한산에 머물면서 별로 하는 일이 없었고 이번 바닷길도 역시 요격하지 않았으니, 어찌 죄가 없다고 하겠습니까(즉, 조정의 명을 어긴 이순신의 죄를 탄핵함). 다만 체대(遞代)하는 사이에 사세가 어려울 것 같기 때문에 전일에 그렇게 계달하였던 것입니다. 비변사로서 어찌 이순신 하나를 비호하겠습니까."



당시 이순신 장군은 선조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힌 상태였고(선조란 밥버러지는 임금인 주제에 신하들이 잘하면 오히려 질투하는 이상한 습관이 있었음. 자기 자리가 위태롭다는 피해망상증이었던 것 같음), 결국 이순신의 목숨이 바람앞의 등불이었을 때, 류성룡은 주위에 편승해서 '이순신을 모함'하게 됩니다.


실제로 정탁과 이원익의 목숨 건 변호가 없었다면, 이순신의 목숨은 장담하기 어려웠던 상황이었죠.


다만 류성룡이 이순신의 공을 시기해서 이런 모함을 한 것이 아니라, 당시 대세를 따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 비운의 이순신- 마지막 날의 심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성룡이 무책임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훗날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국가가 보존된 것은 오로지 남해 해전에서의 승리 때문이었다."


즉, 류성룡만큼 이순신과 수군의 중요성을 몰랐던 사람이 없었고, 그렇다면 류성룡은 목숨걸고 이순신을 변호했어야 했는데, 대세를 따르다보니 그러지 못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죠.



사실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면, 그가 얼마나 류성룡에게 의지를 했는지 잘 나타납니다. 류성룡과 수시로 서신을 주고 받으며 의견을 교환했고, 심지어 꿈에서까지 류성룡이 나타날 정도였으니까요.



훗날 임진왜란이 거의 끝나갈 무렵 영의정이었던 류성룡은 이산해와 정인홍의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되어 낙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노량해전이 벌어지고 이순신이 전사하게 됩니다.


아마 당시의 통신 체계를 봐서, 류성룡의 삭탈관직에 대해서 이순신이 알지는 못했을 겁니다.

다만, 삭탈관직 전후로 류성룡의 정치적인 입지가 갈수록 줄어든다는 것은 이순신을 크게 불안하게 만들었을 것 같네요.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밥버러지 임금 선조는 이순신을 질투하고 있었기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이순신이 어떤 모함을 받아 목숨을 잃을지 모르니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해서는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선조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습니다.



* 류성룡 류시원


참고로 오늘날 류성룡 후손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배우 류시원은 류성룡의 후손이 아닙니다. 류시원은 류성룡의 친형인 류운룡의 직계 후손이죠.

(즉, 탤런트 류시원은 류성룡의 방계 후손임)



* 류성룡 징비록 뜻


어쨌든 이순신 탄핵사건에서 류성룡 역시 주위에 편승했던 죄과는 분명 있지만, 그는 임진왜란 내내 큰 공을 세웠습니다.


먼저 영의정 겸 도체찰사(오늘날의 군 총사령관)가 되어서, 류성룡은 조선군과 명군에게 군량을 공급하고, 전란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을 달래어 주었으며, 면천법 등을 시행하여 병력을 확충하기도 합니다.



또한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직업 군인을 양성하는데, 훈련도감은 조선 후기까지 조선의 군사 시스템에서 매우 큰 역할을 합니다.


그 외에도 류성룡에게는 실용적인 측면도 있었습니다.

훗날 미국의 사학자 헐버트가 한국의 4대 발명품으로 금속활자, 거북선, 한글, 부교를 꼽았는데, 이 부교가 바로 류성룡이 만든 임진강 부교가 시초입니다.


임진강에 군량과 군수물자를 하루빨리 이동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류성룡이 이 부교를 만들어서 후방 지원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것이죠.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류성룡은 임진왜란 막바지에 삭탈관직된 고향으로 돌아가 징비록을 저술합니다.


징비록 뜻 - '징비(懲毖)'는 시경(詩經) 소비편(小毖篇)의 “나를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懲而毖役患)”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국난을 겪은 뒤 류성룡이 후손들에게 교훈을 전하기 위하여 지은 책이죠.


우리나라 국보 제 13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류성룡은 약간의 죄과는 분명 있지만, 과보다 공이 훨씬 큰 인물입니다.

다만 역사적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무작정 신성시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피해야 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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