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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가수(50대 이상) 결혼 생활

한대수 부인(아내) 옥사나 알페로바 인생과 한대수 아버지 한창석

한대수 옥사나 알페로바 러브스토리 및 인생 이야기

가수 한대수의 경우는 삶이 굴곡으로 넘쳐납니다.

대저택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기도 했고, 불과 며칠만에 빈민가에서 굶주린 생활을 하기도 했죠.

이런 롤러코스터 같은 생활속에서도 히피의 가치관이 변하지 않았던 그가, 거의 60이 되어서 갑자기 자본주의자가 됩니다.


그런 한대수의 인생과, 핵물리학자였던 한대수 아버지 한창석의 실종 사연이 놀라우면서도 많이 슬프네요.


한대수 아내 사진


가수 한대수는 1948년 3월 12일 경상남도 부산에서 태어납니다(한대수 고향). 올해 67살이죠.

(한대수 종교) 개신교

(한대수 학력 학벌) 부산 남일국민학교 수료, 미국 뉴욕 할렘 구역 P.S 125 초등학교 졸업, 부산 경남중학교 졸업, 경남고등학교 수료, 미국 뉴욕 롱아일랜드 구역 A.G. Berner 고등학교 졸업, 미국 뉴햄프셔 주립대학교 수의과대학 중퇴, 미국 뉴욕 사진전문학교 졸업


(한대수 프로필 및 경력) 1974년 1집 앨범 '멀고 먼 길'(대표곡 물 좀 주소와 행복의 나라로 등이 수록)를 발표하며 가수로 데뷔하지만, 사실 1968년부터 송창식, 윤형주, 조영남 등과 함께 '세시봉'에서 활동합니다.


한국 포크록의 대부이자 살아있는 록의 전설, 진정한 자유인, 한국 최초의 히피 가수 등 그를 수식하는 화려한 말들이 많습니다.


한대수의 1집과 3집이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선정되는 등, 우리나라 대중음악에 신중현과 더불어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던 두명중 한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한대수 사진


* 한대수의 화려한 집안 이력


먼저 한대수는 독특한 정신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언어 선택 역시 좀 남다른데, 보통 '좋다'는 말대신에 '양호하다'는 말을, '돈' 대신에 '화폐'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한대수는 명문 집안 출신입니다.

한대수 할아버지가 1930년대 흔치 않았던 미국 유학생이었죠.

한대수: "당시 할아버지(이름 한영교)는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려고 하셨는데, 언더우드 박사는 신학을 권했지. 음악은 부전공으로 하라고 말이야. 당시 시대적인 요청이었어. 미국에서 신학학위를 받고 귀국해서 연세대학교, 당시는 연희전문이었지. 초대 신학대학장과 대학원장을 겸임했는데, 음악과 사진을 좋아했어요. 할아버지처럼 나도 음악과 사진을 하잖아."


당시 흔치 않은 지식인이었던 한영교(한대수 할아버지)는 미군정 시절 경남도백을 지내기도 합니다.


또한 한대수 아버지 한창석 역시 굉장한 엘리트였습니다.

서울대 공대 재학중 당시 핵물학분야 최고 명문인 미국 코넬대학교로 유학을 떠납니다.


한대수: "우리 엄마 18살, 우리 아버지 19살에 결혼해서 일년 후에 날 낳았어. 백일잔치를 하고 아버지는 스무살 청년으로 서울대 공대에서 미국 코넬대학으로 갔는데, 핵물리학을 전공했어."


한대수: "히로시마 원폭투하 장면을 지켜본 할아버지가 조국의 미래를 위해 핵물리학자가 되라며 적극 권유했기 때문이지."


확실히 미국이 사용한 원폭은 전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고, 당시 소련, 영국, 프랑스 등의 강대국 뿐만 아니라 인도, 파키스탄 등의 제 3세계 국가 역시 총력을 기울여 핵무기를 제작하려고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이 무기 하나만 있으면 재래식 전력의 열세를 순식간에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 한대수 아버지 실종 사건


한대수: "아버지는 미국에서 양호한 물리학자 에드워드 델리의 양호한 제자였지. 집안과 나라의 자랑이란 말이야. 이렇게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던 아버지가 연구를 하다가 실종이 되어 버린 거야."


한대수 아버지 한영교의 실종 사건은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나라 핵물리학자중에 1970년대에 이휘소 박사가 유명합니다.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모델이 되기도 했죠.


하지만 그보다 20여년이나 앞선 시대에 또 한명의 유능한 핵물리학자가 제대로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실종당하고 맙니다.

이때가 한대수가 7살 되던 때였고, 결국 한대수 어머니는 재가를 하게 됩니다.


한대수: "엄마는 19살 나이로 혼자가 된 거야. 그렇게 7년을 계시다가 재가를 하셨어.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살았는데, 어르신들이 대수가 청년이 될 때까지는 연락을 하지 않기로 암묵적인 약속을 했나 봐. 사춘기에 그런 일 있으면 아이에게 안 좋다고 생각하신 거겠지. 엄마가 재가하신 나이가 그래야 수물다섯 살이잖아. 요즘에 보면 아직 애들 같잖아. 하하하."



* 어린 시절의 고독과 아버지 한창석 발견


한대수: "내가 아버지, 엄마 이렇게 좀 불러 보고 싶었어. 난 어려서 그 소리를 한번도 못하고 자란 거지.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아버지라고 부르면 안 되냐고 물었어. 아주 어릴 때지. 할아버지가 허허 웃으시면서 그건 안되지 라고 하시더군... 


한대수: "그래 그건 안 되는 일이지. 할머니를 엄마라고도 할 수 없었어. 아버지는 그런 거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 아버지가 되면 자식을 돌봐야 돼.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식을 버리거나 그래서는 안돼. 그래서는 안돼."


이렇게 고독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한대수는 그의 나이 17살이 되던 해에 겨우 아버지 한창석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대수가 거의 성인이 되었을 때였죠.


그런데 한창석은 완전히 이상했습니다.

롱아일랜드에서 인쇄업을 하는 사업가로 살고 있었던 것이죠(미국명 하워드 한).


한대수: "처음 아버지를 만났을 때, 영어로 말하고 영어로 생각하는, 거죽만 동양인이었다. 그건 정말 신기한 일이었지."


한대수: "누군가에게 세뇌를 당했는지 우리말을 전혀 하지 못했어."



촉망받는 핵물리학자가 하루아침에 직업과 신분을 바꾼 것도 이상하지만, 성년이 되어서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이 한국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더더욱 이상하네요.


한대수: "죽지 않은 게 다행이지, 뭐. 지금도 핵 가지고 저 난리들을 치잖아. 그건 매우 불온한 국가 간의 일이고,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실종 사건은 한국과 미국에서 아마 영원히 봉인되겠지."


사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1950년대는 세계 여러나라에서 핵무기를 탐내던 시절이었고, 미국에서는 핵물리학자들의 신변 보호에 총력을 기울이던 때였습니다.

한창석이 단순하게 실종이 될 수 없었던 시절이었죠.


한대수: "아버지는 자신의 실종 사건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마지막 소원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지만 영어로 '과거는 잊어버리세요. 미래를 생각합시다'라고 말했죠. 한번은 아버지와 취하도록 술을 마시다가 내가 물었죠. '아들로서 알 권리가 있다'고 말이죠. 그때 아버지는 '늦었다. 이제 집에 가자'고 말했어요.""


한대수: "아버지가 핵무기 개발에 중요한 인력으로 일한 뒤 그 기술을 한국에 가져갈까 봐 브레인워싱(brainwashing· 특정 기억을 지워버리는 것)을 당해 자신의 과거를 전혀 모르는 상태가 됐지 않았나 해요. 그렇지 않고야 어떻게 대학 다니다가 유학 간 사람이 한국말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나요.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를 무척 사랑했다고. 그런데 난데없이 백인 여자와 결혼해서 나타나다니, 뭐 다 추측일 수밖에 없지만…."


한대수: "후에 우리 아버지 엄마, 내가 딱 한번 서울에서 모인 적이 있어. 헤어진 지 오십년 만에 말이야."



아들이 핵물리학자가 되어 조국에 이바지하기를 바랬던 한대수 할아버지의 염원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네요.

어찌보면 한대수와 한대수 가족의 불행은 우리나라가 약소국이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 한대수 탤런트 혜전과의 연애와 작사 작곡


한대수는 아버지 한창석을 찾기 위하여 할아버지와 함께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생활합니다. 그 와중에 미국에서 히피 문화를 깊이 받아들였죠.


그리고 한대수는 기성세대에 대하여 반발하는데, 아마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재와 자신의 운명 때문에 더욱 더 그런 반항심이 커졌던 것 같습니다.


한때 사진에 심취했던 한대수는 1968년 21살에 한국으로 돌아와 세시봉에서 활동합니다. 당시 포크록은 번악곡 위주였는데, 한대수는 싱어송라이터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국내에 알렸고, 또 한국 최초의 히피라는 칭호도 받습니다.

그만큼 당시 사람들에게 이질적인 존재였죠.


한대수: "젊은 시절(1968년 경) 내가 미국 뉴욕의 이스턴 빌리지에서 거지처럼 살아가고 있었지. 지금은 부촌이지만 그때만 해도 빈민가였어. 한국에서 외삼촌이 와서 보시고는 너무 한심하니까 나에게 이발비 100달러를 주시더군. 그리고는 엄마에게 알렸어. 결국 엄마때문에 다시 한국으로 들어왔지."


한대수: "큰 사업가의 딸이었던 엄마는 내가 어린 시절에 재가를 하셔서 서울 명륜동의 큰 저택에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 별채가 있었어. 난 거기에서 기타 치고 작곡하면서 아주 잘 살았어, 용돈도 많이 받고. 그 시절 한국에 와서 음악을 한답시고 막 돌아다녔지. 그렇게 해서 김민기, 양희은씨가 내 노래를 불렀지. <행복의 나라로> 같은 노래 말이야."


이렇게 한대수의 노래가 서서히 알려졌고, 한대수 역시 싱어송라이터로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그리고 한대수는 인생을 즐기는데, 본인 역시 그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한대수 과거 사진 젊은 시절


한대수: "방송국에 왔다 갔다 하다가 양호한 여자를 만났지. 한참 젊은 날이니까 양호한 여자를 만나는 거지. 그리고 여자들의 욕망을 만족시켜 줘야 그게 젠틀맨이란 말이야. 그 별채에서 애인하고 연애를 하고 있는데, 하늘에 별이 쏟아지려는 그 순간에, 훅, 엄마가 문을 벌꺽 열더라구. 우하하하. 하늘에 별이 쏟아지려는 그 순간이 뭔 말인지 알지. 야, 미치겠더라구."


한대수의 여자친구(여친)은 당시 탤런트 혜전이었습니다.

방송가에서 유명한 이야기죠.


한대수: "당대 선비 집안의 따님이신 엄마는 '당장 나가'라고 소리 지르고 말이야. 아이고 말도 마. 하여간 그 길로 집에서 쫓겨났어. 그래서 어떡해. 성균관대학 뒤쪽에 있는 판자촌으로 옮겼지. 주인방 옆에 있는 곁방에 쪼그리고 있는데 내 신세가 참 한심하잖아. 화폐도 없고 말이야..."


이렇게 한대수는 미국의 할렘가에서 한국의 대저택, 다시 한국의 판자촌으로 전전을 하게 되네요.


한대수: "거기서 우울한 기분을 날려 버리려고 '좋아, 좋아, 기분이 좋아. 바람아 불어라 불어, 불고 또 불어라.' 이렇게 시작하는 '고무신', 답답하니까 '물 좀 주소'를 거기에서 만들어 불렀어. 한두 시간만에 작사 작곡을 했어. 그땐 집도 사회도 정말 목마르더라구. 1970년대 군사정권 시절이었는데, 그때 장발로 다니니까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있으면 '어, 이 새끼 남자네'라고 놀려대던 시절이었어. 여러 가지로 사회가 답답했어."



* 한대수 아내 김명신과의 운명적인 만남


한대수가 아직 1집을 발표하기 전인 1971년 갑자기 입대영장이 날아옵니다.

그 이전에 방송 출연을 몇번 했고, 한국 최초의 히피 가수라는 이름이 알려졌기에, 독자들로부터 '퇴출'을 시키라는 엄청난 압박을 받고 있을 때였죠.


결국 한대수는 해군(해병대)에 입대해서 3년만인 1974년에 제대를 하게 되었고, 이

때 그동안 작사 작곡해 두었던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 등을 실은 1집 앨범을 발표합니다.


한대수의 1집은 큰 인기를 끌었지만, 1975년 발표된 2집 '고무신'의 전곡이 체제 전복을 꾀한다는 이유로 정부에 의해 전량 회수되었고 판매 금지를 당합니다. 게다가 마스터 테이프마저 압수했기에, 후일 음원 복원조차도 굉장히 힘들게 되었죠.


그리고 2집의 영향으로 이전에 발표되었던 1집 역시 활동 금지를 당하게 되고, 결국 생계가 막막해진 한대수는 아내 김명신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됩니다.



한대수는 아내 김명신을 군대에 입대하기 전의 무명 시절에 만나게 됩니다.


한대수: "그 시절 서유석씨와 자주 공연했던 ‘오비스 캐빈’에서 명신을 처음 만났어요. 저를 보자마자 와인을 사주겠다고 했죠. 그 여자의 초미니스커트와 서구적인 태도가 단박에 제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한대수: "초미니 스커트 차림의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와인을 사주겠다며 위층으로 끌고 갔어요. 홍익대 미대를 나왔고 평범한 인생을 싫어한 여성이었죠. 공연때마다 빨간 레인코트를 입고 먼발치에서 나를 바라보곤 했는데, 우리는 서로 마음이 끌려 사랑하는 사이가 됐어요. 그리곤 장위동에서 당시로선 상상도 할 수 없던 혼전 동거를 시작했죠. 함께 누드 사진을 찍고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열어 밤새 노래부르며 행복을 만끽했어요."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대수는 갑자기 입대 영장이 나왔고, 김명신은 그런 한대수를 3년동안 기다립니다.

결국 한대수는 1974년 제대와 함께 1집 앨범도 발표하고, 김명신과 결혼식도 올립니다(한대수 전부인 전처 김명신 직업 디자이너)(한대수 첫번째 부인 아내).


두 사람 사이에 아이는 없었습니다(한대수 자녀 자식)(한대수 가족관계).



* 한대수의 불륜과 이혼


결국 2집 활동이 막힌 한대수는 부인 김명신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됩니다.


한대수: "미국에서는 뉴욕의 ‘컬러 휠’ ‘크로마 카피’ 등에서 사진작가로도 활동했고 록 밴드 ‘칭기즈칸’을 결성하기도 했어요. 명신은 디스플레이 디자이너로 명성을 얻었고 그녀의 작품들은 미술잡지에도 실릴 정도로 인정을 받았죠. 명신의 관심은 온통 일뿐이었어요."


이렇게 한대수는 사진작가로, 김명신은 디자이너로 생활이 안정되어갈 무렵, 한대수가 그만 외도(불륜)를 하고 맙니다.


한대수: "명신과 지낸 지 14년만의 일이었어요. 명신의 동료 디자이너 보니를 만났고 그만 사랑에 빠졌죠."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김명신은 한대수를 버리고 떠납니다.


한대수: "당시 명신은 커다란 흰 벽에 검은 붓글씨로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써놓고 집을 떠났어요. 결국 제가 명신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빌었고, 다행히 명신은 다시 저를 받아들였죠."



하지만 이 사건은 다시 5년 뒤에 터집니다.

한대수: "5년 후, 이번에는 명신이 이혼을 요구했어요. 명신이 5년전 보니와의 일을 입에 올렸는데, 사실 그것은 변명일 뿐이었고 명신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던 것이죠."(한대수 이혼사유 이혼이유)


결국 김명신은 독일인 모델과 재혼을 하면서 한대수의 곁을 떠납니다(한대수 이혼 1989년).

이 사건 때문인지 한대수는 좀 독특한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한대수: "남자들은 대부분 자존심 때문에 아내가 다른 남자가 생겼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보내줘요. 남자는 결혼생활 중에 여자를 만날 때 잠시 잠깐 쾌락의 도구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여자는 사랑에 빠진다는 게 남자와 다른 점이에요. 다른 남자가 좋다고 떠난 여자들, 남편 떠나서 행복하게 살겠노라고 떠난 여자들 중에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드물어요. 특히 아이를 두고 떠난 경우엔 더 말할 것도 없고요."



한대수의 생각은 언뜻보면 남녀 성차별적인 생각으로 비춰질 수 있으나, 그의 유년 시절을 비추어보면, 단순히 여자에 대한 타박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실종 사건이야 개인의 힘을 뛰어넘는 불가항력적인 권력(?)이 작용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원망은 어느 정도 감추지를 못하네요.


한대수 부인 사진


* 성생활에 대한 자신감 상실과 옥사나 만남


김명신과의 이혼으로 한대수는 정신적인 타격을 크게 받습니다.


한대수: "사실 명신이 새로운 남자 때문에 제 곁을 떠난 이후에 한동안 심한 좌절감에 빠졌어요. ‘혹시 섹스 때문에 아내가 날 떠난 건 아닐까’ ‘섹스 때문에 내가 결혼생활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우울증에 빠졌죠."


한대수는 단골 음식점의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오랜 팬이나 한국에서의 매력적인 젊은 여자와 섹스를 시도하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맙니다.


한대수: "여자들이 지닌 욕망의 현을 제대로 연주하지 못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고 그 죄책감은 더 큰 두려움을 낳았고요."


결국 한대수는 전처의 물건을 처분하면서 어느 정도 정신적인 타격을 극복합니다.

그 즈음 만난게 현재의 부인 옥사나 알페로바(이름)입니다(1992년).



한대수: "미국에서 이탈리아로 이사하기로 한 동료가 브루클린 아파트를 소개해줬다. 그 아파트에 세들어 살던 사람이 옥사나였다."


한대수: "집 구하러 갔던 아파트에서 옥사나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몸매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옥사나가 다가와 얼굴을 보는 순간 정말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년이 젊어진 느낌이었다."


당시 한대수는 44살이었고, 옥사나는 22살이었습니다(한대수 나이 차이).

또한 옥사나는 부티크 전속 모델로 일하고 있었고, 대학 졸업 뒤에는 국제 증권회사에 입사가 예정되어 있었죠(후에 그 회사의 사무실장(관리부장)까지 승진함).

(한대수 아내 옥사나 직업)(한대수 부인 옥사나 혼혈, 몽골계 러시아인)


한대수: "바로 그날 보드카를 나눠 마시며 그집에서 하룻밤을 보낸뒤 매일 데이트를 즐겼어요. 결국 두달만에 청혼을 했는데, 거절하지 않았어요. 어린 나이에 그것도 아버지뻘인 남자에게 인생을 맡긴다는, 참 대담한 결정을 한 거죠."


결국 한대수와 옥사나는 1992년 결혼식을 올립니다(한대수 재혼)(한대수 아내 부인 옥사나)(한대수 배우자).

한대수: " 92년 맨해튼 러시아 정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어요. 그런데 전처였던 명신이 갑자기 연락이 왔어요."



* 한대수 전처와 현부인과의 기묘한 동거 생활


한대수: "몇 년만에 명신의 전화를 받고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요. 독일인 남편과 별거중인데 독일경찰서에 있다며 도와달라고 애원하더라고요. 20년 동안 당신의 아내였지 않았냐면서요. 명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망설이다가 옥사나에게 명신이 처한 상황을 얘기했어요."


한대수: "명신은 20년 동안 저의 아내였어요(결혼 전 동거기간 포함). 제 인생을 지배하던 음악보다 더 소중하고 인생의 전부라고 여겼던 여자였어요. 적어도 함께 살았던 19년 동안은 그랬어요. 딱 1년. 미움과 증오가 쌓였던 1년을 제외하고요.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온 저에게 명신은 어머니였고 누이였으며 친구였어요. 그런 명신과 이혼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벌어졌고 운명처럼 옥사나를 만나 재혼했다가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명신과 셋이서 살았던 겁니다."


옥사나 역시 김명신에게 도움을 줄 것을 찬성했고, 결국 한대수는 전처와 현부인과의 기묘한 동거(?)를 시작합니다.



옥사나: "(한대수에게) 당신과 2년밖에 살지 않은 나도 당신을 이토록 사랑하는데 명신이 어떤 심정일지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는다."


한대수: "그때처럼 옥사나가 존경스러워 보였던 적이 없어요. 우리가 쓰던 침실을 명신에게 내주고 거실에서 잠을 잤어요. 두 여자를 먹여 살렸죠. 당시 명신은 심한 신경쇠약에 걸려 있었는데, 셋이서 사는 것은 정말 쉽지 않더군요. 전 아내와 현재의 아내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감정 싸움도 있었고요. 희한하기 짝이 없는 삼각관계가 정신병에라도 걸릴 만큼 힘겹게 이어졌어요."


한대수 아내와 딸 사진


옥사나: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같이 살았던 아내인데,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냥 내버려둘 수 없잖아요. 그녀가 곤경에 처해 있다는 소리를 듣고 남편 맘이 편치 않은 것은 당연하고요. 명신의 맘이 편해지면 제 남편의 맘이 편해질 것 같았어요. 남편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에 셋이서 같이 살게 되었어요."


당시 옥사나의 나이가 불과 24살이었는데, 젊은 나이였는데도 상당한 이해심을 보였네요.


한대수: "같이 살았던 넉 달이 마치 4년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두 여자 사이에서 중간 역할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죠. 우리는 명신이 마음을 치료하고 자기 삶을 꾸려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제가 결혼한 줄 몰랐던 명신은 독일에서 돌아올 때 저와 새로 시작하려 했다고 옥사나 몰래 뒤늦게 고백하더군요."



한대수: "우리나라도 여성들이 성적인 불만 등을 이유로 바람을 피워서 가정이 파탄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혼은 신중히 결정해야 할 문제죠. 옆집 풀밭이 푸르게 보여서 좋다고 떠나봐야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집 정원이 훨씬 좋다는 걸 알게 돼요.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요."



결국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김명신은 후에 이들 곁을 떠나 홀로 독립하게 됩니다.

정말 한대수나 옥사나는 보통 사람이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했네요.



* 한대수 한국에서의 재기와 딸 한양호 출생


그뒤 한대수의 음악은 묻혀 있다가 1997년 일본에서 재조명을 받게 됩니다.

일본의 록스타 카르멘 마키가 자신의 후쿠오카 라이브 콘서트에 한대수를 게스트로 초청했고, 공연은 대성공을 이루게 되었죠.

그 후에야 한국의 신문과 방송은 한대수의 과거 삶을 재조명하게 됩니다.


우리가 가진 귀중한 보물도 일본인 덕분에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는 점이 고마우면서도 씁쓸하네요.


한대수: "왜 제가 더 젊고 열정에 가득 찼던 시절에 알아주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는 아쉬운 마음도 있지만 그래도 영영 안 불러주는 것보다는 늦게라도 찾아주는 게 고맙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당시 증권회사에 다니던 옥사나는 자녀를 가지고 싶어합니다.

한대수: "결혼 당시 이미 저는 40대 중반이었기 때문에 딱히 아이를 낳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인간의 삶이라는 게 늘 고통의 연속인데, 자식을 낳아 그걸 물려주고 싶지도 않았고요. 그런데 처음엔 그런 제 생각에 동의하던 옥사나가 나이 들수록 자꾸 아이를 갖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서른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나름대로 노력하는 눈치였지만 잘 안됐죠."


결국 한대수의 국내 활동 분위기가 조성되고, 옥사나 역시 아이를 가지기 위하여 바쁜 증권 회사를 청산하고, 둘은 한국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후 한대수 옥사나 부부는 2007년 6월 딸 한양호(영어 이름은 미셸)를 가지게 됩니다.

(한대수 자녀 자식)(한대수 딸 한양호)


한대수 가족 사진


* 한대수의 담담한 인생관


그런데 이제는 행복을 찾을 것 같던 한대수였는데, 이번에는 또다른 불행이 찾아왔네요. 바로 아내 옥사나가 심한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인 것이죠.


한대수: "옥사나의 알코올 의존증은 20년 넘는 지병이에요. 점점 더 심해졌죠. 그녀의 어머니와 삼촌 역시 알코올 의존증으로 세상을 떠났는 가족력이에요. 중독은 치료가 잘 안되는, 병보다 무서운 거에요."


옥사나는 딸 양호를 직접 돌볼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안좋기에, 결국 한대수가 딸과 아내를 직접 돌보아야 할 정도입니다.

젊은 시절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았던 그였는데, 노년기에 책임감(?)을 갖게 되었네요.


그런데 한대수는 세상을 달관한 듯, 이 모든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한대수: "하늘은 참 공평해요. 난 태어나서 50년간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그런 인생을 살았어. 여자도 많이 만났고, 어려운 시절에 내가 하고 싶은 음악도, 사진도 찍으면서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았지. 그런데 인생 100년이라면 나머지 오십년은… 하하하. 이거 참, 양호하지 못해. 하하하."


한대수 딸 사진


한대수: "내 딸 양호는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지금부터는 구속당하는 거지. 족쇄야. 버릴 수 없는 십자가지. 아내는 알코올 중독자인데, 아주 지독한 중독자야. 내가 책에도 썼지만 그녀 집안의 이력이기도 해. 중독은 치료가 안되는 건데, 기적이 일어나서 옥사나가 정상인 된다면 좋은 거고. 안되면 내가 평생 지고 가야 해. 중독은 암보다 무서워."


한대수: "우선 난 나이가 너무 들었어요.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힘들어. 그리고 이 나이에 화폐를 벌기 위해 아침에 방송국에 가서 일을 하잖아. 그럼 부인이 퇴근하는 남편을 위해 된장찌개 보글보글 끓여 놓고 굴비 한 마리 구워 놓고, 마누라와 딸이랑 저녁 먹어야 되잖아. 하하하, 그게 안돼. 난 저녁이 되면 아내와 딸을 돌봐야 된다고.. 이제 우리 양호가 여덟 살이야. 환장하는 거지. 그래서 난 화폐를 벌어야 돼."


한대수: "나이 육십에 자본주의를 알았어. 사실 노래 부르는 남자 혼자 살면 화폐가 뭐가 필요해. 그냥 사는 거지. 하지만 화폐가 말이야. 그게 없으면 양호가 거지가 돼. 처음으로 자본주의가 무서운 것을 알았지. 양호 전에는 자본주의가 뭔지 몰랐어. 요즘엔 항상 화폐를 준비하고 있어야 해. 갑자기 양호가 아프면 병원에 가야 되잖아. 화폐를 모으면서 오래 살아야 돼. 난 오래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어. 하지만 이젠 좀 (오래) 살아야 해."


예전 한대수는 히피 정신에 대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히피사상의 근본은 사랑과 평화죠. 히피정신은 서로 공유하는 것이고 예술과 창작정신을 중요시하는 거죠." 

그리고 한대수는 평생 재산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평소 열평짜리 작은 방에 만족하면서 돈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죠.


하지만 딸이라는 존재가 한대수를 180도 변화를 시켰네요.

나이 육십에 자본주의를 알았다는 노가수의 담담한 고백이 당연하면서도 슬프게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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