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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한서희 남편 김상협과 탈북이유 명성희 노래 실력

한서희 김상협 러브스토리 및 인생 이야기

요즘 탈북한 새터민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군인과 일반인 위주였는데, 점차 북한의 엘리트와 최고 권력자 집안, 그리고 가수와 성악가를 비롯한 예술가 등으로 점차 다양화되고 있네요.


대표적인 탈북 미녀 두명인 한서희와 명성희의 경우를 통해서 그들의 북한에서의 생활, 탈북 이유,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오해를 짚어보겠습니다.


한서희 남편 사진


(한서희 학력 학벌) 평양음악무용대학

(한서희 프로필 및 경력 사항) 인민보안성협주단

(한서희 직업) 북한에서 성각배우(성악가)로 활동


한서희 나이는 약 33살입니다.

그리고 집안이 북한에서 권력자층 출신입니다. 탈북자중에서 출신 성분이 좋기로 소문이 났죠.


사실 한서희는 북한에서 남부러울 것이 없는 생활을 했는데, 오빠 때문에 본의 아니게 탈북을 하게 됩니다(한서희 탈북 이유).


한서희: "아버지는 이름이 꽤 알려진 행정 간부였어요. 하지만 우리 가족이 2006년 10월 두만강을 건너야 했죠. 친오빠가 출신 성분이 좋지 않은 여자와 사랑에 빠졌고, 결국 먼저 탈북을 감해했어요."


이때 출신 성분이 좋지 않은 여자가 바로 한서희의 어린 시절 소꿉친구이자 현재의 올케인 박서영입니다(한서희 가족 관계).


한서희와 시누이 올케 관계인 박서영 사진


한서희: "우리 가족은 오빠의 탈북 사실을 닷새 만에 알아챘고, 결국 보름 후에 뒤따라 북한을 떠났어요. 사실 노동자 집안의 가족 중 하나가 탈북하면 다른 지방으로 추방당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간부 집안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온 가족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요. 살아남기 힘들다고 봐야죠."


한서희: "중국을 거쳐 몽골 난민수용소에서 4개월을 보냈는데 생활이 너무 고달파서 차라리 고향에서 죽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기도 했어요. 2007년 온 가족이 한국 땅을 밟은 뒤에도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져 처음 3년간은 힘들었고요."



* 한서희 별명(북한의 김태희)

북한에서의 한서희의 정확한 소속은 소품조(어은금병창조)입니다.


한서희: "어은금은 만돌린과 비슷하게 생긴 4줄짜리 현악기예요. 어은금병창조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개인 연회에 불려가 비밀 공연을 하는 일이 잦다 보니 선발과정이 까다로웠어요. 김 위원장도 공연이 끝나고 와인을 한잔할 때 ‘어은금병창조엔 미인만 있다’는 칭찬을 잊지 않았어요. 과일통조림이나 화장품세트, 서양녹음기 같은 선물도 주고…."



한서희의 노래 실력이 대단하네요.


(초반 부분에 탈북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고, 그 이후에 노래를 부르는데, 목소리가 아주 간드러지네요. 아마 북한의 정통 창법같습니다)


이제만나러갑니다 한서희 120325


예비 며느리,한서희의 노래.이제 만나러 갑니다 E31.120701




한서희: "그리고 북한의 기쁨조는 남한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성접대를 하는 곳이 아니에요. 기쁨조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등 최고 권력자들 앞에서 공연만 하죠. 남한 사람들에게 알려진 그런 곳은 '5과'라는 곳인데, 그 곳에서는 한국에서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 벌어져요."


보통 이름때문인지 우리는 기쁨조가 북한의 최고 권력자에게 성접대를 한다고 많이 알고 있는데, 그런 조직이 따로 있었네요.


한서희: "'중앙당 5과'는 김일성이나 김정일 별장에서 별장을 관리하는 일을 해요. 궁녀랑 똑같다고 보면 되죠. 일반적으로 북한 사람들은 5과 선발돼 간다면 영광이라고 생각해요. 출신성분이 높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실제로 들어간 본인들은 아주 힘들죠."


한서희: "또 결혼을 할 때도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없고, 당에서 정해준 사람의 사진 한 장만 보고 결혼을 해야 하고요."


북한에서는 결혼은 물론 이혼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죠.

이런 한서희의 설명에 같은 탈북자 강명도가 보충 설명을 합니다.



강명도: "'중앙당 5과'의 선정 과정은 매우 엄격하다. 각 군에서 학교마다 다니며 인물도 괜찮고 키도 괜찮은 아이들을 뽑는다. 선정이 되면 모두 장교가 된다. 휴가를 받아 집에 갈 때는 멋진 장교복을 입고 김정일 선물까지 들고 집에 보낸다."


한서희: "하지만 실상을 아는 사람은 (딸을) 안보내려 한다. 자기 딸이 남의 시중들고 잠자리도 같이 해야 하는데 어떻게 보내겠느냐. 또 처녀검사까지 다 한다. 숫처녀가 아니면 통과도 되지 않는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쁨조로 생각했던 '5과'의 실체가 이렇군요.

21세기에 궁녀 생활을 하는 여자들이라... 북한이 어느 정도인지 알 것 같습니다.



2007년 한국땅을 밟은 한서희는 이후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한서희 남자친구 김상협)

그리고 2012년 결혼하게 되죠(한서희 배우자 김상협).

참고로 김상협은 IT업계에 종사하는 일반인입니다(한서희 남편 직업).


한서희 시어머니 및 가족 사진


김상협: "처음 여자 친구(한서희)를 만날 때 억양이 좀 달라서 우리나라 사람이 아난 줄 알았다. 그 이후 백화점 VIP룸으로 들어가서 커피를 마셨는데 그때 여자 친구가 북한출신이라고 고백했다."


김상협: "북한 출신인 아내는 (남한 여성과) 두 가지가 틀린데 먼저 같이 밥 먹을 때 내가 수저를 들어야 밥을 먹는다."


북한이 여전히 가부장적인 사회인 것을 알 수 있네요.

김상협: "그런데 가끔 싸울때 (남한에서는) "너 죽을래?" 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자 친구는 소멸 당하고 싶냐 라고 말해 가끔 무서울 때가 있다."


확실히 문화 차이가 말로도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이후 한서희 김상협 부부는 딸을 한명 낳습니다(한서희 자녀 자식).

그리고 한서희는 방송에도 출연하면서 안보강사로도 활동합니다(한서희 직업).



한서희: "북한서 스마트폰은 부의 상징이다. 최근 북한에도 스마트폰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만 대한민국처럼 네트워크가 원활하지 못해 스마트폰이긴 하지만 터치폰 기능밖에 안 된다."


한서희: "북한에서 스마트폰 가격은 북한 쌀값으로 계산하면 쌀 300∼400kg 정도의 가격이다. 현재는 재력이 있는 상위 10∼15% 사람들만 쓰는 걸로 알고 있다."


한서희: "지금 북한에선 김일성 김정일이 죽고 혼란스러워 한다. 그러자 김일성이 환생한 모습으로 김정은을 만들어놨다. 리설주도 김정숙의 본 얼굴과 옷차림을 비슷하게 입혀 내놓더라. 김정숙의 얼굴과 비슷하다."


한서희: "리설주의 경우에는 은하수 관현악단에 있었다. 그 곳에서 장성택의 노력으로 김정은의 부인이 된 것 같다."


한서희나 이은혜, 박영심, 박정심, 박정복 등의 탈북 미녀들의 활약으로 북한에 대한 오해와 진실이 일반 대중들에게도 자세히 전해지네요.

남한에서의 북한에 대한 편견을 조금이나마 줄여 통일 이후를 대비하는 한걸음같습니다.




한서희가 어쩔이 없이 북한 탈출을 감행했다면, 명성희는 좀 다릅니다.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남한행을 선택했죠.


명성희도 한서희처럼 이름난 행정 간부 집안의 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북한 상류층에 속하는 엘리트 출신입니다.

명성희 아버지가 명동찬인데, 북한의 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명동찬입니다(북한에서 인민 체육인 칭호를 받았는데, 이미 작고함). 


명성희: "1990년 남북통일축구 경기로 서울에 왔었던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명동찬이세요."


또한 명성희 어머니 역시 북한에서 유명인사였죠.

명성희: "북한에도 뮤지컬 장르가 있는데 가극이라고 불러요. 혁명사상 바탕의 가극이 대부분이죠. 어머니도 북한에서 유명한 뮤지컬 배우였어요. 30년간 뮤지컬 배우로 활동했고, 북한말로 수령님과 장군님을 모시고 행사 공연도 했죠."


명성희: "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북한에서 아이스크림 공장을 크게 하고 있었어요. 사실 어머님은 가도 좋고 안가도 좋고 그런 입장이었어요. 자유롭게 노래를 하고 싶던 제 꿈에 어머님도 결국 감복하셨죠."(명성희 가족 관계)


(명성희 학력 학벌) 평양음악무용대학 성악과

서울예술대학 실용음악과


(명성희 프로필 및 경력 사항) 평양영화방송음악단 단원

이후 남한에서 트로트 가수 명가람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도 합니다.


(명성희 나이) 약 32살임

(명성희 별명) 평양의 조수미


명성희는 음악에 대한 꿈 때문에 탈북을 하게 되었지만, 사실 여기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도 있습니다(명성희 탈북 이유).


자유를 노래하는 탈북녀 명성희 @놀라운 대회 스타킹 140719  

(초반 부분에 명성희가 탈북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고, 그 이후에 노래를 부르는데, 목소리가 아주 맑고 청아하네요.) 


김성기 노래교실... 팝페라 초대가수 명성희- 넬라 판타지아


명성희: "음악의 자유를 위해 남한에 왔어요. 제가 처음 노래할 때 진성 소리를 많이 썼거든요. 그래서 평양음악무용대학에 입학했을 당시, 교수님들이 북한 음악하기 힘든 목소리라고 그러셨어요. 그런데 공훈가수 출신인 어머니께 소리 내는 법을 배운 후 단기간 내에 발성이 클래식에 적합한 창법으로 바뀌었어요. 지금도 어머니는 제 노래의 스승이세요."


명성희: "사실 내 목소리는 두껍고 허스키한 진성이에요. 얇고 간드러지는 북한 스타일에는 잘 맞지 않았어요. 조선인민군협주단에서 뮤지컬 배우로 활동했던 어머니는 '너는 북한에서 통하는 목소리가 아니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외국에 가보면 우리 성희 목소리 같은 음악 소리가 많이 들리더라'며 인정해주셨죠."



이렇게 명성희의 목소리는 북한에서 주류가 되는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명성희: "제가 22살때, 영화방송음악단 소속 가수로 활동하는데 우울증이 찾아왔어요. 자유롭게 음악을 하고 싶었거든요. 북한 음악은 주체 발성법으로 노래해야 해서 심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그러던 중 자살 시도도 했었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운명인지, 자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어요. 다시금 마음을 진정시켰죠. 하지만 그때부터 매일 남한으로 가서 자유롭게 노래할 생각만 했어요. 그러던 중 브로커를 통해 남한으로 올 기회를 잡은 거죠. 행운이었어요."


보통 명성희가 언론매체와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데, 여기에는 약간의 거짓말같은 과장이 포함되어 있네요.

사실 명성희는 집안의 출신 성분때문에 북한에서의 출세가 막혀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명성희: "이모가 큰 외화벌이 사업을 했어요. 1년에 100만달러를 국가에 납부할 정도였다고 해요. 하지만 어떤 일이 생겨 1995년에 요덕수용소로 갔어요. 그 일로 나는 '칠보산음악단'에 시험 쳤지만 신분 조회에서 떨어졌어요. 인민무력부 산하 '적공국'에도 지원했지요. 남한 곡조에 혁명성 가사로 바꿔 불러서 대남 방송에 틀어주는 부서죠. 선발 시험에서 민해경의 '내 마음 당신 곁으로'를 불러보라고 했어요. 심사위원들의 칭찬을 받았어요. 그때는 노래로 장군님께 기쁨을 드려 이모님을 구해야겠다는 마음이었어요. 하지만 신분 조회에서 떨어졌어요."


명성희: "결국 평양의 음악무용대학에 진학해 클래식 음악을 배웠어요. 그 무렵 '왕재산경음악단' 관계자가 내게 시험을 보라고 했지만, 또 합격이 취소됐어요. 북에서 음악하는 사람에게는 '칠보산' '적공국' '왕재산'에 들어가는 게 꿈이에요. 앞이 막막했어요. 그때 담배를 피우고. 수면제로 자살을 시도했어요. 사흘 만에 깨어났어요."


명성희 어머니 사진


이렇게 명성희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출세의 길이 막혀 있었죠.

그뒤 명성희는 친척들의 도움으로 겨우 '영화방송음악단'에 들어갑니다.

이번에는 용케 신원조회를 넘길 수가 있었죠.


북한에서는 실력이 아니라 출신 성분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생생히 들려주는 산증인이네요.


이후 명성희는 탈북을 위하여 치밀한 계획을 세웁니다.

명성희: "복무원이 되기 전까지 나는 한 번도 평양 바깥을 떠나본 적이 없었어요. 탈출을 하려면 중국을 알아야 했어요. 그래서 중국 지안(集安)에 있는 북한 식당에 지원했던 거죠. 식당마다 인력이 필요하면 뽑아요. 문건 사업(신원 조회)을 합니다. 2003년 내가 지원했을 때만 해도 학력은 크게 따지지 않았어요. 봉사직에서 일했거나 미모가 뛰어나면 유리했어요. 식당에서 공연을 해야 하니까 노래와 무용을 잘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었고요."


명성희: "처음에는 중국 지안의 북한 식당으로 발령 났으나, 한 달 뒤 창춘으로 옮겼어요. 거기서 1년 8개월을 복무원으로 일했죠. 모두 식당 안 숙소 한방에서 잤고, 밤에는 방문을 걸어 잠갔어요. 외출할 때도 서로 감시하기 위해 꼭 두세 명이 함께 움직였죠. 그리고 새벽 6시 기상해서 8시가 되면 식당 앞에 나와 음악을 틀어놓고 손님을 끌기 위해 율동을 했어요."


명성희: "나도 원래 거기서 뛰려고 했는데(중국에서 탈출을 하려고 했는데), 중국에서 뛰면 보위부가 집중해서 더 잡히기 쉽다는 걸 알았죠. 나는 북한으로 다시 들어와서 브로커를 통해 탈출했어요."



명성희 역시 한서희처럼 북한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이야기해줍니다.


명성희: "남한에는 북한 축구대표팀이 외국과 경기에서 지면 아오지 탄광으로 간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에요. 아오지 탄광에 가거나 그렇지는 않고, 다만 결과가 안 좋으면 감독 자리에서 물러나 자숙 시간을 갖죠."


명성희: "또한 성적이 좋으면 '선물집'을 줘요. 아버지도 50평정도 되는 집을 선물로 받는 적이 있어요."



사실 이제는 남한과 북한 사이에 더 이상의 체제 경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우리가 북한에 대한 실상을 제대로 알아서, 통일 이후의 혼란에 대비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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