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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 여가수 이야기

가수 방미 남자친구와 결혼 안한 이유, 방미 200억 부동산 재산의 의미

가수 방미 러브스토리 및 인생 이야기

가수 방미에 대해서 흥미로운 부분은 2가지입니다.

첫번째는 그녀가 약 200억원대의 재산을 형성했던 과정이고, 두번째는 그녀와 남자친구간의 러브스토리입니다.


방미가 주장하는 것과 대중들의 인식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어느 쪽이 맞을까요?


가수 방미 사진


가수 방미(본명 박미애)는 1962년 4월 27일 태어납니다. 올해 53살입니다(가수 방미 나이).

(가수 방미 학력 학벌) 서울 송곡 여자고등학교, 뉴욕 브룩대학 연출연극전공

(가수 방미 프로필 및 경력) 1979년 MBC MC 및 코미디 공채 2기에 합격,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어린 나이로 데뷔.



처음 코미디언으로 활동하다가, 신인 시절 발표했던‘날 보러 와요’가 크게 히트하면서 가수로 전향합니다. 

이후 '주저하지 말아요', '계절이 두번 바뀌면', '욕심많은 여자' 등의 히트곡을 남기게 됩니다.


방미의 어린 시절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방미: "어머니는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여린 여자였지만, 아버지가 이북에서 혼자 내려오셨다. 아버지는 엄했다. 외롭고 괴로웠던 것을 노름으로 풀었다. 내가 열 몇 살부터 아버지가 가족을 등한시했다. 경제적으로 들쑥날쑥 이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폭력을 쓰기 시작했다."(방미 가정사)


방미: "어린 시절 너무나 가난했던 우리 집에는 항상 부족한 것들이 천지였다. 늘 불안에 떨어야 했다. 단칸방에서 단칸방으로 수없이 이사를 할 때면 슬펐고 힘들었다. 화투를 너무나도 사랑하신 아버님 때문에 우리 가족은 항상 불안했고, 불규칙했으며, 늘 돈이 없었다. 난 어린 시절이 행복하지 않았다."


가수 방미 젊은 시절 과거 사진


가수 방미 리즈 시절 사진


방미: "반란을 일으킨 건 나다. 19살 쯤 방송국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어머니를 데리고 나왔다. 내가 부모님을 이혼 시켰다."


방미: "동생이랑 가끔 ‘술집으로 안 빠진 게 다행이다’고 이야기 한다. 둘 다 얼굴이 반반하니까. 그런데 나는 어릴 적부터 바른 생활이 몸에 뱄다. 아버지를 보면서 더 ‘아버지처럼 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렇게 방미가 소녀 가장이 되어서 어머니를 부양하게 됩니다.

가장이 노름에 빠지고 폭력적으로 변하면, 가족들이 힘들어지게 되죠.


방미: "결국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아버님이 내게 남기신 단 하나의 교훈은 ‘돈이 없으면 살 곳을 찾아 이사를 자주 해야 하고, 돈이 없으면 사고 싶은 거나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고, 돈이 없으면 가족도 행복해질 수 없다’는 처절한 교훈이었다."


결국 방미는 이렇게 아버지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됩니다.

어릴 적부터 돈에 대한 확고한 가치관을 가지게 된 거죠.



방미는 신인 코미디언 시절 발표했던 노래 '날 보러 와요'가 공전의 히트를 하면서 영화로까지 제작됩니다. 이때 받은 출연료가 그녀를 자산가로 만든 밑천이 되었죠.


방미: "데뷔하자마자 히트곡을 내기가 어렵잖아요. 요즘도 그렇지만 인기가 있으려면 운도 따라야 해요. 제 생각에는 운이 70% 정도 작용하는 것 같아요. 그 다음에는 인기를 유지하면서 자기관리를 잘해야 되는데 그게 어렵죠."


방미는 이 영화의 출연료 7백만원으로 대전 유성온천 근처에 땅을 삽니다. 이 땅은 12년 후에 20배가 넘는 1억5천만원에 팔렸는데, 이것으로 방미는 부동산 투자의 묘미를 알기 시작합니다.


또한 강남지역 아파트를 구매해서 3년만에 5배가 넘는 값을 받고 팔기도 합니다.

80~90년대는 재개발과 더불어 부동산 투기가 횡행했던 시절이죠.



방미: "많은 동료들이 젊은 시절 놀고, 돈을 쓰며 으시대고, 명품에 비싼 외제 차를 타면서 해외로 놀러 나가 쇼핑할 때, 난 내 미래에 약속했다. “꼭 부자가 될 거다”를 외치며 젊은 활기가 넘치던 자신을 추슬렀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내 꿈을 이루려면 “돈, 그것도 큰돈을 만들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난 전투를 시작했다."


방미: "난 이미 20대 후반에 집을 네 채나 가지고 있었다. 30대 중반엔 당장 일을 안 해도 살 수 있는 한국의 건물과 주택, 미국에는 집과 사업체를 포함한 상당한 부를 가지게 됐다. 노력한 대가였다."


이렇게 부동산뿐만 아니라, 방미는 환차익까지 잘 이용합니다.

방미: "93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었는데, 98년초 유학자금이던 현금 14만달러와 집안살림살이, 고가의 벤츠 승용차를 팔아 한국으로 달러를 송금해 한달만에 2배가 넘는 환차익을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다시 뉴욕의 콘도를 분양받는 투자금으로 활용했다."


1998년이면 한국의 외환위기였고, 환율이 2배 이상으로 폭등하던 시기였죠. 이를 방미가 활용했던 것 같네요.



방미: "또 2000년에는 뉴욕의 업타운에 위치한 30만달러 규모의 집을 구매해 부동산 시세가 최고치에 올랐던 2004년에 매각해 수입을 남겼다. 또 2006년에는 맨해튼가 리버사이드의 콘도를 구매했다가 일년만에 두 배의 가격으로 되팔아 시세차익을 얻었다."


방미가 미국에서도 부동산 투자에 성공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방미는 200억원대의 재산을 형성할 수 있었던 거죠.

그런데 방미가 했던 것이 과연 투자냐, 투기냐는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방미: "부동산을 투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은데, 저는 부동산은 ‘투자’라고 생각해요."



(국어사전)

투자: 이익을 얻기 위하여 어떤 일이나 사업에 자본을 대거나 시간이나 정성을 쏟음(Investment).

투기: 기회를 틈타 큰 이익을 보려고 함. 또는 그 일(Speculation).


사실 투자와 투기를 명확하게 나누기는 쉽지 않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견해가 장기와 단기로 따지는 것인데, 즉, 장기적인 계획하의 자금 집행은 투자, 단기적인 이익을 위한 행동은 투기로 나눕니다.

하지만 이를 두고도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죠.



그런데 애덤 스미스의 말로 어느 정도 대략적인 구분이 가능합니다.

애덤 스미스: "투자는 상품을 사용해서 얻는 이득을 보고 거래를 하는 것이고, 투기는 구매하는 상품의 가격 상승을 바라고 그 매매 차익을 위하여 거래하는 것이다."


즉, '상품의 사용'에 의한 이득이면 투자, 처음부터 매매 차익을 위해서면 투기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죠.

그런 의미에서 방미는 스스로 '투자'라고 생각하겠지만, 처음부터 그녀의 행동은 투기였던 것 같네요.


사실 사람들의 경제 활동을 통하여 돈을 버는 행위는 크게 2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다른 사람에게 효용을 제공하여 이득을 취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다른 사람에 대한 효용과는 별도로 돈을 버는 것이죠.


예를 들어 전자의 경우는 휴대폰과 이발사가 있습니다. 휴대폰 회사는 휴대폰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이동통신 단말기라는 효용(이로움)을 제공하고, 이발사 역시 이발이라는 효용을 사람들에게 제공하면서 돈을 벌게 되죠.


그리고 후자의 경우는 매점매석과 부동산 투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사과를 모두 매점매석해 버리면 사람들은 높은 가격에 사과를 살 수밖에 없습니다(실제로 60~90년대에 매점매석에 의한 사과, 돼지고기 파동, 제수용품 폭등 등이 있었음).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추가적인 효용을 주지 않으면서 가격을 2~3배, 혹은 10배로 올리면서 부당 이득을 취하는 것이죠.

부동산 투기 역시 땅을 사거나 건물을 매입하여 별다른 노력없이 사람들로부터 폭리를 취하게 됩니다.



물론 한 지역의 부동산을 새로 개발하거나(도로나 건물, 기반 시설), 건물에 그 지역 특성에 맞는 가게를 내는 등의 행위는 사람들에게 효용을 주는 투자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방미처럼 우리나라 70~90년대의 대부분 부동산 투자는 별다른 효용 제고없는 투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방식을 불로소득이라고 사회적인 비판이 컸죠.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판을 하지만, 그들 역시 기회가 오면 마다하지 않죠.)


뭐, 어쨌든 시대가 변했고, 앞으로는 방미식의 부동산 투기는 성공하기 힘들 것 같네요.

앞으로는 이런 투기말고, 사람들에게 준 효용에 대하여 정당한 댓가를 받는 재산가들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았으면 합니다.


예전에 불로소득으로 재산을 형성한 사람들이 많기에, 우리나라에서 부자들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별로 좋지 못하죠.



가수 방미는 아직도 결혼하지 않은 미혼입니다.

하지만 평생을 같이한 애인은 있습니다.


방미: "나는 사랑하지 않을 남자한테는 비지니스만 하자고 한다. 하지만 연애할 사람에게는 선물공세를 펼친다. 명품은 안 사주지만 싼 것도 안 산다. 대신 자동차를 사준다. 15만불짜리 고급 자동차를 선물한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쓸 때는 확실하게 쓴다."


방미: "내 파트너(방미 애인)는 나를 만났을 때 대학교 1학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는 늦게까지 일하는 나를 도와 저녁 두세시까지 대신 운전을 해주는 매니저 역할도 자청했다. 내 궂은 일들을 다 해주면서도 부지런한 이 친구는 두 시간을 자고 새벽에 학교에 가 공부를 하면서 대학을 졸업했다. 난 이 시절의 고마움을 절대 잊지 못한다."


방미: "당시가 내 전성기때였다. 매일 엄청나게 바삐 움직여야 하는 내 스케줄을 도우면서도 그는 기어코 대학을 졸업했다. 그가 정말 좋아하던 일은 음악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원하던 건축공학과를 가야했고, 졸업 후에도 진로 고민이 많았다."



이때가 대략 198,89년 무렵입니다. 당시 방미는 이십대 후반이었고, 방미 남친(남자친구)는 갓 스무살이었을 때였죠. 사실 방미 연하 남자친구가 5살 연하라고 하지만, 그보다는 나이 차이가 더 나는 것 같네요(대략적으로 7~9살).

(후에 방미 남자친국는 국내 대학에서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UCLA에서 음악 프로듀싱을 전공하게 됩니다.)


방미: "내가 활동하던 당시 연예계는 지금과는 다르게 스캔들이 나면 곧 연예인 수명이 끝나는 그런 시절이었다. 때문에 우리는 숨죽여가며 만났고 힘들게 지내왔다. 나이 차이도 많으니 누구에게 자랑하며 알리기 힘든 시절이었다."


방미: "그(방미 연인)는 내가 자산을 만들어가던 과정 후반에는 많은 조언과 도움을 줬다. 나보다 어리지만 아주 똑똑하고 눈물이 많은 남자다. 언제나 한결같고 정직하며 부지런한, 그래서 어떤 일이든 정확하게 해내는 엘리트. 난 이 분을 내 파트너라고 부른다."


방미: "그는 나를 만나며 인생 경로를 바꾸게 된다. 이때 난 한강변 55평짜리 신동아아파트에 살았고, 방배동 삼호아파트를 한 채 더 가지고 있었다. 1988~1993년 아파트 가격은 폭등했다. 내 가수로서의 커리어도 당시 최고였다. 시간을 도무지 낼 수 없어, 내 파트너인 그가 부동산 일을 도와줬다.  이때 부동산은 모두가 사고 팔기를 정말 많이 하던 때다."



방미: "대학을 다니던 이 친구가 날 도와서 부동산 계약금, 잔금을 치르며 큰 돈을 만져야 했다. 비록 자기 돈은 아니지만 당시 배웠던 것들도 많았을 것이다."


방미: "우리는 형식적인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다. 하지만 오랜 시간 이 친구를 보면서 나에 대한 사랑을 확실히 알게 된 후, 내가 이 친구를 위해 나를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자, 난 연예계 생활을 청산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후 방미 남자친구는 국내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이에 방미 역시 남자친구를 따라 미국으로 떠나게 되죠.

사실 방미는 1989년 잠시 은퇴를 했다가, 1993년 정식으로 은퇴를 합니다.

당시 가요계의 판도가 10대 댄스 가수 위주로 바뀌었기 때문에, 방미를 비롯한 기존 가수들의 설 자리가 줄어드는 상황이었죠.


방미의 남자친구는 UCLA에서 공부를 하고, 방미는 미국에서 이모와 함께 뉴욕에서 액세서리 전문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전에 방미는 지인으로부터 사기를 당하게 됩니다.



방미: "아는 사람에게 사기를 당했어요. 급하게 돈을 빌려달라고 해서 처음엔 5천만원을 빌려줬다가 점점 더 많은 액수의 돈을 빌려주었는데 그 사람의 회사가 부도가 나고 말았어요. 그 바람에 7억원 가량의 거금을 고스란히 떼이게 되었죠."


방미: "그 충격으로 3개월 동안 밥도 못 먹고 병원 신세를 졌어요. 돈도 돈이지만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을 당하니까 제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세상 살기가 싫어지더라고요. 그 때문에 지옥에서 헤매는 것 같은 기분으로 몹시 힘든 나날을 보냈어요."(방미 우울증)


방미: "하지만 전 다시 일어섰어요. 한국에서는 도저히 살맛이 안나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 자그마한 사업을 벌였어요. 이모, 이모부와 함께 브로드웨이 28번가에 액세서리 전문점을 차렸죠. 또 주식에도 투자를 했어요. 제가 이재에 좀 밝거든요."


방미: "뉴욕 맨하튼에 가게를 오픈하고 6개월 동안은 매일 아침 7 시에 나와서 셔터 문을 열었어요. 인테리어 비용이 많이 드니까 페인트를 직접 사갖고 와서 칠하고, 전기선 라인 정리하는 것도 직접 다 했어요. 비용을 상당 부분 절감한 셈이죠."


그후 방미는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귀국하게 됩니다.



방미: "나는 먼저 서울로 돌아왔고, 친구는 2년 반을 더 체류하며 UCLA를 졸업하고서야 돌아왔다. 그런데 그가 친구 얘기를 듣고는 갑자기 주식을 시작하면서 돈을 잃었다. 더 이상 지켜 볼 수는 없었다. 나는 그 잃은 돈을 어떻게해야 찾을 수 있는지를 보여줘야 했다. 나는 그 회사 주가가 내려갈 때마다 사들여서 꽤 빠른 시간 안에 결국 원금을 회수할 수 있었다."


방미: "이래서 파트너가 좋은 거다. 어려울 때 의지하고, 서로 도우며, 다시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게 파트너다. 그 후 그는 주식을 6개월 만에 그만뒀다. 주식은 나와 맞지 않는 재테크다. 매일 앉아서 주가나 체크하며 컴퓨터를 들여보는 게 싫다. 돌아다니며 하는 일이 좋다."


방미: "친구는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승승장구했고, 내 예상대로 큰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는 어린 시절 내가 한 모든 일들을 오랫동안 지켜보며 많은 것을 공부했고, 서울과 미국 두 대학에서 10년 동안 공부를 하면서도 목표가 뚜렷했다. 문제는 사업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였고, 난 오랜 시간 흐트러짐 없던 그에게 투자하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분명히 하자. 나는 돈을 빌려 줬다. 친구는 친구고, 돈은 돈이다. 난 지금도 똑같다. 친구도 날 잘 안다."



이렇게 방미는 남자친구와 좋은 사업 파트너 겸 인생의 동반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정식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고, 자녀(자식)도 없죠.

하지만 실질적으로 남친이 방미 남편 같네요. 


방미: "내 남자친구와는 26년 동안 헤어졌다 만나기를 반복해어요. 특히 하와이는 내 전성기 시절 스케줄을 쪼개가며 비밀리에 남자친구와 만나며 추억을 만들었던 곳이에요."


방미: "남친이 일반인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불편해 할까봐 공개하기 어려웠죠. 하지만 부동산 부자 때문에 언론에 알려지면서 제 자신이 돈에 목숨 건 노처녀로 보여지는 게 싫더라고요."


방미: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서로 성격이 참 잘 맞아요. 설레고 떨리는 시기는 지났고, 지금은 목소리만 들어도 편안하고, 힘이 돼요. 연하지만 어떨 때는 오빠 같고, 또 모성 본능 을 자극해서 제가 엄마 같을 때도 있어요. 매 번 새로우니까 오랜 시간 만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방미: "제가 마흔세 살 즈음에 결혼이 너무 하고 싶었어요. 그땐 남자친구가 미국에서 사업을 확장할 때여서 너무 바빴고, 저 역시 그때가 지나고 나니까 굳이 결혼을 해야 하나 생각이 들어요. 둘 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고 살아서 평범 한 결혼 생활은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요."



현재 방미에게는 재산도 있고 사랑하는 남친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꿈은 없네요.


방미: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저는 꿈이 없어요. 주얼리 체인점을 오픈하는 건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하는 거예요. 가치관이 변하는 것 같아요. 20대 때는 연예인으로 출세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게 꿈이었고, 30대 때는 남자를 잘 만나 가족을 꾸리며 사는게 꿈이었고, 40대에는 전 세계를 돌며 비즈니스를 하고 싶었죠."


방미: "한데 지금은 여행을 다니고 사람을 만나고 간혹 한국에 들어와 사람들에게 재테크에 관련된 조언을 들려주며 제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요. 투자 전문가로 강의도 할 생각이에요."


방미: "돈이 많으면 인생이 돈에 매이게 되죠."


물론 방미는 행복할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워낙 가난하게 자랐기에, 현재의 돈이 없는 생활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고, 더욱이 현재의 삶에 만족하기 때문이죠.

다만 성공의 척도를 남편(혹은 아내)와 자녀들에 두고, 가정을 이루어야 행복해지는 사람이라면, 방미 같은 삶에서 결코 행복을 느끼지는 못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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